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여성과 가족의 성장기 ‘소꿉놀이’ 김수빈 감독
품 안에서 고이고이 키운 자식이 이제 앞가림을 시작하려는데 갑자기 임신을 하고 부모가 된다면? 준비되지 않은 채로 부모 혹은 할머니가 된다면? 쉽게 답하기 힘든 문제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이 시댁이나 친정의 도움 없이 불가능해진 지 오래지만 충분한 수입이 없는 자녀까지 챙겨야 하는 부모들의 시름은 더 깊어진다. 청년 세대의 고민이 캥거루족의 현실과 겹치면 더 헤어나기 힘든 굴레가 되는 것이다.
한 집안의 며느리이자 학생이자 생계 부양자이자 곧 태어날 아이의 엄마인 김수빈은 이 역할들로 인해 버둥거린다. 이전에는 뮤지컬 통역과 조연출로 일하면서 집에 들어오면 방문을 닫아걸고 잠을 자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가 태어나자 모든 상황이 달라졌다.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도 버거운 와중에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진다. 남편 하강웅이 뮤지컬 배우를 그만두고 요리사가 되기로 결심한 것. 시어머니는 아들 내외가 안쓰러워 보듬어보려고 애쓰지만 갱년기가 시작돼 힘들어하고, 친정엄마는 이런 상황이 죄스럽기만 하다.
영상을 전공하던 김수빈(29) 감독이 카메라를 들어 이 상황을 기록하고자 한 것은 어쩌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영화의 첫 순간이(기도 하고 처음 촬영한 장면이기도 한) 세 번째 임신 테스트였다. 부인할 수 없는, 기정사실의 순간이었다.
“테스트 결과가 너무 걱정되고 떨렸어요. 제 인생에 이게 무슨 일인지 궁금했고, 타인의 시선으로 볼 때 어떨까 하는 호기심도 있었어요. 밥을 먹는 것처럼 본능으로 찍기 시작한 거죠. (영화는) 어느 날 갑자기 한 사람에게 역할이 한꺼번에 부여됐을 때에 관한 이야기예요. 시어머니도 갑자기 할머니가 되신 거고 저뿐만 아니라 가족에게도 격동이었잖아요. 그런 혼란을 개인으로서는 소화하기가 정말 힘든 거예요. 계속 찍으니 어느 순간 객관화가 되면서 시어머니, 이순천이라는 한 여성을 보게 되고, 제가 가장이 되면서 직업 전환의 격동기를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보게 되더라고요. 우리 가족의 이야기지만 사람 사는 이야기라는 것을 느꼈어요. 카메라를 잠시도 내려놓지 않을 정도로 정말 치열하게 찍었어요.”
“무슨 마술이라도 부린 건지 나중에는 찍고 있는지도 몰랐어요. 처음에는 졸업 작품을 찍는다고 했고요. 이렇게 사람들에게 보여지고 극장 개봉을 하게 될지 상상도 전혀 못했어요. 당황스럽고 민망했어요. 평소 며느리하고 이야기를 많이 해요. 인생을 길게 살지 않았지만 제 삶에 비춰 이야기한 건데 영화에서는 잔소리꾼처럼 나오더라고요. 나쁘지 않은 시어머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비치지 않아서 화면 속 제가 굉장히 낯설었어요.” (이순천씨)
2010년부터 만 5년간 촬영한 영화는 김 감독의 포트폴리오 겸 그녀의 일상이 됐다. 자신의 삶을 객관화할 수 있었던 것도 수확이었다. 또 가족 구성원에게 각자 사정이 있음을, 서로의 행복을 위해 애쓰고 있음을 알게 됐다.
“얼레벌레 찍기 시작”한 영화는 2013년 단편 다큐로 제작돼 졸업 작품이 됐고 이후의 촬영과 편집, 애니메이션 작업을 거쳐 현재의 장편으로 완성됐다. 오랜 작업 덕분에 감독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아이는 엄마 혼자의 힘으로 자라는 것이 아니며, 대단한 희생정신이나 모성을 다 타고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애쓰는 시간들이 쌓이면서 조금씩 익숙해지는 어떤 것에 가깝다. 세상에는 엄마보다 좋은 아빠들도 적지 않게 존재하니까.
“남편이 임신 사실을 전화로 알렸는데 시어머니는 바로 ‘애기 낳자’ 하셨던 반면, 친정어머니는 ‘어떡해!’ 하면서 뒷목을 잡으셨죠(웃음). 친정어머니에게서도 느끼지 못한 자애로운 사랑을 느꼈어요. 모성애 측면에서는 두 분 어머니와 제가 모두 다른 것이 흥미로웠어요. 시대마다 성격마다 다르듯 모두가 다르니 같은 형태의 모성애를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사회가 만든 신성화된 모성은 맞지 않다고 생각해요. 저는 노아를 낳고 키우면서 모성애가 커진 경우예요. 노아가 다섯 살이 되는 동안 저도 그만큼 엄마 나이를 먹은 거죠. 아이와 유대감이 쌓이면서 엄마로 성장한 것 같아요. 계획 임신이 아니었고 모든 일이 갑작스러웠기 때문에 임신이 병적 증상으로 느껴졌거든요. 일면식도 없는 존재와 몸을 나눠 쓰는 것이 낯설었어요. 그동안 내보낸 거라곤 배설물뿐인데 사람 몸에서 사람이 나온다는 것도 이상했고요. 만삭일 때도 아이가 정말 나올까 싶었어요.”
“모성애는 다 달라요. 사랑이란 감정도 신체적인 변화로부터 나오는 거예요. 모유를 먹이면서 호르몬이 생성되잖아요. 사실 임신 소식을 듣고 저도 당황했지만 돌이켜보면 아이들을 보호해야겠다는 본능적인 마음이 앞섰어요. 결혼하면 부부가 함께 성장하기가 힘들잖아요. 각자 진로와 생계를 고민하면서도 공부를 놓지 않는 모습에 보람을 느꼈어요. 며느리와 함께 살다 보니 한 여자의 삶을 보며 제 이해의 폭도 넓어졌고요. 이렇게 영화를 찍고 한 사회인의 몫을 하는 것이 참 대견해요.” (이순천씨)

(왼쪽부터)친정어머니 이나미씨, 김수빈 감독, 시어머니 이순천씨.
하지만 성인군자 같고 무엇이든 이해해줄 것 같던 시어머니도 ‘갱년기’라는 불청객 앞에서 무너졌다. 사람인지라 몸이 아프고 예민해지니 며느리에게 싫은 소리를 하게 됐다. 매번 좋은 모습만 보여줄 수 없는 것이 가족이기도 하다. 영화 속 인물을 전형적인 캐릭터로 받아들이기 쉬운 관객이 보기에는 잔소리꾼 시어머니, 집이 깨끗하지 않다고 아내를 나무라는 남편이 얄밉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김 감독의 시댁은 ‘평균적인 시댁’은 아니었다. 30년 넘도록 일하면서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고 챙긴 시어머니는 임신한 며느리를 위해 삼시 세끼 먹을 일품요리를 냉장고에 가득 채워놓고 출근하곤 했다. 설거지는 남자들의 몫이었다. 시아버지의 솔선수범 덕에 남편도 가사를 하며 자란 것이다.
이 좋은 가풍을 유지하는 집안에 바빠서 청소와 정리를 미루는 며느리가 들어온 것은 스트레스였다. 새 식구에게 적응하는 일은 모두에게 힘들지만 시댁에 더부살이하는 김 감독은 때때로 눈칫밥을 먹었다. 결혼은 다른 가족 문화의 만남이란 것이 부부의 일상에서 실감 나게 보였다.
아내에게 “아이를 생각해서 깨끗하게 살라”라며, 엄마로서 더 큰 책임감을 요구하는 부부싸움도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겼다. 이 얘기를 하는 와중에 친정어머니 이나미씨가 등장해 사위 편을 드는 바람에 가사 분담에 대한 갑론을박이 벌어지기도 했다.
“안 싸우는 부부는 없어요. 얘가 저랑 살 때도 그랬지만 청소, 정리에 문제가 있어요. 사위가 뮤지컬 배우라서 발성도 좋고 박력 있게 말하는데 전 오히려 통쾌했어요(웃음). 딸보다 훨씬 논리적이고요. 시어머니 속은 얼마나 터질까 싶어요. 습관의 문제인데 찬기 뚜껑을 닫아놓질 않아서 짝이 안 맞고 자꾸 잃어버려요. 정리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인데 이해가 안 돼요.” (이나미씨)
“애 재워놓고 새벽까지 번역하다가 아침에 학교에 가면 무척 피곤해서 학교 벤치에서 졸곤 했어요. 청결에 대한 관념 차이가 크죠. 시어머니하고 남편은 깔끔한데 저랑 형님이 좀 어지르는 편이었어요. 인생에서 청소하고 설거지하느라 10년은 보낼 텐데 주부의 가사 노동도 일로 인정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떻게든 시간을 줄이려고 쌓아놓았다 한꺼번에 치우는데, 보는 사람은 거슬리는지 뭐라고 하는 거예요. 남편이 요리사를 준비하면서 걱정이 많았어요. 둘 다 어렸고 스트레스가 심해서 부딪혔던 거예요. 피곤에 전 채 아이 재우느라 실랑이하면서 함께 살아남아야 한다는 동지애 비슷한 유대가 많이 생겼어요.”
“각자 역할 분담이 있지만 청소 때문에 스트레스를 좀 받았어요. 청소하라고 대놓고 말을 못해서 궁여지책으로 종이에다 각자 구역을 나눠놓고 청소한 사람은 사인하라고 했어요. 그런데 한 달 동안 저 말곤 아무도 안 하기에 그냥 포기했죠(웃음).” (이순천씨)
김 감독은 무남독녀로 예술가 집안의 기대 속에 성장했고 남편은 1남1녀의 막내다. 장고 끝에 남편은 요리 유학을 위해 일본으로 떠났고 김 감독은 다시 친정에서 노아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 양가의 도움 없이는 부부가 온전히 서기 힘든 캥거루족의 삶이지만 모두 애쓰는 것을 알기에 시간이 지나며 시어머니를, 남편을, 친정 부모님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남편은 두어 달에 한 번밖에 보지 못하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잘해내고 있어 안도하게 된다. 인터뷰에 동행한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서로 애틋해했다. 시어머니는 “사랑하는 며느리”라고 부르며 김 감독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시어머니는 감내하고 포용할 수 있는 능력이 크신 분이에요. 갑자기 시어머니가 되신 당신의 삶이 저랑 다를 바가 없었잖아요. 끊임없이 절 이해하고 보듬으려 하시지만 뜻대로 안 될 때가 보였기에 저도 어머니가 안타까웠어요.”

1 아이를 좋아하는 남편은 곧잘 놀아주기도 하고 청소와 설거지도 잘하지만 아내가 더 좋은 엄마이길 요구했다. 2 혼전 임신으로 얼떨결에 울린 웨딩마치. 하지만 이때까지 일어난 일은 이후에 닥칠 결혼생활의 서막에 불과했다. 3 딸 하노아. 다행히 할머니를 닮아 엄마보다 정리 실력이 출중하다.
영화에서 가장 돋보인 점은 이야기를 끌어가고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감독으로서의 재능이었다. 출산 후에 망가진 생식기를 노래한 ‘음부송’은 그야말로 포복절도할 대목이었다. 신체의 변화를 덤덤하고 유머러스하게 그려내는 능력이라니! 어떤 상황에서도 쉬이 주눅 들지 않고 할 말은 꼬박꼬박 하는 그녀의 태도는 자유로운 친정의 가풍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디자인 계통에 종사하는 부모님 덕에 미국에서 태어나 일곱 살까지 자랐고, 교육 과정은 한국에서 밟았지만 다양한 언어와 문화적 경험을 적극적으로 습득한 것이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뮤지컬 각색 작가로 활동하게 된 배경이다. 직장인이라면 부러워할지 모르겠지만 집에서 일할 때가 많고 휴식과 노동의 장소·시간을 구분하기 힘들다는 것은 단점이다.
“수빈이가 승부욕이 많아서 모든 걸 해내려고 하고 휴식이나 자기를 돌아볼 시간 없이 일 욕심을 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앞으로는 꼭 하나의 직업이 아니라 여러 일을 큐레이팅하는 경우가 늘어날 것 같아요. 사위만 해도 요리하는 가수가 못 될 이유가 없죠. 영화에서처럼 가족이 단순한 지지자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도 있고요.” (이나미씨)
“만약 결혼하지 않았다면 유학을 갔을지도 모르겠어요. 대신 제게 주어진 현실 안에서 만들 수 있는 영화를 찍었죠. 대만국제다큐영화제에도 초청을 받았는데 제 이야기가 같은 유교문화권에서 인정받은 것 같아 기뻤어요. 영화를 통해 제가 더 뻗어나갈 가능성을 보게 됐어요. 영상 기록을 습관적으로 하게 되고요. 그게 쌓여서 창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또 하고 싶어요. 일러스트레이터를 하거나 뮤지컬도 하며 창작자로서 계속 살고 싶다는 꿈이 있어요. 제 존재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일을 하라며 응원해주시는 시어머니께 감사할 따름이죠.”
“제가 망가지는 건 이제 상관없어요. 도울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 든든한 부모 역할을 해주는 것이 도리인 것 같아요. 요즘 젊은 세대들은 결혼을 두려워하는데, 희망과 꿈을 놓지 않으면 성장해가는 자신을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수빈이가 잘해낸 것처럼요.” (이순천씨)
“딸이 기특한 건 제 딸이어서가 아니라 여러 역경이 닥쳤을 때 자신만의 방식으로 헤쳐 나갔다는 점에 있어요. 삶의 주인이 되겠다는 의지로 카메라를 들었다고 생각해요. 어떤 경험이든 자기 것으로 만들겠다는 태도가 있다면 두려울 일이 없겠죠.” (이나미씨)
‘소꿉놀이’란 영화의 제목은 시어머니와의 대화에서 따온 것. 보통 소꿉놀이에서는 엄마, 아빠, 아이의 역할이 한정적이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잊지 않는다면 특정 역할에 얽매어 자신을 잃는 일은 없을 것 같다고. 곧 이 영화는 감독이나 엄마 이전에 한 사람의 인간다움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이 사회에서 여성에게 많은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 사실이에요. 그런 시간들을 겪어온 강하고 자애로운 여성들을 존경하지만 가족 내의 책임은 분산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쪽으로 치우치면 그 관계가 오래가기 힘들잖아요. 연애나 결혼 관계에서 균형을 맞추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봐요. 남편이 가사를 많이 하는 편인데도 저랑 부딪히는걸요. 만약 제가 공부하러 떠나고 남편이 남아서 육아를 했다면, 아마 비난받는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요?”
■기획 / 장회정 기자 ■글 / 위성은(객원기자) ■사진 / 김동연(프리랜서) ■사진 제공 / 시네마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