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규 작가를 만난 건 지난 2017년. 나고 자란 고향인 둔촌주공아파트의 재건축을 앞두고 이를 기록하는 ‘안녕 둔촌프로젝트’를 이끄는 ‘아파트 키드’의 이야기를 듣고자 한 인터뷰를 통해서다. 당시는 새집 건축을 앞두고 헌집 거주자들의 이주가 한창일 때였다. “매일 이사하는 소리가 들리는” 둔촌주공을 이 작가와 돌아봤다. 아름드리나무 그늘과 오래된 놀이터와 추억의 흔적이 도처에 있는 공간. 그와의 대화에는 진한 향수와 포근한 낭만이 깃들어 있었다.
“2022년 1만1100가구의 초고층 아파트 단지로 거듭날 예정”이었던 둔촌주공은 아직도 공사 중이다. 단군 이래 최대규모 재건축단지로 몸값을 높이던 둔촌주공은 가장 요란한 재건축 사례로 이름을 남기게 생겼다. 그리고 유년의 기억을 기록하고자 했던 이인규 작가는 자연스레 현대사에 길이 남을 이 역사를 기록하는 연구자가 됐다. 10년 간 회사를 다니다 둔촌주공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싶어 서울시립대 대학원 건축과에 진학한 이 작가는 석사학위 논문 <둔촌 주공아파트 단지 생애사 연구>를 썼다. 그리고 마침내 그간의 기록과 취재를 집대성한 책 <둔촌주공아파트, 대단지의 생애 건설·거주·재건축의 40년>(마티)를 펴냈다.
“둔촌주공아파트에 대한 애정을 담아 진행한 아카이빙 프로젝트 ‘안녕, 둔촌주공아파트’가 예상외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던 것은 이러한 일상의 기억을 소중하게 다뤘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아파트 단지에 대한 이야기가 대체로 투기적 욕망과 그에 대한 날 선 비판으로 양극화되어 있었다면, ‘안녕, 둔촌주공아파트’는 아파트 단지가 누군가의 집이자 동네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둔촌주공아파트에서 하루하루 쌓인 소소한 일상의 기억과 기분 좋은 감각은 나이테가 켜켜이 쌓여 단단해진 나무의 밑동처럼 그곳에서 살아간 이들을 지탱해주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책은 ‘1부 둔촌주공아파트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를 통해 주공아파트로 대표되는 도시공동주택 건설의 역사를 입체적으로 짚어나간다. 지난해 인기리에 방영된 <재벌집 막내아들>에서도 등장했던 1980~90년대 아파트 건설 붐과 신도시 개발 광풍에 대해서도 밀도 있게 다룬다. 둔촌주공아파트의 향수에서 출발한 저자의 연구가 얼마나 넓고 깊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2부 둔촌주공아파트에서는 어떻게 살아갔을까?’에서는 거주 경험자 입장에서 아파트를 채웠던 이들의 삶을 주목한다. 저자는 “둔촌주공아파트 거주민들이 이토록 깊은 애정을 가지게 된 것은 그곳이 그들의 ‘집’이자 ‘동네’였기 때문”이라며 “‘완성형’으로 태어나 수십 년 동안 크게 바뀌는 것 없이 ‘정지된 마을’로 머무를 수밖에 없는 아파트단지의 숙명도 장소 애착 형성에 영향을 미친 중요한 요인”이라고 썼다. 40년 동안 한결같은 모습으로 머물렀던 “쾌적하고 살기 좋은 단지”의 자부심은 재건축의 바람을 타고 다른 전기를 맞는다.
저자는 ‘거주 공동체’로 묶여있던 이웃들이 ‘안녕, 둔촌주공아파트’를 통해 ‘기억 공동체’로 인식하게 되는 경험을 쌓았다. 책에는 둔촌주공의 건설 당시 및 입주 초기, 2017년 건물 반, 나무판 초록이 그득한 둔촌주공의 당시 사진부터 이주 직후, 철거 상황, 그리고 2022년 올림픽파크포레온으로 변모하는 건설 현장까지 고스란히 담겨있다.
3부 ‘둔촌주공아파트는 어떻게 사라져갔을까?’는 지난했던, 하지만 아직도 현재 진행 중인 둔촌주공의 거듭나기를 재조명한다. “재건축 사업을 지켜보며 이런 최악의 결말로 치닫지 않기를 바라고 바랐다”는 저자의 바람이 무색하게 둔촌주공은 한국 아파트사의 굵직한 사건으로 기록되게 됐다. 막대한 공적자금이라는 심폐소생술, 뜨거운 청약경쟁률, 새집에의 열망…결국 둔촌주공을 구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원래는 2021년 2월 완성한 논문을 바탕으로 낼 계획이었던 단행본은 “예상치 못한 일들이 계속 이어져” 이번 여름에 이르러 세상과 만났다. 생애를 관통하는 연구 결과물을 내놓으며 작가는 “둔촌주공아파트의 시간을 따라가다 보니 그사이 한국 사회와 서울의 도시 환경이 어떻게 변했는지, 발전국가 시기의 유산이 어떻게 신자유주의 시대의 자원으로 변용되는지, 이에 따라 대단지라는 환경에서 살아가던 이들의 삶의 방식과 사고방식이 어떻게 바뀌는지, 혹은 바뀌지 못하는지 두루 살펴볼 수 있었다”고 전한다.
부동산 투자 혹은 투기, 주거공간. 이분법적으로만 다뤄지던 아파트를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는 이 의미 있는 결과물이 아파트공화국을 살아가는 동시대인들에게 두루 읽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