시, 사랑 그리고 박준

시, 사랑 그리고 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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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콜릿 컬러의 시집 한 권은 차게 식은 마음을 녹이기에 충분했다. 그 맛은 달콤하다가도 씁쓸했다. ‘이름 지어 먹는 시인’ 박준은 슬픔까지도 담담하게 시로 쓴다.

시, 사랑 그리고 박준

시, 사랑 그리고 박준

시인 박준(32)을 만나기 위해 자유로를 달렸다. 길도 막히지 않았고 하늘도 맑았다. 이제 막 물들기 시작한 주황 잎의 나무들은 밋밋한 도로 위에 줄지어 한껏 가을 향을 뿜어냈다. 도착한 곳은 파주 출판단지. 그는 먼 길 오게 해서 미안하다고 했지만, 오히려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을 정도로 운치 있고 한적했다. 날이 좋아 카페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수수한 옷차림에 조곤조곤한 말투, 무엇보다 그가 내뱉는 말에서 ‘아, 이 사람 시 쓰는 사람이지’라는 걸 느꼈다. 마치 이 만남이 한 편의 시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는 시를 쓴다. 출판사 창비에서 편집자로도 일하고 있다. 2008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했다. 4년 뒤에 나온 첫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문학동네)는 시집치고는 꽤나 많이 팔렸다. 그리고 얼마 전 O tvN ‘비밀독서단’에서 소개돼 또 한 번 유명세를 탔다. ‘사랑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배우 예지원은 박준의 시집을 추천했고, “내 마음 밭에 씨앗이 심어졌다. 마음이 활짝 열렸다”라고 평했다. 방송 이후 곳곳에서 ‘품절 대란’이 일어나 급히 책을 찍어내야 했다. 어떤 이는 그의 시에서 ‘사랑’을 읽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슬픔’, ‘죽음’, ‘서정’을 발견했다. 이 매력적인 시집을 접한 이들은 박준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을지도 모르겠다.

나온 지 3년 정도 된 책이 다시 주목받고 있어요. 기분이 어때요?
기존에 팔렸던 부수하고 방송 이후에 나갔던 부수하고 비슷해요. 그래서 기쁘기도 한데, 그 와중에 약간 씁쓸한 마음이 있어요. 방송의 힘이 큰 건 좋지만 그만큼 문학의 영향력이 줄어들었구나, 라고 생각하면 씁쓸해요.

박준 시인의 시집이 큰 위로가 된다는 평이 많아요.
사람들이 왜 위로를 받을까, 하고 생각해봤어요. 제가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독자들에게 위로를 줄 상대는 아니잖아요. 가만히 보니까 사람들은 타인이 슬픔에 빠졌을 때 그 슬픔에 공감하면서 스스로 위로를 받는 것 같더라고요. 제 시 중에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라는 시구절이 있어요. 지질하고 아픈 것들을 시집에 잔뜩 써놨죠. 그걸 보면서 자신들이 갖고 있던 슬픔을 꺼내놓고 가을볕에 말리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짧은 시 한 편, 한 편에 ‘이야기’가 담겨 있던데요.
나이가 아직 많지 않아서 제 경험만 썼다면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오지 않았을 거예요. 기자나 소설가처럼 저도 취재를 많이 했어요. 주제를 잡고 취재를 한 적도 있고, 낯선 동네에 가서 사람들의 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오기도 했죠.

작품 속에 지명이 많이 나오던데, 모두 직접 가서 취재한 거예요?
그렇죠. 태백에 관한 시가 있는데, 그 지역은 폐광이 많이 생기면서 인구가 엄청 줄었어요. 약간 폐허 느낌이 나는 그곳에 진폐증 환자들이 계시는 병원이 있어요. 광부에 대해서 써보고 싶어서 그 병원에 갔죠. 보호자 대기실에 가만히 앉아 있었어요. 이렇게 제가 본 것들을 시로 쓴 게 많아요. 타인의 삶을 스케치하듯 시를 쓰는 게 옳지 않은 건가, 생각한 적도 있어요. 그때 든 생각은 ‘다른 이들이 살아오면서 보였던 수많은 사실들을 모으면 진실 비슷한 것이 되지 않을까’였죠.

본인의 경험과 취재했던 것들이 어우러진 결과라고 볼 수 있겠네요.
제 시집에서는 아버지가 태백에서 광부로 일하다가 진폐증으로 돌아가시기도 하고, 파주에서 알코올 의존자로 살기도 하고, 통영에서 어부로 등장하기도 해요. 사실 아버지는 광부나 어부도 아니고, 더군다나 돌아가시지도 않았어요. 저는 그들의 삶이 제 아버지의 삶과 공간만 다르지 사실은 똑같다고 생각했어요. 하루의 대부분을 노동하는 데 바치고, 남은 시간도 다음날 노동을 위해 바치고…. 결국 모든 아버지의 삶이 같다고 느껴서 오히려 마음 놓고 썼어요.

책 속에는 ‘미인’이라는 단어도 많이 나와요. 어떤 의미인가요?
친누나가 사고로 세상을 먼저 떠났어요(시집의 마지막 페이지에 나오는 여인의 뒷모습은 그의 누나다). 제가 지칭하는 미인 중 반은 누나를 말해요. 나머지는 제가 살면서 아름답다고 생각한 사람들에 대한 헌시라고 할까요. 이러면 너무 거창한가요?(웃음). 당장 내 눈앞에 없으면 더 미화되는 것들이 있잖아요. 대부분 세상을 떠난 사람들에 대한 얘기들이에요. 혹은 제 곁을 떠났거나.

시집 전반에 깔린 ‘죽음’ 이미지는 누나의 영향을 받은 건가요?
물론 그런 것도 있죠. 사실 제가 자주 아파요. 어렸을 때부터 잔병치레가 많았어요. 열이 한창 오르면 삶도 아니고 죽음도 아니고 잠도 아닌 이상한 경계가 있거든요. 그 경계에서 약간의 쾌감이 느껴져요. 그럴 때 제가 메모를 하곤 하는데, 대부분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에서 쓴 거라 다음날 열심히 다시 해석해서 시를 쓰죠. 워낙 자주 아파서 항상 죽음은 그렇게 멀리 있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누나가 세상을 떠났을 땐, 죽음이란 게 갑자기 들이닥치는 게 아니라 늘 나와 같이 있다는 걸 느꼈죠.

방송에서는 시집을 ‘사랑’이라는 키워드로만 해석했어요. 공감했나요?
대중매체에서 시를 다룬다는 건 시도 자체만으로도 훌륭하죠. 그런데 얼마나 구현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그게 대중 감각이라고 봐요. 그들이 제 시집을 사랑의 키워드로 읽어냈다면, 그건 정말 사랑을 담고 있어서 그렇다고 생각하고요. 그 위에 있는 죽음이나 서정까지 봐주시지 않아도 저는 감사해요.

시를 건네다
여러 마리의 개를 키우며 수의사를 꿈꾸던 고등학생은 자신의 성적으로는 수의대를 갈 수 없다는 사실에 슬퍼했다. 그때부터 감정을 노트에 끼적이기 시작했다. ‘나는 왜 이렇게 한심할까’와 같은 자조가 대부분이었지만, 뒤늦게 보니 이런 게 ‘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문학을 공부하면서 이를 잘 배우면 누군가에게 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여느 친구들처럼 편입을 하거나 유학을 가지도 않았다. 모험하지 말고 하던 거 하자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왔다.
하지만 이 시대에 시를 쓴다는 게 가장 큰 모험이 됐다. 앉아서 시만 쓴 건 아니다. 밖으로 나가 소외된 이들에게 눈을 돌렸다. 문인들과 함께 용산참사, 강정마을, 4대강 문제 등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도 여러 번. 이는 그의 작품 속에도 잘 녹아 있다.

원래부터 소외된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았어요?
아뇨. 그렇게 관심 있진 않았어요. 제가 정치적 의식이 또렷한 세대도 아니고, 그 세대 안에서도 두드러진 사람이 아니에요. 시인이 되기 위해서 20대 대부분의 시간들을 보냈죠.

그럼 언제부터 주목하게 됐는지 궁금하네요.
등단했을 때 삶이 크게 달라질 줄 알았어요. 시인이 됐다고 막 거들먹거리고 싶었는데, 달라진 건 하나도 없었죠. 그때 한창 광우병 파동 때문에 광화문이 사람들로 북적였어요. 그들을 보면서 ‘저들은 누구지?’ 생각했는데 ‘시민’이라고 하더라고요. 등단하면 시인이 될 수 있는데 시민은 어떻게 될지 궁금해졌죠. 시로써 사람들을 계몽하고 현실을 바꾸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진 않아요. 쌍용차 정리해고나 강정마을, 4대강 문제, 모두 시민으로서 옳지 않다고 생각해 참여한 거고요. 그곳에 가서 뭘 하지도 못해요. 그냥 서 있다가 겸연쩍게 돌아오는 게 제가 하는 일이죠. 대부분 그런 현장들의 정서는 ‘투쟁’이 아니라 ‘슬픔’이에요. 제가 타인의 슬픔을 더 많은 타인들의 슬픔으로 쓰는 것을 비교적 잘한다고 생각해서 글을 남기게 된 거고요. 되게 거창해 보이지만 진짜 별거 아니에요.

작품 속에서 무척 담담하게 슬픔을 얘기해요. 설레는 사랑의 감정과 슬픔 사이에서 줄타기 하는 본인만의 방법이 있나요?
시를 처음 쓰는 분들이 직면하는 가장 큰 문제가 감정을 과잉으로 드러내는 거예요. 청파동을 배경으로 한 시에서 불에 타죽은 친구가 등장해요. 되게 담담하게 얘기하지만 사실 용산참사 때 불탄 남일당 주변을 뱅뱅 돌면서 썼어요. 하지만 구호나 메시지가 강력하지 않고 거기에도 사랑의 감정이 담겨 있죠. 타인에 대한 관심을 좀 더 키우면 희생된 분들도 제 친구라고 얘기할 수 있지 않지 않을까 싶어요. 그러면 저는 화를 낼 자격도 생기고, 화를 낸 뒤에 담담함도 생기는 거고요. 꼭 연인과의 사랑이 아니어도 돼요. 사랑의 범위를 좀 넓히면 사랑의 강도가 낮아지는 대신 적당한 거리는 유지할 수 있는 것 같아요.

평소에는 시를 어떻게 써요?
생각날 때마다 메모를 잔뜩 해놓고, 그 메모들을 모아서 시를 써요. 문인들이 대부분 게을러요. 그래서 마감을 정해놓고 쓰는 경우가 굉장히 많죠. 물론 저도 그런 부류 중 하나고요(웃음). 살다 보면 시가 될 만한 것들이 있어요.

예를 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주로 일상 대화에서 많이 찾는 편이에요. 며칠 전에 남자 고등학생이 지나가면서 친구한테 “나는 춥다고 생각하면 이가 덜덜 떨리는 것 같아”라고 얘기하더라고요. 그걸 듣고 시로 써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직 어떤 식으로 쓰게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시, 사랑 그리고 박준

시, 사랑 그리고 박준


시인이 사는 법
평소에는 시인의 정체성을 잠시 내려놓을 때가 많다. 시를 쓰는 것만으로는 먹고살기 어려운 탓에 직장에 다니지만, 항상 시인으로 살려고 하면 힘든 일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직장 상사의 꾸중을 ‘직원’이 아닌 ‘시인’인 자신에게 하는 말로 받아들이게 되면 그때부턴 견디기 힘들어진다. 그래서 출근할 땐 그 정체성을 집에 두고 현관문을 잠근다. 최근엔 고민이 하나 생겼다. 지난 6월 결혼한 새신랑인 그는 무척 행복해서 시 쓰는 데 애를 먹고 있다. 마음이 들떠있는 만큼 감정 잡기가 힘에 부친다고 한다.

부인과는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에요. 작가와 편집자의 관계로 알고 지내다가 제가 이 회사로 이직을 하면서부터 만나게 됐어요. 왠지 같은 회사를 다니게 되면 연애를 할 것 같은 느낌이 있었어요. 그런데 회사 내에서 연애를 하다 잘못되면 골치 아프잖아요. 그래서 한 달 동안은 정말 무뚝뚝하게 필요한 말만 하고 눈도 잘 안 마주쳤어요. 한 달이 넘으니까 그게 잘 안 되더라고요. 그 사람도 제가 회사에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저랑 똑같이 느꼈대요. ‘아, 연애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하지?’라고요.

얼마나 만난 거예요?
들으시면 웃으실 거예요. 6개월 만나고 결혼했어요. 근데 서로 레이더 안에서 눈치를 본 건 2년 정도 됐고요.

어떻게 2년 동안 서로 지켜보고만 있죠?
그냥 도도하게 행동하면서?(웃음).

작품 활동도 결혼의 영향을 받을 것 같아요.
일단 불행하지 않아서 좋아요. 다만 마음은 신나고 행복한데, 갑자기 시를 쓰려면 낯설어요. 행복하고 신나는 시를 써도 되지만 만약 제가 의도했던 감정이 슬픔이면 어려워지죠. 그래서 요즘 서투르게 잘 못 쓰고 있어요. 시행착오를 겪고 있습니다.

편집자로서의 삶은 어떤지 궁금해요.
편집자라는 직업이 좋은 점이 많아요. 대부분 자신이 하는 일을 좋아해요. 그런데 매일 글을 많이 읽다 보니 퇴근할 때면 간판도 보기 싫어져요. 저는 집에 와서 글을 써야 하는데, 괴리가 생기죠. 그런 상태에서는 시를 못 써요. 사실 이 점은 많이 실이 되고요. 제가 한국문학을 담당하는데, 동시대 좋은 작가의 작품들을 먼저 볼 수 있는 건 득이 되는 것 같아요.

소설을 써보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제가 짧은 시 안에 긴 이야기를 담잖아요. 거꾸로 얘기하면 아무리 긴 이야기라도 길게 못 써요. 내년에 산문집이 나올 예정인데, 산문 한 편도 양이 그렇게 길진 않아요. 소설은 절대 못 쓸 것 같아요.

두 번째 시집은 언제쯤 만나볼 수 있을까요?
시들도 얼추 한 권 정도 모였어요. 역시 내년에 나올 것 같아요. 두 번째 시집도 첫 시집과 비슷한 연장선에 있는 이야기들이 주로 차지하지 않을까 싶어요.

첫 시집이 워낙 잘돼서 부담이 크겠어요.
두 번째는 처음에 비하면 분명히 망할 거예요. 그래서 마음이 편해요. 첫 시집 낼 때 뭔가 달라질 줄 알고 기대에 들떠 있었거든요. 그런데 제 시집을 만들어준 편집자인 김민정 시인이 저한테 “준아, 우리는 잊힐 것이야”라고 얘기하더라고요. 그래서 단념을 하고 마음이 편해졌는데, 지금도 그 연장선에 있어요. 솔직하게 얘기하면 시가 잘돼도 인생이 바뀌진 않아요. 판매가 많이 되든 문학적으로 인정을 받든 제 삶이 달라지지 않을 만큼만 잘되거든요. 그래서 매력 있죠. 만약 문학으로 삶이 달라지는 사회였다면 저보다 글을 더 잘 쓰는 사람들이 경쟁해서 멀티플렉스 영화관처럼 소수만이 독식했을지도 몰라요. 그래서 시가 아무리 잘돼도 삶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 게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젊은 시인’이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붙어요. 나이 말고 또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해요?
주로 문단에서 쓰이는 말인데, 문단이 굉장히 관대해요. 생물학적으로 40대 초반까지 그 말을 놓지 않더라고요(웃음). 스타일이나 작품의 성향이 아직 변화 중이고 확정되지 않았다는 긍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어요. ‘이 시인의 깜냥을 아직 가늠할 수 없다’, 이런 뜻이 아닐까 싶네요.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을 마친 그는 자신의 시집 첫 페이지에 시 한 구절을 적어 기자에게 건넸다. “한철 머무는 마음에게 서로의 전부를 쥐여주던 때가 우리에게도 있었다.”

박준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중에서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이상한 뜻이 없는 나의 생계는 간결할 수 있다 오늘 저녁
부터 바람이 차가워진다거나 내일은 비가 올 거라 말해주
는 사람들을 새로 사귀어야 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이의 자서전을 쓰는 일은 그리 어렵
지 않았지만 익숙한 문장들이 손목을 잡고 내 일기로 데
려가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찬비는 자란 물이끼를 더 자라게 하고 얻어 입은 외투의
색을 흰 속옷에 묻히기도 했다’라고 그 사람의 자서전에
쓰고 나서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
었다’는 문장을 내 일기장에 이어 적었다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
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마음 한철

미인은 통영에 가자마자
새로 머리를 했다

귀밑을 타고 내려온 머리가
미인의 입술에 붙었다가 떨어졌다

내색은 안 했지만
나는 오랜만에 동백을 보았고
미인은 처음 동백을 보는 것 같았다

“우리 여기서 한 일 년 살다 갈까?”
절벽에서 바다를 보던 미인의 말을

나는 “여기가 동양의 나폴리래” 하는
싱거운 말로 받아냈다

불어오는 바람이
미인의 맑은 눈을 시리게 했다

통영의 절벽은
산의 영정(影幀)과
많이 닮아 있었다

미인이 절벽 쪽으로
한 발 더 나아가며
내 손을 꼭 잡았고

나는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미인의 손을 꼭 잡았다

한철 머무는 마음에게
서로의 전부를 쥐여주던 때가
우리에게도 있었다


■글 / 노도현 기자 ■사진 / 장태규(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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