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시대’가 준 22년의 위로 박금선 작가
“애청자분들은 ‘여성시대’를 ‘여성시大’로 적어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인생 공부하는 대학과 같다는 뜻이죠. 저 역시 ‘여성시대’라는 공동체 안에서 배우고 익히고 반성하는 학생이었어요. 그 덕에 무난하게 나이 들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직접 몸으로 부딪치며 깨달은 사람들이 건넬 수 있는 조언과 따뜻한 위로는 읽는 사람에게 힘을 준다. 여기에 박 작가의 개인사까지 담담하게 곁들여져 어느 것 하나 버릴 게 없다.
평범한 이웃들을 향한 ‘여성시대’의 주파수
‘여성시대’에 전해지는 사연들은 대개 기구하다. 일상의 소소한 기쁨을 전하는 이들도 있지만 가족 문제와 가난, 질병 때문에 고통받고 괴로워하는 이들이 훨씬 더 많다. 안방 주인 양희은은 정확한 발음과 전달을 위해 방송 전에 사연을 읽고 미리 울어둔다. ‘여성시대’ 17년 차인 양희은도 “무거운 사연이 체기처럼 얹혀 처음 5년 동안은 무척 괴로웠다”라고 고백했다.
“작가들이 사연을 고치거나 재가공하지 않아요. (직업적으로) 글을 쓰지 않는 일반인들이기 때문에 반복되는 표현이나 문장을 제거하고, 어색한 조사를 다듬는 정도에 그치죠.”
뚝배기보다 장맛이라 했던가. ‘여성시대’에 도착한 사연들은 화려한 문장이나 기교 없이도 수많은 청취자들을 울린다. 삶의 무게를 짊어진 사람들은 나보다 더 무거운 지게를 보며 마음을 다잡고, 비슷한 지게의 사람들은 서로를 확인하는 것만으로 위로를 받는다.
“한창 아이 둘을 키울 때, 둘째가 낯선 어린이집에 가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며 울었어요. 그 어린 걸 억지로 떼어놓고 출근하는데 ‘내가 꼭 이러고 살아야 하나’라는 생각에 엉엉 울면서 택시를 탔죠. 그랬더니 택시 기사분이 라디오 볼륨을 키우며 ‘아줌마, 여기 여성시대 얘기 좀 들어보세요. 여기에 아줌마보다 더 힘든 사람들 진짜 많아요’라며 위로를 건넨 적도 있어요.”
물론 사연이 방송을 탄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거나 달라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편지조차 쓸 수 없는 누군가는 세상 어딘가에 나와 비슷한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힘을 얻는다.
“정신과 전문의 선생님이 ‘자신의 일로 슬퍼서 우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일로 흘리는 눈물이 정신적으로 훨씬 더 건강하다’라고 하시더군요. 소개되는 사연은 어둡고 슬프지만, 청취자분들의 정신 건강에는 더 좋다고 할 수 있죠.”
‘여성시대’의 주파수는 평범한 이웃들에게 맞춰져 있다. 삶의 무게로 따지자면 어쩌면 평균 이하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건네는 이야기는 그 어떤 위로보다 따뜻하고 정겹다. 나와 다르게 산다고 통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는 곳과 형편이 달라도 여성이라는 공통분모 하나만으로도 많은 것들을 공유할 수 있다. 박 작가가 만난 ‘여성시대’의 가족들은 생활에 아등바등하면서도 이웃들을 살폈고, 병마와 싸우면서도 초연했다. 이들은 평범한 일상에 깃든 권태와 지루함에 대한 감사를 깨우친 사람들이었다. ‘여성시대’를 듣다 보면 평범한 것이 가장 비범한 것이라는 진리를 깨닫게 된다.
“한때 원고와 사연이 허공으로 흩어지는 것 같아서 허무한 적도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누군가의 귀를 스치고 지나가는 게 참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요. 한순간 공감하고 위로를 받았다면 그걸로 충분하죠.”

‘여성시대’가 준 22년의 위로 박금선 작가
박 작가는 여전히 현직에서 왕성하게 활동한다. ‘여성시대’를 22년 동안 이끌었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여기에 이전 방송 경력까지 더하면 30년 세월 동안 현장에서 일했다. 오랜 시간 활동할 수 있는 저력에 대해 묻자 박 작가는 ‘생활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답했다. 그녀는 공부를 선택한 남자와 결혼했기 때문에 생활비 앞에서 전전긍긍했고, 프리랜서라 방송 개편 때마다 마음을 졸였다. 잠시라도 일을 놓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첫아이를 낳고 보름 만에 복귀했다. 아마 생활인이 아니었다면 30년 동안 한 가지 일을 유지하기 어려웠을 거라고 고백한다.
“일을 평생 해야 한다고 교육받은 세대지만, 안 벌어도 그만인 상황에서 돈을 버는 사람이고 싶었어요. 물론 여건이 허락되지 않았죠. 그런데 돌이켜보니 그런 부족함과 모자람이 제 삶을 이끌어온 강력한 동력이었어요. 여기에 ‘여성시대’로 도착한 인생 선배들의 사연들이 제 시선을 좀 더 넓고 깊게 만들어줬죠.”
생활인으로 산다는 것은 버거운 야망을 버리고 웬만한 것은 참아 넘긴다는 것이다. 스스로 안쓰럽고 기특할 때도 있다. 생활인들은 그래서 서로를 다독이며 위로한다. 박 작가는 생활전선에서 열심히 뛰는 청취자들의 편지를 읽으면서 억지로 하는 일의 힘을 믿게 됐다.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라도 마음을 실으면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했고, 원하는 일을 이루기 위해 억지로 해야 하는 일도 있었다. 그렇게 힘들게 버티듯 해냈던 일들이 그녀를 이해심 많은 사람으로 바꿔놓았다. 일에 따르는 희생과 인내가 조금 더 따뜻하고 주변을 배려하는 사람으로 만든 것이다. 이렇게 하는 일이 결국 스스로를 성장시킨다고 생각하면 견디기가 수월했다.
“하고 싶은 일만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생활인들은 대부분 구질구질하고 치사한 일도 참아내며 살죠. 저 역시 일에 부대낄 때 ‘예술을 하지 말고 생활인으로 열심히 원고를 쓰라’라는 조언을 받았는데 참 많은 위로가 됐어요.”
박 작가는 스스로를 ‘나이롱’이라 칭한다. 화학 재료로 천연섬유를 흉내 낸 나일론처럼 ‘진짜가 아니다’라는 뜻이다. 글을 쓴다고 하면서 치열하지 못했고, 방송 원고를 쓰느라 아이들을 살뜰히 챙기지도 못했다고 회고한다. 아내나 며느리 역할도 나일론처럼 대강 흉내만 내며 살았다고 웃는다.
“그저 버티면서 질기게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질긴 게 나이롱의 장점이잖아요. 보풀이 일어서 흉해질지언정 웬만한 일에는 해지지 않고 꿋꿋하게 버틸 수 있죠. 그래서 좋은 작가, 좋은 엄마 또 좋은 배우자라는 꿈들을 아직도 놓지 않았어요. 나이롱이니까 나이롱 정신으로 버티면 조금씩 나아지지 않을까요?”
엄마, 가장 버겁고 고귀한 두 글자
박 작가는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30대 여성들을 보면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그 시절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어깨라도 두드려주고 싶단다. 「여자가 절대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들」도 후배들에게 따뜻한 조언과 위로를 건네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됐다.
“30대 여성들이 인생에서 가장 바쁜 시기를 보내는 것 같아요. 저도 두 아이를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보내고 부랴부랴 출근하며 정신없이 살았어요. 일 때문에 아이 울음소리에도 눈을 질끈 감았고, 퇴근 후에는 쌓여 있는 집안일에 한숨을 쉬었죠.”
일하는 엄마는 스스로를 생각할 여유도 없다. 직업인과 엄마라는 두 가지 입장에서 늘 부대끼고 갈등한다. 하고 싶은 일보다 의무와 책임이 밀물처럼 쏟아지는 때다. 떠내려가지 않기 위해 쏟아지는 일들을 부지런히 해치워야 한다. 박 작가도 그랬다.
“일하는 엄마는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또 미안하죠. 둘째 아이가 스무 살이 된 지금도 그래요. 그렇지만 엄마들에게 너무 염려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부족함이 성장 동력이 되는 것처럼 우리 아이들에게는 놀라운 능력이 있어서 부족한 환경에서도 적응하며 잘 자라거든요.”
당시 ‘여성시대’의 인생 선배들은 “인생을 가장 빠르게 배울 수 있는 게 아이를 키우며 양보와 희생할 때”라고 입 모아 말했다. 육아가 인생의 속성 과정이라는 것이다. 자녀에게 매달려 옴짝달싹 못하는 그 시기를 일생을 배우는 일류 코스로 생각하면 괴로움이 조금은 가시리라. 박 작가는 얼마 전 가족들과 둘째의 가정 수행평가를 도와주며 그 시절을 살짝 엿봤다. 빈약한 육아 일기를 꺼내 이야깃거리를 만드는데, 첫째 딸아이가 육아 일기에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라고 말해줬다. 당시에는 그런 감정을 마음으로 느끼지 못했다. 아이를 키울 때는 못 자고 못 먹고, 남보다 뒤처진다는 생각이 들기 쉽다. 하지만 아이가 잘 먹고 잘 싸는 것만으로 감사하고 행복한 때이기도 하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조금은 덜 불안해하고, 덜 버거워하면서 그때만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발견하고 싶어요. 때로는 즐겁고, 때로는 힘들겠지만 말이에요. 진정으로 그 시간 안으로 들어가서 즐기고 싶어요.”
인생 학교에 다니는 동안 참고서가 필요하다면 라디오 ‘여성시대’를 추천한다. 곁에 두고 수시로 참고하면 삶의 단계와 단계에서 맞닥뜨리는 시험을 무난히 통과할 것이다.
‘여성시대’를 열어가는 동무들에게
여성성이 외모로 평가되는 분위기에서 나이가 든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여성성을 잃는다는 것과 동의어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우스갯말처럼 ‘여자 나이 50이 되면 미모의 평준화가 이뤄진다’라고 말한다. 박 작가는 아름다움의 근원을 자존감과 자신감으로 꼽았다. 후천적인 노력에 의해 누구나 미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짧지 않은 세월을 살아보니 대단한 미모가 아니라도 누구나 그 안에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는 걸 느껴요. 스스로를 고귀하다고 믿고 작은 능력이라도 열심히 갈고닦으면 미인이 아닌데도 신비하게 아름답게 느껴지죠.”
그러니 미모가 달린다고 걱정하며 시간과 돈을 허비할 필요가 없다. 쉰 살만 넘으면 주변의 내로라하는 미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제부터는 인내심을 가지고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찾고, 그것에 전력을 쏟는 것이 좋겠다. 박 작가는 “뇌에 주름이 많으면 똑똑하고, 얼굴과 마음에 주름이 많으면 지혜롭다”라며 웃었다. 이런 여유로움도 나이가 주는 장점이리라. 나이가 주는 즐거움은 또 있다.
“마흔이 넘어가면서 전에는 없던 또 다른 눈이 생겼다는 걸 느꼈어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확장 같은 것이죠. 그러니 쉰, 예순, 일흔 살에는 또 어떤 눈이 생기게 될까요?”
물론 인생에 능숙한 사람은 없다. 배우 윤여정은 한 TV 프로그램에서 “나이 60이 돼도 인생은 모른다. 나도 60은 처음 살아보는 거니까. 그래서 아쉬울 수밖에 없고, 아플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그나마 할 수 있는 것은 하나씩 내려놓고 포기하는 것이라 조언했다. 박 작가 역시 ‘즐거운 포기’를 권했다.
“즐거운 포기는 나이가 주는 선물이에요. 젊었을 때는 포기를 하려고 해도 힘이 뻗쳐서 그런지(웃음) 포기가 안 돼요. 근데 포기한다는 건 자유로워진다는 거고, 상실한다는 것은 현명해지는 것이거든요. 불가능한 것을 자꾸 붙들고 싶을 땐 즐거운 포기를 머릿속에 떠올려요.”
사실 우리는 목표를 향해 달리는 것만 배웠지, 포기의 가치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포기는 용감한 선택이다. 포기하지 않을 때보다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포기는 나의 한계와 평범함을 인정하는 일이다. 그러면서도 나를 가장 잘 이해하고 사랑하는 과정이다. 포기를 잘하면 스스로를 괴롭히던 고집과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주변을 둘러보면 살면서 한 번씩 지독한 우울을 경험하는 것 같아요. 마흔 언저리에는 특히나 더 그렇죠. 혹시라도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이유 모를 우울함으로 힘들다면 곁에 있는 여자들에게 기대보세요. 조금만 얘기를 꺼내도 금방 알아챌 거예요. 여자들은 아픔과 슬픔에 대해 특별한 교집합이 있거든요.”
박 작가는 마흔 이후에도 이유 모를 우울함이 찾아왔지만 그때는 덜 헤매면서 수월하게 빠져나왔다.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러고 산다. 그러니 조금만 헤매고 돌아가자’라고 스스로를 다독일 줄도 안다. 인생 어디쯤에서 길을 잃고 혹시 두리번거리게 된다면 기억하자. 많은 사람들이 두리번거린다는 것을, 다른 이들도 마음 둘 곳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Advice
‘여성시대’ 애청자들이 알려주는 인생의 기술
1 시댁 일은 공적인 일이다
직장에서 부장님이 성가신 일을 시키면 돌아서서 욕을 하더라도 앞에서는 “네, 부장님”이라고 할 것이다. 시댁 일도 마찬가지다. 시어머니나 시아버지가 시키는 일도 공적인 일처럼 처리하라. 속은 끓여도 부디 영혼까지 끓이지는 마라.
2 돈이 많건 적건 요양원이 정답이다
당신의 효심을 의심하지는 않으나 ‘긴 병에 효자 없다’라는 말은 진실이다. 부모님은 물론이고 자식들에게도 아플 때 요양원으로 보내달라고 미리 말해둬라. 내가 죽고 난 뒤에도 자식이 나를 그리워하게 하고 싶다면 꼭 기억해야 한다.
3 1년 치 연봉을 저금해둬라
사회생활을 시작하면 1년 치 연봉을 꼭 저금해둬라. 사람에 치여 지쳤을 때, 재충전이 필요할 때, 스스로에게 길을 묻고 싶을 때…. 그때 1년쯤 나에게 발돋움할 수 있는 시간을 줄 수 있는 돈이 있으면 운신이 자유로워진다.
4 짧고 쉬운 알람 청소법을 이용하라
대청소가 엄두나지 않을 때는 알람 청소법을 이용하라. 휴대전화로 알람을 맞춰놓고 알람이 울리면 그때부터 딱 5분만 주변을 정돈하는 방법이다. 놀이처럼 실천할 수 있고, 한 달 이상 지속되면 주변이 늘 깨끗하게 유지된다. 5분 청소가 모여 대청소가 되듯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만큼 잘게 쪼개면 그것을 모아 큰일을 해낼 수 있다.
5 사랑은 큰 동그라미다
결혼은 배타성을 전제로 서로에게 많은 것들을 금하게 된다. 그런데 ‘하지 마라’가 많으면 탈이 생기게 마련이다. 동그라미를 작게 그려주면 금을 밟을 일이 늘어간다. 그러니 그가 마음껏 뛰놀 수 있도록 큼직한 동그라미를 그려줘라. 그것은 결국 당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6 성공에 대한 정의를 세워라
높은 자리에 오르거나 부자가 되는 것만이 성공은 아니다. 아이들의 사랑을 받는 것,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하게 만드는 것, 힘들 때 전화할 수 있는 친구를 가지는 것 등 자신만의 성공을 정의해야 한다.
■기획 / 장회정 기자 ■글 / 강보라(프리랜서) ■사진 / 김석영 ■장소 협찬 / 플라워카페 플로르떼(02-322-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