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
신영복 교수의 마지막 저서 「담론」엔 ‘책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기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생각하면 모든 텍스트는 언제나 다시 읽히는 것이 옳다. 필자는 죽고 독자는 끊임없이 탄생한다’라는 글이 있다. 그는 갔지만 그의 마지막은 충만하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시대를 넘고, 세대를 넘어 그를 그리워하는 새로운 독자들이 끊임없이 탄생할 것이니 말이다. 후학을 가르치는 스승이자, 책을 쓰는 저자 그리고 유명한 서예가이기도 했던 고 쇠귀(牛耳) 신영복 교수의 삶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았다.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구속돼 무기수로 감형된 뒤 기나긴 수감 생활을 했다. 그가 감옥을 나온 것은 20년이나 지난 뒤였다. 하지만 그의 글 속에는 분함이나 화남, 원망이 없다. 신 교수는 감옥 생활이야말로 사회학과 역사학, 인간학을 제대로 배우게 해준 진짜 대학이 됐다고 말하곤 했다. 한 인간으로서 그의 사색이 얼마나 깊었는지 잘 드러난다.
신 교수는 1941년 경상남도에서 태어났다. 고향은 밀양이지만 출생지는 의령이다. 교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조선 학생 차별 문제로 일본인 교장에게 항의하다 파면된 이력이 있었다. 아버지가 복직해 의령에서 근무할 때, 신 교수는 관사에서 태어난 것. 고등학교를 진학해 부산으로 떠날 때까지 대부분의 유년 시절을 교장 선생님의 아들로 밀양 등지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 신 교수에겐 아주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의 아버지 관사에는 당대 저명한 학자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그중 한 분이 꼬마 신영복에게 장래 희망을 물었다고 한다. 그때 그가 한 답이 ‘일본 총독’이었다. 조선이 독립하고 일본을 식민지 삼게 된다면 자신이 일본 총독이 돼 일본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겠다는 것이었다. 그의 어린 시절이 그리고 학자였던 아버지의 친구들이 모이던 관사 사랑방 분위기가 어땠는지 옆에서 본 것처럼 생생하게 그려진다면 과장일까. 지성의 새싹이 그렇게 움터 성장했구나, 짐작이 간다.
어린 신영복이 다섯 살이 됐을 때 독립을 맞았다. 신 교수는 그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고 했었다. 어린 그에게 일본인 교장이 살던 관사를 지키게 했기 때문이다. 왜 그랬는지는 그 또한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일본인 교장이 황급히 어디론가 사라졌고, 집 안의 책상이며 서랍들이 다 열려 있었다. 그 모습은 오래된 기억임에도 그의 머릿속에 광복이란 단어와 함께 또렷하게 떠오르는 이미지가 됐다. 그의 나이 열 살에 6·25 전쟁이 터졌다. 그가 살던 밀양은 인민군 치하에 들어가지 않아서 북한군을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니었지만 신 교수가 기억하는 전쟁의 기억은 아주 끔찍한 것이었다. 동네에서 조석으로 보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이유도 모르고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봐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신 교수는 굴곡의 현대사 정중앙을 관통하며 자라났다.
1959년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에 진학했다. 청년이 된 신영복이 살아가던 때는 여전히 요동치는 현대사 한복판이었다. 대학 입학 1년 만에 4·19혁명이 일어났고, 또 5·16 군사정변이 발발했다. 그가 학생운동에 몰두하게 된 때는 5·16이 일어난 대학 3학년 시절이었다. 그때부터 대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그는 학생 서클의 구심점이자 지도자로 활동했다. 그러다 숙명여대와 육군사관학교에서 강의하던 1968년 스물일곱 살 나이에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돼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서슬 퍼렇던 군사정권 시절, 부풀려진 소문들, 억지 자백이 빚어낸 비극이었다. 그리고 한 개인에게 가혹하게 자행된 국가적 폭력이었다. 서울대 경제학과 은사이자 훗날 국무총리를 지낸 이현재 명예교수의 목숨을 건 구명 활동 덕분에 다행히 사형만은 면할 수 있었다고 알려졌다. 무기형으로 감형된 후 1988년 8·15 특사로 풀려나기까지 20년간 감옥 생활을 해야 했다. 무기징역이 확정된 날은 1970년 5월 5일 어린이날이었다. 신 교수의 재판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던 호송 헌병의 호의로 남산에 들러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고 한다. 사형수일 때는 무기수만 돼도 원이 없겠다고 생각했었지만, 막상 무기수가 된다는 것은 짐작도 안 되는 암흑으로 다가왔다고. 그래서일까. 신 교수는 그날 남산에서 먹었던 아이스크림의 달콤한 기억이 여전히 혀끝에 남아 있다고 말하곤 했다.
겨울 독방에서 만나는 햇볕은… 길어야 두 시간이었고 가장 클 때가 신문지 크기였다. …신문지 크기의 햇볕만으로도 세상에 태어난 것은 손해가 아니었다.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받지 못했을 선물이다.
- 「담론」 중
2일도, 2개월도, 2년도 아닌 자그마치 20년이란 시간이었다. 그는 그 시간을 어떻게 버텨냈을까. 그것도 끓고 끓던 젊음의 시간이었는데 말이다. 신 교수는 2015년 펴낸 「담론」을 통해 사형수가 됐을 때도 자살하지 않은 이유는 햇볕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신문지 크기의 햇볕으로 그는 충분히 죽지 않을 이유를 가질 수 있었다. 비록 감옥이었지만 그가 찾아야 할 것은 오로지 살아가는 이유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깨달음과 공부였다고 그는 고백했었다.
특별 사면돼 출소한 1988년에 출간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그의 옥중서한이다. 이 책을 통해 감옥에 갇혀 있었던 그의 20대 사색의 편린들과 어려웠던 징역 초반의 면모까지 면밀하게 살필 수 있다. 또 책에는 그가 감옥에서 그렸던 그림, 하루 두 장씩 지급되는 휴지와 작은 봉함엽서 등에 철필로 깨알같이 박아 쓴 편지 일부도 볼 수 있어 진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책은 출간되자마자 온 나라 국민들을 사색으로 물들게 했다. 출간 당시 경향신문은 “새벽이슬처럼 맑으면서도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특별한 책”이라 평했고, 인터뷰에서 신 교수는 이 옥중 편지를 읽은 사람들이 이제는 감옥 밖에서 사는 그에게 도통한 모습을 기대할 때가 많아 곤혹스럽다는 유머 섞인 답을 내놓기도 했다. 강산이 몇 번 변했지만 많은 이들이 인생의 책으로 꼽기에 주저하지 않는 이 책은 이제 고전의 대열에 당당히 올랐다. 누군가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프랑스의 사상가 몽테뉴의 「몽테뉴의 수상록」에 비견되는 옥중 문학의 백미라 평가하기도 한다.
교도소라는 전혀 다른 상황에 내던져진 충격 속에서 어떻게든 당시 생각을 기록해두면 언젠가 잃어버린 세월을 기억해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긴 글은 물론이고 짧은 글조차 통제된 집필 도구와 장소, 시간 등으로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이달엔 이런 얘기를 한번 써야지 하고 마음먹으면 한 달 내내 그걸 생각하면서 거의 완벽한 문장 형태를 머릿속으로 미리 정리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
깊은 사색이 허락된 현실의 공간은 작은 엽서 한 장뿐이었다. 그러나 종이는 작을지언정 담긴 뜻은 크고 넓었다. 그의 사색은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전했다. 신 교수는 2006년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직을 정년퇴임하고 지난해까지 대학원에서 강의하며 10여 권의 저서와 명강의로 세상을 풍성하게 채웠다. 무엇보다 서예가로서의 그의 명망은 저자로서의 명성을 넘을 정도였다. 따뜻함이 배어 있는 ‘쇠귀체’를 창안했다. 특히 대중에게 잘 알려진 것이 소주 ‘처음처럼’이다. ‘처음처럼’은 신 교수가 즐겨 쓰던 문구와 글씨다. 당시 신제품 개발을 마치고 제품명을 고민하던, 주류 업체의 광고를 담당하고 있던 크로스포인트의 손혜원 대표가 신 교수의 문구 ‘처음처럼’을 추천했다고 한다. 이렇게 시작된 인연은 손 대표가 더불어민주당 홍보위원장을 맡으며 새 당명 ‘더불어’까지 이어진다. 더불어민주당의 ‘더불어’도 신 교수의 저서「더불어 숲」에서 온 것이다. 그는 자신의 문구와 글씨체가 소주 이름으로 쓰이는 것에 흔쾌히 동의했다고 한다. 존경받는 학자가 과연 술 이름에 자신의 시그너처와 다름없는 글씨체를 사용하도록 허용할지 모두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서민들이 가장 많이 즐기는 대중적 술 소주에 내 글이 들어간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신 교수가 끝까지 저작권료를 받지 않아 업체는 그가 몸담고 있던 성공회대에 장학금 형식으로 기부를 했다는 후문.
신 교수의 글씨와 인연을 가진 사람은 많다. 고 노무현 대통령에게 ‘우공이산’을, 노무현재단에는 ‘사람 사는 세상’이란 글씨를 선물했다. 연예계 또한 그와 인연이 깊은 이들이 많다. 가수 윤도현은 YB(윤도현밴드) 공식 인스타그램에 “이 시대의 참지식인, 행동으로 말하던 진정 용감한 아티스트. 절망을 넘어 희망으로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분. 함께 사는 즐거움을 알려주신 분. 서예 글씨를 많이 써주신 분”이란 글을 올렸다. 신 교수는 윤도현의 앨범 두 장의 타이틀 글씨를 써주기도 했다. 방송인 김제동도 자신의 페이스북에 “여럿이 함께. 처음처럼. 선생님이 하셨던 말씀입니다.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이란 분별이 없어져야 함을 따뜻한 눈빛으로 늘 알려주셨던, 맞담배를 늘 권하시며 아래에서 위를 알려주셨던 고마운 우리 선생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우리의 몫으로 남겨두고 가신 분”이라고 적었다. 이 두 사람은 2002년과 2009년 차례로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에 입학해 고인과 사제 관계를 맺었고, 지난해 7월 고인의 ‘담론 북 콘서트’에도 참여하는 등 각별한 인연을 이어왔다.
우리는 아직도 ‘잘 자란다’라는 의미에 마음을 쏟을 여력이 없습니다. 경쟁과 효율성 등 사람을 해치고 사람과의 관계를 갈라놓는 일의 엄청난 잘못을 미처 돌이켜볼 겨를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일찍부터 정성을 기울이지 않으면 언제나 후회하게 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더불어 숲」 중
2014년 중반 피부암의 일종인 악성흑색종을 진단받은 신 교수는 2년여 동안의 투병 생활 끝에 지난 1월 15일 오후 10시 별세했다. 장례는 성공회대 학교장으로 치러졌으며, 영결식장에는 1,000여 명의 추모객이 자리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유영순(68) 여사와 아들 지용씨(26)가 있다.
비록 20년을 감옥에 있었지만 그는 누구보다 치열하고 바쁘게 세상 속에서 살아왔다. 공부를 했고, 대학에서 강의를 했으며, 「나무야 나무야」, 「더불어 숲 1·2」,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 「처음처럼」, 「변방을 찾아서」 등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또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무수한 현장에 나섰다. 감옥에서조차 재소자들에게 신망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교도소에 있던 이른바 조폭이나 깡패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이제는 고인이 된 신 교수를 존경하고 따랐다는 일화는 숱하다. 1988년 8·15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했을 당시 그가 머물던 전주교도소 재소자들이 전부 울었을 정도였다고. 재소자들에게 서예를 가르치곤 했다는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렵지 않게 그려지는 대목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빈소가 마련된 구로구 성공회대 성미가엘 성당에는 박원순 서울시장,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노회찬 전 국회의원,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 이재정 경기도 교육감,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등 사회 각계의 인사들이 찾아 고인과의 추억을 더듬었다. 뿐만 아니라 대학생들과 아이들의 손을 잡고 온 젊은 부부 그리고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까지 많은 사람들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발걸음을 했다. 시대의 스승으로 현실의 버팀목이 돼주었던 그의 빈자리가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느껴진다. 모두가 슬픔을 드러내기에 주저함이 없다. 그는 그런 사람이다. 그가 영원할 이유다.
■기획 / 장회정 기자 ■글 / 강은진(객원기자)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 ■참고 서적 / 「감옥으로부터의 사색」·「담론」·「신영복의 엽서」·「더불어 숲」(신영복 저, 돌베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