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 교사 최태성 역사에 말을 걸다
영화 ‘귀향’이 잘되고 있어 다행이에요. 누적 관객 수 300만 명을 넘었더라고요. 정말 감사하죠.
사비를 들여 상영관을 빌린 것이 화제가 됐어요. 분명 많은 사람들이 봐야 하는 영화인데 상영하는 극장도 몇 곳 없고, 상황이 너무 열악하더라고요. 안되겠다, 사람들에게 좀 더 알릴 수 있는 이벤트가 필요하겠다 싶어 벌인 일이에요. 근데 제 예상보다 관심을 많이 가져주셨어요. 일이 이렇게 커질 줄 몰랐어요(웃음).
지켜본 관객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처음에는 가슴 아파서 못 볼 것 같다고 겁내시는 분들이 많았어요. 영화를 보고 나서는 “기억해야겠다. 그래야 역사로 남는구나”라는 말씀들을 많이 하시더라고요.
사실 ‘귀향’은 제작 단계부터 어려움이 많았어요. 이렇게 흥행하리라 예상하지 못했는데 흥행의 원동력은 뭘까요? 우선 ‘위안부’는 우리에게 낯선 소재가 아니에요. 오랜 시간 이야기돼왔지만 정작 대중적으로 접할 기회가 없었죠. 기억에 축적돼 있던, 막연히 알고 있었던 것들을 영화를 통해 눈으로 확인하게 된 거예요. 전쟁과 인권이라는 보편성이 있지만 역시 일제강점기라는 아픈 역사에 대한 우리의 특수성도 작용했다고 봐요. 그리고 제가 볼 땐 언론의 역할이 크지 않았나 싶어요. 이렇게 많은 기사를 쏟아낸 영화를 본 적이 없어요. 언론에서도 노력을 많이 해주셨어요.
올해부터 한국사가 수능 필수과목이 돼요. 공무원 시험은 물론 기업 인성·적성 시험에도 역사 문제가 등장하고 있고요.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추세예요. 단군 이래 한국사가 이렇게 각광받던 시기가 있었나 싶을 정도예요. 국가주의적인 관점에서가 아닌, 시민의 소양과 시대적 요구로 역사의 중요성을 공감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어요. 기업에서도 인문학적 소양과 통찰력이 있는 인재를 원하고요. 관심의 변화를 읽을 필요가 있다고 봐요.
그렇다면 이와 같은 현상이 일어나게 된 배경은 뭘까요? 기본적으로 한국사를 공부하는 집단이 굉장히 작았어요. 60만 수험생 중 3만 명이었죠. 효율과 경쟁, 성장이 우선시되며 역사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이제 하드웨어만 중요시하던 시대는 지나고 인문학과 철학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죠. 그 과정 속에서 한국사가 인문학의 한 분야로 조명받고 있고요. 두 번째 배경은 한중일 동북아의 치열한 역사 전쟁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우리 역사만큼은 어느 정도 알아야 하지 않겠나, 라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 같아요.
역사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는 반가운 현상이겠네요. 양날의 검이에요. 정말 반갑죠. 참 반가운데, 이제까지 우리나라의 교육정책을 만들어온 분들이 예전에 한국사를 고통스럽게 공부했던 세대예요. 이제 한국사를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상황에서 우리 학생들이 또다시 고통스럽게 주입식, 암기식으로 한국사를 경험했을 때 나중에 한국사는 또 홀대받을 수 있어요. ‘역사를 왜 공부해야 하는가’ 하는 본질을 먼저 깨우치는 것이 중요해요. 그것이 역사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의 책무이고요. 그래서 요즘 어깨가 굉장히 무거워요.
스펙과 성적을 떠나 역사에 대한 본질적인 접근이 우선시돼야 한다는 말이군요. 그럼, 역사를 왜 배워야 할까요? 기본적으로 역사는 나를 알기 위해서 배워야 해요. 내가 누군지 알아야 우리가 누군지 알 수 있어요. 그러기 위해선 과거에 살았던 사람을 만나야 해요.
나를 알기 위해 역사 속 사람을 만난다? 역사라는 건 사람들의 흔적과 발자취거든요. 근데 이제까지 우리는 사람은 생각하지 않고 팩트만 암기해왔어요. 사람을 알기 위해 팩트를 배우는 건데 그저 팩트만 외우고 지나가는 거예요. 예를 들면, 구석기 시대 하면 주먹도끼가 떠오르잖아요. 그 주먹도끼를 들고 있는 사람을 생각해본 적 있나요? 그 사람이 주먹도끼를 왜 만들었고, 어떻게 가족을 부양했는지 그의 삶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는 거죠.
역사를 이해하는 키워드 ‘소통’과 ‘꿈’
과거의 사람에게 말을 걸어야겠군요. 그러기 위해선 첫 번째로 눈높이를 그들에게 맞춰야 해요. 흔히 현대의 입장에서 과거를 바라볼 때 과거 사람들을 낮게 보는 경향이 있어요. 그렇게는 소통할 수 없어요. 그들은 그 시대에 최선을 다해 살아온 우리 시대의 아버지, 어머니와 같은 사람들이고 우리와 다른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 당시 오른손에 들고 있는 주먹도끼와 현재 우리가 오른손에 들고 있는 스마트폰, 오버랩되지 않나요? 역사는 그렇게 사람을 만나면서 공부해야 해요. 만나다 보면 이제 그 사람의 꿈을 만날 수 있어요. 제가 역사를 가르치며 항상 강조하는 키워드가 있는데 ‘소통’과 ‘꿈’이에요.
역사 속 인물들의 ‘꿈’을 만난다는 건 어떤 의미가 될까요? 1884년 일어났던 갑신정변을 예로 들면, 당시 신분제 폐지를 주장했던 사람들이 있어요. 김옥균, 서재필,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평균 나이 20대, 100년 전의 신세대들이죠. 근데 이 사람들이 당시 엄청난 집안의 자제들이에요. 호기심이 생겨요. ‘어? 당시 신분제 사회의 기득권자들인데 왜 폐지하자고 했을까?’, ‘가만히 있으면 먹고사는 게 다 해결되는 사람들인데 왜 그걸 내려놓자고 했을까’ 하는 궁금증을 따라가보면 비로소 그들의 꿈을 만나게 돼요. 나의 아이들에게만큼은 양반, 중인, 상인, 천민으로 나뉘는 신분 사회가 아닌 평등하게 함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게 그들의 꿈이었던 거죠.

역사 교사 최태성 역사에 말을 걸다
지금 우리 사회의 소수 의견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겠네요. 맞아요. 역사를 공부할 때는 과거와 현재를 부지런히 왔다 갔다 해야 해요. 현재로 와서, 그렇다면 지금 우리 시대의 소수 의견은 무엇일까, 내가 우리 시대의 소수 의견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생각해보는 거죠. 자연스럽게 사회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점검하게 돼요. 그러다 보면 내가 지금 무시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소수 의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고, 한 번쯤은 귀 기울여 들어줄 수 있는 배려심이 생겨요. 지금 손가락질 받고 있는 그 소수 의견들이 언젠가 당연하게 생각되는 세상이 올 수도 있다는 걸 역사를 통해 아는 거죠. 역사는 내가 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아는 것으로 귀결돼요. 끊임없이 과거의 사람들과 소통하고 그들의 꿈을 만나면서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고요.
역사와 소통하며 현재의 소통의 범위를 넓혀가는 거군요. 과거와 소통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내 옆에 있는 사람과 소통하기 위한 것이에요. 역사와의 소통을 통해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고 나와 다른 의견을 존중할 수 있게 되는 거죠.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내 생각이 절대적이라는 데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어요. 끊임없이 생각을 점검하고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할 수 있는 자세, 그것이 현재 우리가 추구하는 소통의 문화잖아요. 그런 문화가 확산될수록 우리 사회가 건강해질 수 있는 것이고요.
끊임없이 역사 속 인물들을 만날 텐데 지금 되살리고 싶은 인물이 있다면 누군가요? 이회영씨 6형제가 있어요. 조선의 명문가죠. 일제강점기에 나라가 망하는 시점이 되자 이씨 6형제가 모여서 회의를 해요. 우리가 이제까지 나라의 녹을 먹으며 잘 살아왔는데 그 녹을 줬던 나라가 망해가고 있다, 이제는 우리가 나라를 위해 무언가 해야 한다, 라며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을 급매해요. 지금 시가로 600억원 정도가 돼요. 그리고 이 돈으로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 기지를 만들어 독립운동가들을 양성하죠. 그게 바로 우리나라 항일무장투쟁의 출발점이 됐던 신흥무관학교예요. 기록을 보면 이씨 6형제가 3년 만에 그 돈을 다 쓰고 강냉이 죽이 없어서 배를 곯아요. 왜 그랬을까요? 그분들에겐 우리 아이들만큼은 식민지 조국에서 살게 하고 싶지 않다는 꿈이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종국적으로 그 꿈을 이루게 되죠. 저는 그 꿈을 ‘시대정신’이라고 봐요. 우리 시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나는 그 시대정신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보게 하죠.
강의를 듣다 보면 ‘역사에 무임승차하지 말자’라는 말을 자주 하시는데, 시대정신을 생각해야 한다는 맥락일까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과거 사람들의 꿈이었어요. 그들이 꾸었던 꿈이 지금 우리를 살게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도 마찬가지로 꿈을 꿔야 해요. 그럼 무슨 꿈을 어떻게 꿔야 할까요? 가장 쉬운 방법은 아이들을 생각하면 돼요. 누구나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사회가 지금보다 나은 사회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잖아요.
개인적으로 아이들에게 물려줄 이다음 세상은 어땠으면 하나요? 말 그대로 꿈이니까, 거시적으로 본다면 아이들에겐 통일된 한반도를 물려주고 싶어요. 우리 아이들이 기차역에 가서 파리행 기차표를 끊는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가고 싶은 곳을 마음껏 기차로 달릴 수 있는 그런 세상, 상상만 해도 좋지 않나요? 물론 지금으로 봐서는 어렵죠. 근데 과거에도 그랬어요. 꿈이 있으니 희생을 감내하고 이뤄내는 거예요.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희생할 준비를 할 수 있어요. 지금은 꿈이지만 언젠가 현실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희생을 감내할 수 있는 거죠.
이제는 미래의 관점에서 과거를 바라봐야 할 때
대중이 오해하고 있는 역사가 있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무척 많죠. 특히 조선시대 유교 문화를 우리 역사 전체의 문화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아요. 예를 들면 우리나라 역사가 굉장히 소박하다, 검박하다는 이미지가 있어요. 고려 역사만 해도 무척이나 화려하거든요. 또 명절 때 여자가 남자 집에 먼저 가잖아요. 그게 전통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니에요. 고구려부터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남자가 여자 집에 사는 경우가 많았어요. 우리가 지금 전통이라 부르는 것들 중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가 만들어낸 질서가 많아요. 조선 후기 프레임에 갇혀 있는 부분이 크죠. 흔히 ‘역사’ 하면 보수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역사를 아시는 분들이라면 좀 더 다양하고 확장적인 관점을 가질 수 있어요.
역사에 접근할 때 주의할 점은 뭘까요? 첫 번째는 지나친 국수주의예요. 자국 문화의 위대함에 초점을 맞추는 건 위험해요. 두 번째는 앞으로 추구하는 방향성 안에서 과거를 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예를 들면 광개토태왕 하면 전쟁과 영토 확장을 떠올리는데,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잖아요. 당시의 문화나 사람들의 삶 등 다른 관점에서 봐야 할 시대가 왔어요. 우리가 지향할 미래의 목표점에서 과거를 바라보는 작업이 필요해요.
‘역사 속에 답이 있다’라는 말을 많이 들어요. 그렇다면 ‘난세에 평정심을 유지하는 법’도 있을까요? 역사에 이미 있어요. 조선시대 재상이었던 류성룡은 임진왜란 때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 일개 명나라 장수 앞에서 무릎을 꿇었어요. 당시 류성룡의 글을 보면 ‘너무 아프다. 아프지만 내가 해야 될 일이다’라고 쓰여 있어요. 난세에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냉정하게 보고 있죠. 고민이 있다면 끙끙 앓지 말고 과거의 사람들을 만나보세요. 그들이 과연 어떤 선택을 했는지, 그 결과는 어떻게 됐는지 알게 되면 좀 더 거시적인 안목과 평정심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역사 교사로 20년, EBS를 통해서는 15년 동안 학생들을 만나왔어요. 교사로서 목표나 꿈은 뭔가요? 사실 전 꿈이 있어 역사 교사가 된 것은 아니었어요. 학창 시절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었고 그냥 성적에 맞춰, 안정적일 것 같아서, 이런 평범한 이유였죠. EBS 강사가 된 것도 단순히 TV에 한 번 나오고 싶어서였어요.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면 많이들 실망하시더라고요(웃음). 그러다 아이들을 가르치며 난생처음 나도 잘하는 게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아 EBS 강의를 전부로 생각하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고요. 그걸 알고부터는 정말 열심히 가르쳤어요. 학생 때 그렇게 했으면 아마 서울대에 갔을 거예요(웃음). 수능 성적도 중요하지만 우리 학생들이 사회에 나가 건강한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공교육 안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작은 역할이라도 할 수 있다면 참 행복할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2016년을 살고 있는 힘겨운 청춘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려요. 지금 우리 사회는 ‘나’라는 개인에 집착해요. 모든 문제의 책임을 개인에게 묻고 개인이 책임지려 하죠. 이제 ‘우리’라는 생각을 해야 해요. 연대하지 않고서는 이 시대를 헤쳐나갈 수 없어요. 우리라는 덩어리 속에 한 발자국씩 함께 풀어나갔으면 해요. 아, 그리고 투표 꼭 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역사에 무임승차하지 않는 방법이 거창한 게 아니에요. 그 투표 용지가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거든요. 수많은 이들의 피와 땀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걸 한 번쯤 생각해주시고 꼭 선거를 통해 본인의 꿈에, 우리의 꿈에 다가가셨으면 해요.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송미성(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