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조한이 서울을 즐기는 취향
3시간 만에 서울의 단면을 체험하는 곳
그를 만나러 가면서 가장 먼저 묻고 싶었던 질문은 6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서울에서 제일 좋아하고 추천하고 싶은 곳이 어디인지였다. 역사 깊은 고궁, 풍광이 유난히 아름다운 골목 등을 예상해봤지만 모두 보기 좋게 빗나갔다.
“서울에서 가장 가볼 만한 곳을 추천해달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저는 낙원상가를 꼽아요. 단 3시간만 돌아봐도 서울이란 도시의 단면을 제일 잘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그 일대거든요. 낙원상가를 중심으로 해서 주변의 인사동, 익선동 한옥마을도 돌아보세요.”
그는 특히 입에 침이 마르도록 낙원상가의 매력을 늘어놨다. 1969년에 세워진 낙원상가는 당시 보기 드물었던 주상복합 상가 건물이다. 그 옛날에도 눈에 띄게 특이한 건물이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역시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함을 자랑하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낙원상가 하면 악기 전문 상가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그것 말고도 여러 가지 뚜렷한 개성을 지닌 공간이기도 하다.
“낙원상가 지하에는 상가가 지어지기 전부터 있던 오래된 재래시장이 있어요. 1층은 차들이 달리는 도로고요. 2~3층에는 수백 개의 악기 전문점이 있죠. 4층에는 영화관, 뮤지컬 전용관이 있고요. 노인들을 위한 실버 영화관도 이곳에 있어요. 5층에는 사무실, 6층부터 15층까지는 아파트고요. 보기 드물게 다양한 사람들을 품은 곳이죠.”
조 교수는 여기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라 말했다. 그렇다면 다른 뭔가가 더 있다는 건가? 그는 낙원상가 위층에 자리 잡고 있는 아파트 이야기를 꺼냈다.
“밖에서만 보면 잘 모르지만 6층부터 있는 아파트는 빛이 가득한 중정을 품은 구조예요. 아파트 9층에 내리면 방금 전까지의 소란스러움이 단박에 사라지고 15층까지 뚫려 있는 고요한 공간이 눈앞에 펼쳐지죠. 시끌벅적한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색다른 느낌에 빠질 수 있어서 이곳을 아주 좋아해요. 다만 거주하는 분들이 계시니까 조용히 있다 오곤 하지요.”
운이 좋으면 낙원상가 엘리베이터에서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다. 아이와 함께 악기를 사러 온 가족, 기타를 멘 연주자, 뮤지컬 전용관을 방문하는 동남아시아 관광객들, 영화관을 찾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한 번에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서울은 끼리끼리 모여 사는 곳이 점점 많아지고 있잖아요. 특히 아파트 단지 문화가 그런 문화를 무의식중에 학습시키지 않나 싶고요. 그런 시대임에도 이곳은 자연스럽고 다양성이 살아 있는 건강한 동네의 느낌이 남아 있어서 좋아요. 서울에서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이젠 드물어졌으니까요.”
낙원상가를 나오면 한편에 포장마차가 나타난다. 그는 이곳 또한 좋아한다. 이곳은 여느 포장마차와는 다르다.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메뉴를 팔지 않는다. 어르신들이 술 한 잔 기울일 때 즐겨 찾는 전, 생선 등의 메뉴를 주로 판다. 주요 고객은 흰머리에 주름진 얼굴을 한 할아버지들이다. 그는 그 틈바구니에 앉아 있으면 묘한 편안함이 느껴진다며 한 번쯤 들러보기를 추천했다.
‘핫’한 동네 서촌의 다른 얼굴
광화문 근처에 가면 일부러 짬을 내서라도 꼭 들를 만큼 애착을 갖고 있는 장소는 서촌이다. 몇 년 사이 미디어에서 자주 다루면서 주말마다 나들이객과 외국 관광객들로 북적거리는 핫 플레이스가 된 곳이다. 서촌에는 예쁜 카페와 이국적인 음식을 맛볼 수 있는 레스토랑, 개성 있는 상점들이 오밀조밀 들어서 있다. 사실 이런 분위기만으로도 서촌을 사랑하고 즐겨 찾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건축가 조한은 그것만이 다는 아니라고, 서촌의 매력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고 말한다. 이곳의 역사를 찾아보면 서촌의 진짜 흥미로운 얼굴이 드러난다고 말이다.
잘 모르는 사람도 있지만 경복궁 서쪽에 자리한 서촌은 공식적인 지명이 아니다. 옥인동, 누하동, 통인동 등 경복궁과 인왕산 사이의 지역을 일컬어 사람들이 붙인 일종의 별명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서촌이란 이름을 둘러싸고 다양한 설이 있다. 이곳에서 세종이 태어났기 때문에 세종마을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조선시대 한양의 내산인 북쪽의 북악산, 동쪽의 낙산, 남쪽의 남산, 서쪽의 인왕산 아래 마을이 각각 북촌, 동촌, 남촌, 서촌이라 불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인왕산 기슭 소나무 아래 바위에 자리 잡은 중인들의 시문학 모임인 송석원시사가 서쪽에 위치했다 해서 서원시사, 서사라 부르다가 서촌이라 부르게 됐다는 말도 있다.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윤동주, 이상, 이중섭 등 유명한 예술인들이 모여들었던 곳이 바로 서촌이에요. 과거에도 지금도 문화 예술이 꽃피는 곳이죠. 지금으로 따지자면 전문직에 해당하는 중인들, 예술인들이 모여 살았는데, 그래서인지 묘하게도 그런 기운이 이 터에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것 아닌가 싶어요.”
그가 서촌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010년 철거 중이었던 옥인시범아파트에서 열린 ‘옥인 콜렉티브’라는 젊은 예술가들의 전시회가 계기가 됐다. 더 이상 사람들이 살지 않는 공간에서 버려진 물건들로 꾸려진 전시였는데 거기서 큰 감동을 받았다. 또 옥인시범아파트를 찾아 올라갔던 ‘옥류동천길(자하문로 7길)’은 그가 서촌에서 가장 사랑하는 골목길이 됐다. 서울 시내에서는 보기 드물게 조선시대, 일제강점기, 광복 직후, 산업화 시기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기의 주거 유형이 잘 보존돼 있는 ‘주거학의 보물 창고’이기 때문이다. 1930년대에 지어진 한옥, 1960~70년대의 벽돌과 콘크리트 건물, 1980년대에 유행한 돌출형 창과 유럽형 테라스, 1990년대 이후에 지어진 다세대주택, 빌라와 근생건물 등을 모두 볼 수 있어 건축이 업인 그로서는 흥분할 수밖에 없는 장소다.
또 시인 이상이 살았던 집, 윤동주가 하숙을 했던 한옥을 찾아보는 재미도 서촌에서만 접할 수 있는 매력이다. 친일파 윤덕영이 딸과 사위를 위해 지어준 집이자 1972년부터는 박노수 화백이 소유하고 있는 서울시 문화재자료 제1호 ‘박노수 가옥’도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윤덕영의 호화로운 별장 ‘벽수산장’의 흔적도 서촌에 남아 있다. 벽수산장을 지을 때 쓰였던 큰 돌들을 훗날 이곳 사람들이 나눠서 쓴 흔적들이 빌라 주차장 등 여기저기 남아 있기도 하다.
“이렇게 옥류동천길을 따라 찬찬히 거닐다 보면 시간의 단면을 하나둘 발견할 수 있어요. 사람들의 인기를 끌고 있는 서촌의 트렌디한 상점들도 멋지지만, 길을 따라 걸으면서 역사를 더듬어보면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건축가 조한이 서울을 즐기는 취향
홍익대에서 공부했고 현재 같은 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조 교수는 기자와 홍대 거리를 함께 걸으며 이곳에 대한 추억도 들려줬다. 요즘에는 젊은이들이 클럽에서 ‘불금’을 보내기 위해 이곳을 찾고, 외국인들에게는 꼭 가보고 싶은 관광 코스로 꼽히곤 하지만 그가 대학생이었던 1980년대만 해도 특별할 것 없는 집들이 대부분이었던 평범한 동네였단다. 그나마 놀 만한 곳으로 여겨졌던 공간은 기찻길을 따라 지어진 판잣집 먹자골목 정도가 다였다. 기찻길이 없어진 그 거리에 지금은 크고 작은 상점들이 빼곡하게 들어섰고 ‘서교 365’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20년 전과 비교하면 상상도 못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젊은 에너지가 흘러넘치는 곳으로 바뀌었다. 홍대 앞이 예술적인 분위기를 갖게 된 것은 1954년 홍익대가 이곳에 터를 잡으면서 미술대학, 건축학과 학생들의 작업실 문화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주택가의 차고, 기찻길 옆 허름한 건물에 작업실을 마련한 이들의 예술적인 감각은 곧 동네에 스며들었다. 지금도 그때 그 시절의 판잣집 형태를 보존하고 있는 ‘서교 365’거리는 번화가가 된 현재에도 가난한 예술가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대표적인 거리가 된 것이다.
조 교수는 미국 유학 시절을 빼고는 줄곧 서울을 누비며 살아왔다. 문득 서울 토박이가 가진 기억이 궁금했다. 같은 서울이라도 나이에 따라 주요 활동 무대가 달랐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10대 시절에는 온갖 전자 부품을 파는 세운상가가 제 놀이터였어요. 전자회로를 만들 수 있는 키트를 사서 조립하는 걸 좋아했거든요. 지금은 없어지고 건물만 남아 있는 아세아 극장도 기억에 남고요. 홍익대 건축학과에 진학하면서 20대부터 30대까지는 홍대 주변에서 제일 많은 시간을 보냈죠. 지금은 여러모로 화려한 동네가 됐지만 그때만 해도 그저 조용하기 그지없는 주택가였죠.”
그는 자신이 알고 있고 정서적으로 깊이 감동한 서울의 역사를 사람들과 나누는 데도 적극적이다. TV, 라디오, 잡지는 물론 블로그, SNS를 통해서도 사람들과 활발하게 공간에 대해 소통하고 있다. 2013년에는 그동안 발굴한 장소들을 모아 책을 내기도 했다. 서두에 언급했던 「서울, 공간의 기억 기억의 공간」이 바로 그 책이다. 직접 서울 답사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한다.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을 데리고 나서기도 하고, 몇 년 전부터는 NGO 단체를 통해 시민들을 상대로 서울 답사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부모와 함께 참가한 10대 학생부터 연륜을 지닌 6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그의 이야기를 들으러 온다. 이런 답사를 진행하는 이유는 서울이란 도시가 지닌 기억을 되살려주고 싶어서다. 코스는 주로 그가 좋아하는 낙원상가 일대, 서촌은 물론 서교동, 인사동 등이다. 참가자들의 반응은 늘 뜨겁다. 서울이 가진 시간의 기억을 알고 나면 뻔하게 느꼈던 서울도 달리 보게 되기 때문이다.
“어딜 가볼까 싶은데 마땅한 곳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기억을 되살려주는 곳을 찾아다녀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정서적으로 굉장히 건강한 감동과 만족감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사람이란 존재는 어떤 방식이로든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는 것들에 본능적으로 끌리는 면이 있거든요. 요즘 들어 골목 투어가 유행하는 것도 그런 곳들이 많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는 경제논리, 개발논리에 밀려 점점 사라지고 있는 서울의 공간들에 대한 안타까움도 내비쳤다.
“건축가 승효상씨가 ‘서울이 치매의 도시가 돼가고 있다’라고 했다는데 저도 그 말에 동감해요. 서울에서 기억이 담긴 공간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거든요. 비슷한 맥락으로 사람이 나이가 들면서 제일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가 치매잖아요. 내 기억과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되니까요. 서울도 그렇게 될까 봐 염려되죠.”
오래전부터 어떤 공간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해온 그는 사람들이 실제로 살았던 골목길, 시간이 많이 담겨 있는 곳이 바로 가장 깊은 감동을 느끼게 해주는 곳이란 답을 얻었다. 그런 측면에서 시간의 가치를 망각한 도시 미관에 대한 집착, 특정한 조망과 형태를 강요하는 요즘 세태는 걱정스럽다.
“실제로 사람들이 살면서 생활 냄새를 풍겼던 주택들 없이 인기를 얻었던 곳 중에는 지금은 쇠락해버린 곳이 많아요. 이대 앞, 신촌, 명동 등은 예전 같은 영화를 누리지 못하고 있죠. 사람들이 살면서 많은 이야기가 차곡차곡 쌓인 동네일수록 오랫동안 사람들의 발길이 머물고 스스로 힘을 가지는 법이지요.”
또 10년간의 유학 생활 동안 다른 나라의 여러 도시들을 다니다 보니 서울이란 도시도 어느 곳 못지않게 다채로운 매력을 가진 곳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떠나기 전에는 몰랐어요. 외국 생활에 대한 로망, 동시에 한국에 대한 불만이 많았거든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 어느 곳이든 보려고 하면 진면목이 보인다는 것과, 짧은 기간 안에 빠른 발전을 이룬 서울이란 도시는 특유의 멋진 나이테를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건축가라는 직업의 이미지를 떠올려보면 다소 어렵고 철학적일 것만 같은데 이토록 다방면으로 친근하게 소통하는 이유는 뭘까.
“거창한 사명감 같은 것은 없어요. 그저 자연스럽게 이렇게 흘러온 거예요. 저는 사는 것도 골목길처럼 자연스럽게, 되는 대로 열심히 살고 싶은 사람이거든요.”
그러고 보니 서울의 많고 많은 곳 중에서도 인공적이지 않고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자연스러운 곳만 골라서 추천해줬다는 걸 알게 됐다. 그의 취향이 명확하게 읽혔다.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 가장 큰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그 취향에 공감을 보탠다.
건축가 조한이 서울을 즐기는 취향
옛것에 대한 향수와 추억이라는 메가트렌드는 낙원상가에서도 그 힘을 발휘하고 있다. 2012년 조성된 야외 광장의 공연장 멋진하늘에서는 매주 아티스트들의 공연이 이어지고 실버 영화관과 낭만극장에는 다양한 연령대의 관람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대중음악은 물론 클래식 악기를 취급하는 300여 개 매장이 자리한 세계 최대 규모의 악기 상점이라는 타이틀도 건재하다. 낙원상가가 품은 낭만과 열정을 나누기 위한 ‘2016 반려 악기 캠페인’의 일환으로 직장인을 대상으로 무료 악기 강습을 하는 ‘미생 응원 이벤트’가 현재 진행 중이다. 공식 페이스북(www.facebook.com/nakwonmusic)과 블로그(http://blog.naver.com/enakwon)를 통해 신청 가능하다.
■기획 / 장회정 기자 ■글 / 정성민(프리랜서) ■사진 / 이소현 ■사진 제공 / 우리들의 낙원상가 ■참고 서적 / 「서울, 공간의 기억 기억의 공간」(조한 저, 돌베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