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을 모른 채 아들을 떠나보낼 수 없습니다’ 배우 이상희

‘진실을 모른 채 아들을 떠나보낼 수 없습니다’ 배우 이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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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재점화, LA 유학생 사망 사건

배우 이상희라고 하면 다소 생소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어디에선가 본 듯 낯익을 것이다. 영화 ‘도가니’, ‘추격자’, ‘차우’, ‘이웃사람’ 등에서 조연으로 얼굴을 비친 연극배우 겸 영화배우다. 배우 인터뷰로 만났다면 더없이 좋은 일이었겠지만 이번 만남은 그가 겪은 사건으로 인한 것이다. 그는 유학 보낸 아들을 의문의 죽음으로 잃고 말았다.

‘진실을 모른 채 아들을 떠나보낼 수 없습니다’ 배우 이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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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생 사망 사건’의 전말
지난 2010년 12월, 연극과 영화를 통해 활동해오던 배우 이상희씨(55)의 장남 진수군이 미국 유학 중 숨졌다. 당시 진수군의 나이는 열아홉 살. 같은 학교의 한인 유학생에게 폭행당해 생긴 일인데, 그 이후 일들이 석연치 않다. 애초에 ‘살인 혐의’로 수사를 받던 피의자는 ‘정당방위’로 풀려났고 죽음 당시 입었던, 증거물로 제출한 옷가지는 사라졌다. 도움을 주겠다고 이상희씨 부부에게 접근한 거물급 한국인 변호사가 별다른 조치 없이 1년간 사건을 움켜쥐고만 있었던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가해자는 현재 한국에 돌아와 모 대학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부모가 원하는 것은 아들이 죽음에 이르게 된 진실을 알고 싶다는 것뿐인데, 그 진실을 밝히는 길은 무척이나 멀고 험난했다. 사건 발생 만 4년 만인 지난해 1월, 국내에서 부부가 고소를 하고 사건이 재점화된 상태다.

부푼 꿈을 안고 갔던 아들, 주검으로
이상희씨의 아들 진수군의 유학은 갑작스럽게 결정됐다. 원래 예고에서 발레를 전공했으나 넉넉지 못한 가정환경 탓에 대학교까지는 뒷바라지를 해줄 수가 없었다. 아들은 대학 지원을 미루고 다른 길을 알아보던 중 아버지의 영향으로 카메라 영상의 꿈을 다시 키워나갔다.

“아들이 취미로 다니던 성당 수도원에서 영상 공부를 했어요. 대학도 이 분야로 가고 싶다고 해서 이런저런 조언을 받던 중에 미국 쪽이 학비가 싸다는 이야기를 들었나봐요. 마침 사촌 형이 미국에 살고 있어서 갑작스럽게 유학이 결정됐죠. 발레 뒷바라지도 제대로 못해준 못난 아버지라 이번에는 집을 팔아서라도 학비를 대주려 했죠.”

진수군은 미국 내 관련 전문학교(테크니컬 컬리지)에 들어가려 했지만 관련 직종의 유망 대학교 입학을 준비하기 위해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부족한 영어 실력을 늘리고 현지 적응을 위해서였다. 즉 2년 어린 학생들과 동급생으로 함께 공부했던 것.

“그곳에서 적응은 누구보다 잘했다고 반 친구들이 얘기해줬죠. 영어는 완벽하지 않았지만 두 달 만에 수업 내용의 반 정도를 알아들었대요. 그리고 중간고사 때는 수학은 전교 1등, 올 A 성적을 받았다고 좋아했죠.”

부모가 넉넉지 않게 보내준 용돈으로 가계부를 쓰던 착실한 아들이었다. 자신과 같이 가족과 떨어져 홈스테이를 하는 유학생 친구들을 위해 아침에 샌드위치를 한 통 싸갈 정도로 인정 많은 아이였다.

“친구들을 좋아해서 살갑게 잘하는 아이였어요. 그런데 죽음에 이를 정도로 동급생과 심하게 다퉜다는 것이 전 이해가 안 가요. 심지어 가해자 쪽 진술에 의하면 진수가 튀어나와서 먼저 때렸다고 해요. 진수는 아빠가 욕 비슷한 말이라도 하면 ‘욕 좀 안 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할 정도로 욕이나 싸움을 싫어했던 아이입니다.”

진수는 딸 같이 살가운 아들이었다고 한다. 발레 콩쿠르 소식이 있으면 엄마와 함께 가서 감상하는 것이 취미였다. 갑작스러운 아들의 죽음 소식에 충격을 받은 건 누구보다 엄마였다.

장기 기증을 종용했던 사람들
이상희씨의 아내, 시나리오 작가 출신인 이해경씨는 아들의 사고가 있던 날인 2010년 12월 15일 새벽 5시 반 꿈도 아닌, 환시도 아닌 이상한 장면을 눈앞에서 목격했다고 한다. 아들이 피를 흘리며 “엄마 너무 보고 싶어”라고 말하는 모습이었다. 이상한 예감이 든 이해경씨는 미국에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다들 별일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답변이었다. 그런데 전화를 끊고 30분 후 진수군을 보살피던 사촌 형의 부인에게 전화가 왔다. 낮고 차가운 목소리였다.

“‘빨리 미국으로 들어오세요. 진수가 체육 시간에 싸우다가 쓰러졌대요’라고 말이죠. 보통일이 아니라는 예감이 들었어요. 다시 어학원에 전화를 했죠. 도대체 진수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재차 물었지만 상대방은 답이 없었어요. 그래서 제가 먼저 얘기했죠. ‘우리 아들… 죽었죠?’ 상대방은 그저 ‘죄송합니다’라고 하더군요.”

부부는 곧바로 미국행 비행기에 탔다. 공항에 도착한 뒤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얼마 전에도 통화한 적 있는 진수군의 여자 후배였다.

“‘진수 오빠 죽어서 어떡해요’라고 울먹이더라고요. 그러면서 ‘아직 어린 oo을 용서해달라’라며 한 아이의 이름을 꺼냈어요. 그 아이가 가해자라니! 저는 깜짝 놀랐어요. 얼마 전 진수의 생일잔치에도 왔던 아이인 거예요. 그런 애랑 싸워서 이런 일이 생겼다니 믿기지가 않았죠.”

미국에 도착한 뒤 부부에게는 이상한 일이 계속 일어났다. 공항에 학교 교장선생님이 나왔지만 그들을 마중 나온 것이 아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부부가 탄 비행기에 가해자의 부모도 함께 타고 있었던 것. 교장은 가해자의 부모를 맞이했던 것이다. 사건의 현장은 학교였지만 지금까지도 부부에게 학교 관계자가 연락을 취해온 적은 없다고 한다.

“사촌 형 부부의 차를 타고 진수가 있는 병원에 도착했어요. 차에서 내리자마자 아내는 다리가 풀려 맨땅에 쓰러졌어요. 휠체어를 타고 아들이 있는 방에 들어갔죠. 보기에는 그냥 자는 것 같은데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반응이 없었어요. 병원 의사에게 왜 수술하지 않았냐고 물었더니 자신은 뇌에 총상을 입은 환자도 살려낸 적이 있지만 이 환자의 경우 1%의 가능성도 없이 병원에 왔기 때문에 수술을 하지 않았다고 해요. 운동장에서 이미 사망한 거라고요.”

기계로 억지로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뇌사 상태의 아들을 앞에 두고 부부는 경황이 없었다. 게다가 병원에서는 기계 비용의 이유를 들어 1시간 뒤에 호흡기를 떼겠다는 통보를 해왔다. 그 와중에 부부를 도와주고 싶다는 사람도 나타났다.

“도와준다는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결국 장기 기증을 하라는 거였어요. 저희는 깜짝 놀라서 지금 상황에 무슨 장기 기증이냐고 나가라고 했죠. 일단 들어보라며 기증을 결정하면 장기를 받을 이들을 찾기 위한 36시간 동안 아들이 부모와 함께 있을 수 있고 화장비가 들지 않고 뭐가 무료고… 하며 말을 늘어놓는 거예요.”

이상희씨는 잠시나마 아들이 좋은 일을 하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장기 기증 서약서에 서명을 할 것인지를 놓고 고심을 하던 중, 평소 아들이 다녔던 성당의 신부님을 통해 뇌 전문 의사가 진수군의 병실까지 찾아왔다.

“그분이 진수를 찬찬히 살피시더니 성당에서 아이를 본 기억이 난다며 우시더라고요. 그러면서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꺼냈어요. ‘진수의 일은 사건이다. 지금 부모님이 경황이 없어 판단을 못 내리는 것 같은데 나중에 후회할 짓 하지 말라고 하시더군요. 장기 기증을 하면 사건의 실마리가 될 수 있는 부검을 할 수 없게 된다는 것. 그걸 그때 깨달았어요. 이미 진수의 얼굴은 검어지고 장기가 붓기 시작한 상태였죠. 아이가 힘들어하니 다 제거하고 그만 보내자고 하시더라고요. 그분의 말씀을 들으니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부부는 아들의 병실 앞을 기웃거리던 장기기증센터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걸어 잠갔다. 그리고 성당의 수녀님들과 함께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며 아들을 보내줬다.

“생일 축하 노래를 백한 번 불렀어요. 다음 세상에 태어나면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라고요. 그리고 호흡기를 뗐는데 맥박이 막 뛰더라고요. 진수의 마지막 맥박을 손으로 만지면서 미안하다고 했어요. 아빠가 능력이 없어서 여기까지밖에 못했다고 말이죠.”
그리고 차가워진 아들은 부검실로 향했다. 5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그때의 기억은 아버지 이상희씨를 다시 오열하게 만들었다.

1 이상희씨는 관련 자료를 보여주며 사건 진행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2 어린 시절 이진수군의 모습. 3 이제는 유품으로 남은 진수군의 학생증. 4 이상희씨의 모바일 메신저 프로필에는 ‘보고싶다, 진수야. 잘 있냐? 미안하고 사랑한다’라는 멘트와 진수군의 생전 모습이 여전히 남아 있다.

1 이상희씨는 관련 자료를 보여주며 사건 진행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2 어린 시절 이진수군의 모습. 3 이제는 유품으로 남은 진수군의 학생증. 4 이상희씨의 모바일 메신저 프로필에는 ‘보고싶다, 진수야. 잘 있냐? 미안하고 사랑한다’라는 멘트와 진수군의 생전 모습이 여전히 남아 있다.


아들 세 번 죽었다
현지 경찰과 검찰들의 조사가 시작된 것을 보고 부부는 아들의 시신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부부에게 2011년 2월 하순쯤 미국에서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자신을 변호사 출신 LA 한국영사관 총영사라고 소개하며 자신을 변호사로 선임하면 승소할 자신이 있다며 선임을 종용했다.

“처음에는 학교나 가해자 등을 상대로 미국 변호사를 선임하려고 했는데 도와주겠다는 상대가 워낙 거물급이라 그 말을 믿고 선임 계약서를 썼어요. 사건을 형사가 아닌 민사로 하라고 해서 맡기고 진행했죠. 그런데 선임을 한 뒤 이상하게 이메일 하나 보내면 답변이 한 달이 걸려요. 저희가 찾아낸 가해자의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피 묻은 체육복이 증거품으로 잘 제출됐는지, 현지 조사는 어떻게 돼가고 있는지, 가해자는 어떤 처분을 받고 있는지 물어도 뚜렷한 답변이 없었죠. 그렇게 1년이 지났지요. 그런데 그 변호사가 돌연 ‘경제성이 없는 사건’이라는 이유를 대며 이메일 한 통으로 일방적으로 저희에게 해약을 통보했어요.”

이후 부부는 미국인 변호사를 다시 선임했다. 그제야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소년원에 복역 중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가해자는 이미 ‘정당방위’로 무혐의 처분을 받고 풀려나 있었던 것.

“가해자는 이미 한국으로 나와 있는 상태였고 심지어 버젓이 지방 소재 대학에 재학 중인 것도 알게 됐죠. 1년간 그 변호사는 무얼 했는지 묻고 싶어요. 우리를 도와주겠다고 나선 저의에도 의구심이 들고요. 양몰이 당하듯 그 사람들 시키는 대로 한 제가 한심하기도 합니다.”

미국에서 일어난 황당한 상황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부부는 지난해 1월 가해자를 ‘상해 치사’ 혐의로 국내 검찰에 고소했다.

“고소장이 접수되면서 법원에서는 아이의 시신을 다시 꺼내 부검하겠다는 통보가 내려졌어요. 그것도 부모로서 이해할 수 없어요. 미국에서 이미 부검을 마친 상태고 자료가 다 있는데 왜 잠들어 있는 아이를 또 한 번 죽이는 일을 합니까? 3년이나 지나 다 부패된 시신에서 뭘 더 찾을 수 있을까요? 제발 무덤을 다시 파헤치지 말라고 거의 빌듯이 했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결국 법에 따라 부검이 결정되고 주차장 길바닥에서 아이의 시신을 다시 염해야 했다. 그 상황에서 아내는 보지 말았어야 할 것들을 많이 보고 말았다.

“아들을 잃고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아내는 거의 미치기 직전까지 갔어요. 아들이 세 번이나 죽음을 당했는데 어떤 부모가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 길로 가해자의 아버지가 목사로 있는 청주 H교회 앞으로 가서 아이의 빈 관을 앞에 두고 1인 시위를 시작했어요.”

어머니 이해경씨는 64일간 길바닥 생활을 하며 아들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침을 뱉거나 음식물을 던지고 욕을 하고 가는 이들도 있었다. 일요일에는 교회 관계자들이 1인 시위 현장을 자동차로 막고 매연을 뿜어댔다. 그러나 따뜻한 시선을 보내는 동네 사람들도 있었다. 용기 내라고 빵을 놓고 가거나 “망자 앞에서 머리 한 번 숙이겠다”라며 막걸리를 들고 와 기도를 하는 노인도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새벽 아내가 정체를 알 수 없는 4명의 괴한에게 테러를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저는 늘 20m 정도 떨어진 곳에서 아내의 1인 시위를 지켜봤어요. 그날 마침 일이 있어 서울로 올라갔는데 그 사이에 일이 벌어진 거죠. 느닷없이 4명의 사람이 이불을 뒤집어씌우고 발로 아내를 밟았다고 해요. 경찰에 신고했는데 20분 만에 나타난 경찰차는 살려달라고 소리 지르며 손을 흔드는 아내를 쓱 보고 지나쳤다고 해요. 병원에 가보니 아내는 어깨 인대까지 찢어지는 부상을 입었더라고요. 이러다 또 사람 잡겠다 싶어서 서울로 왔고 서초동 검찰청 앞에서 1인 시위를 이어나갔죠.”

이해경씨는 아들의 억울함을 사람들에게 호소하며 탄원서를 받으러 다니고 있다. 이상희씨는 무엇보다 아내의 건강이 걱정된다.

“건강해야 오래 싸울 수 있다고 해요. 우리 부부는 지금 죽으면 눈도 감지 못할 겁니다. 주변 사람들이 이제 아들을 놓아주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저희는 그럴 수 없어요. 아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아들을 놓아줍니까? 끝까지 싸울 겁니다.”

그는 아들의 이야기를 담은 연극 ‘행복해, 장유씨?’로 무대에 서고 있다. 어디든 공연을 요청하는 곳이 있다면 달려간다. 안타깝지만 그가 아들을 위해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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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묻은 아들
부부에게는 둘째 아들 진성군이 있다. 형을 부모보다 더 따랐던 네 살 어린 동생이다.

“늘 형을 졸졸 따라다녔고 그런 동생을 아끼는 형이었죠. 한 번도 싸운 적 없는 사이좋은 형제였어요. 그런데 고등학생이던 진성이가 종종 결석을 하는 거예요. 알고 봤더니 형 묘지에 가서 시간을 보내다 잠이 들곤 했더라고요.”

형의 일로 부모가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는 동안 둘째는 다행히 방황하지 않고 착실히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한다. 가족은 큰 상처를 겪었지만 서로를 보듬는 마음은 더 강해졌다.

“아내는 늘 ‘아들 둘이라 먹지 않아도 배부르다’라는 말을 달고 살던 사람이에요. 이제는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말이 돼버렸죠. 세상에는 어이없는 사건으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 많지요. 그게 얼마나 큰 상처인지 상상할 수 없을 거예요. 게다가 아들이 어떻게 떠났는지도 알 수 없는 저희는 더욱 가슴을 칠 일이에요. 그렇게 꿈에 나오더니 요즘은 꿈에도 잘 나오지 않아 마음이 아파요.”

그는 가해자가 지금이라도 진실을 말해주길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또 그저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난 간단한 사고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가해자 가족도 그래요. 일반 사람도 아니고 소위 하나님을 섬긴다는 목사입니다. 마냥 감추는 것이 자식을 사랑하는 방법이 절대 아닙니다. 벌써 5년이 됐어요. 그 아이에게는 이미 죄의 대가를 받고 성실하게 새 출발할 시간이었을지도 몰라요. 그 아이에게는 평생 자신에 의해 사람이 죽었다는 꼬리표가 따라다닐 겁니다. 그게 더 불행한 거 아닐까요?”

지난 11월 12일 충북 청주지방법원에서는 이 사건에 대한 2차 공판이 열렸다. 이날은 서로 진술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됐다. 앞으로 더 기나긴 싸움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부부는 아들을 가슴에 묻고 끝까지 가기로 했다. 무엇보다 하루빨리 그들에게 평온이 찾아오기를 바란다.

■글 / 이유진 기자 ■사진 / 원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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