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리나에서 벤처갑부된 마이클럽 CEO 이수영

발레리나에서 벤처갑부된 마이클럽 CEO 이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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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입구에서 “사진 한 컷 찍겠습니다!”란 요구에 고개를 약간 기울인 채 팔짱을 끼는 이수영 CEO의 모습이 꽤나 능숙했다. 그만큼 인터뷰에 익숙해 있다는 증거다. IT업계, 혹은 경영인 사회에서 그녀는 유명인사다. 그녀가 손수 만들어서 키웠고, 지금은 대주주로 있는 게임업체 웹젠이 코스닥에서 상한가를 치면서 ‘벤처갑부’ ‘코스닥 3대 처녀갑부’ 등의 별명이 그녀에게 따라붙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녀는 부자다. 그것도 수백억대 가치의 주식을 소유한. 그런 사실만으로 사람들은 그녀를 ‘성공한 30대 여자 갑부’라는 네 마디의 틀 안에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 대부분의 일이 그렇듯이, 그녀의 성공 스토리 역시 그렇게 네 마디로 끝날 수 있는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Success Point1. 절망스러운 현실을 타개하라

그녀를 설명하는 데 꼭 따라붙는 단어가 하나 더 있다. ‘발레리나’. 그녀는 발레를 전공했고, 짧지 않은 기간의 젊은 시기를 발레에 미쳐서 보냈다. 그랬던 그녀가 IT업계, 그것도 게임업계에 뛰어들어서 큰 성공을 거둔 것이다. 그녀가 이루어 놓은 자산가치는 로또 복권 1등에 당첨돼도 몇 번은 되었어야 할 수치의 금액과 맞먹는다. 불과 한 달 전에 평가받은 가치는 3백억원을 훨씬 웃도는 수치이다. 웹젠의 주식 11.1%를 보유하고 있는 대주주의 자산 규모이다. 이야기의 앞부분과 뒷부분만 따서 듣는다면 발레리나도 했고, 이제는 벤처 갑부가 되었다. 이 얼마나 유연하고 행운이 가득한 삶인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운이 좋다뇨. 전 지지리도 운이 없는 편이라고 생각해요. 처음부터 그랬죠. 하긴 그렇기 때문에 이 자리에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요.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고,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할까’ 하고 늘 다른 것을 찾아 끊임없이 동분서주해야만 했어요. 좌절을 많이 했다는 것, 그래서 독해지기도 했다는 것, 그것이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어려운 상황에서 굴복해야 할 것인가, 타개하고 나아갈 것인가를 결정하며 살았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 때 본 좥백조좦라는 한 질의 만화책과 한국 무용을 전공하다가 발레공연을 보고 나서 뒤늦게 발레리나의 길을 결심하게 된 그녀.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진학을 결정한 세종대 무용과에 그녀는 수석으로 입학했다. 하지만 정작 들어간 대학생활에서 뭔가가 늘 채워지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학교생활도 열심히 했고 많은 공연에 참가하면서도 항상 그랬다. 실기의 비중은 너무 적었고, 교양이나 다른 수업들에 할애되는 시간이 필요 이상으로 많다고 느꼈다.

한마디로 전문적인 발레리나로 트레이닝 하기엔 대학 4년이 너무나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결정한 것이 유학. 발레리나로서의 전문 트레이닝 과정도 거치고, 무용가가 되기 위한 공부 역시 함께 병행했다. 하지만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녀는 큰 벽에 가로막혀 막막해질 수밖에 없었다. 앞뒤 꽉 막힌 한국 무용계의 보수적이고 틀에 박힌, 답답한 구조 앞에서 그녀는 무력한 젊은 무용수일 뿐이었다.

한국 사회의 예술계 구조 자체에 대한 고민 때문에 이 무렵 그녀는 예술계의 경계선에서 방황하기 시작했다. 가야금도 배우고, 연극을 하려고 극단도 찾아가고, 방송에서 문화 프로그램의 리포터로도 활동했다. 여기저기를 넘나들며 한국 예술과 문화 산업을 배우고 관찰하고, 고민했던 시기였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딱 이거다 싶은 것이 없었다. 그러던 중 그녀는 ‘대중문화 속에서 순수 예술의 역할을 키워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내가 해보겠다는 생각이었죠. 많은 새로운 시도를 모색하고, 또 어렵게 도전했죠. 나름대로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을 기획하기도 했어요. 실제로 동숭아트센터 같은 곳에 기획안을 넣기도 하고, 많은 곳을 찾아다니고 사람들도 만나고 했죠. 그러던 와중에 생각했던 것이 ‘무용게임’이었어요.”

그녀의 생각이 드디어 무용을 컴퓨터 게임으로 만들어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데에까지 미쳤다. 무용게임에 대한 기획안을 들고 한 컴퓨터 게임업체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게임 국제마케터로의 인생이 시작되었다. 열정을 가지고 시작했던 발레에서의 좌절감이 그녀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준 것이다. 비단 이때뿐만이 아니다. 그렇게 들어간 회사가 IMF를 앞두고 문을 닫게 되어서 다른 일자리를 알아봐야 했을 때, 무용교수 자리에 이력서를 넣어놓고 기다리다 영영 연락을 받지 못했을 때, 그녀는 쓴 좌절감을 맛보아야 했다.



“좀더 좋은 곳에 다녔다거나, 아니 그 이전에 발레리나로 성공적인 길을 걸었다면 저는 그냥 그곳에서 끝나고 말았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번번이 실패를 했고, 그때마다 결정해야 했죠. 그냥 주저앉아 버릴 것인가, 어떻게든 다른 탈출구를 찾아야 할 것인가? 물론 결론은 하나였지만, 시련을 도전으로 받아들이라는 그 흔한 말이 실제로는 얼마나 어려운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Success Point 2. 틀에 박힌 고정관념을 깨는 유연함

그녀는 경영을 하는 무용가이다. 혹은 무용가였던 경영인. 예술을 했던 것이 경영에 도움이 되느냐고 묻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힘주어 ‘그럼요!’라고 말한다.

“그것도 아주 많이 도움이 돼죠. 사실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들은 문화 산업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정확하게 말하면 디지털 문화 산업이죠. 창의성과 유연함이 요구되는 분야라고 생각합니다. 오로지 경영인으로만 자랐고, 문화나 예술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이 이 분야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얼마나 한정적이겠어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에 창의적일 수도 없겠죠.”

창의성 있는 예술가들이 경영에 대한 전문적인 공부를 하게 되면, 특히 문화 산업에서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수도 있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한국의 교육 시스템은 뭐랄까요, 너무 평균적인 사람을 길러낸다고 말해야 할까요? 나이에 맞추어 일정한 단계를 밟도록 되어 있는 틀에 박힌 시스템이죠. 모두를 통일적으로 컨트롤하기에 좋은 국가 시스템의 일종 같다는 생각도 종종해요. 글쎄요, 한국에서 대열이탈 없이 일반적인 교육단계를 꾸준히 밟아온 사람들에게는 성공의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기 힘든 일이라고 생각해요. 창의적이고 독특해야 할 문화에 대해서  뭘 알겠어요? 자유롭게 사고하는 방법도 제대로 알지 못할 거예요, 아마.”

실제로 함께 일하는 직원들도 그녀의 창의적이고 유연한 사고방식에 늘 감탄한다.

“사장님은 무용을 하신 분이라 그런지 아이디어 같은 것이 굉장히 참신하다고 해야 하나요? 신선하고 독특한 발상을 많이 하세요. 분명 그건 예술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시야나 사고의 폭이 굉장히 넓고 다각적이어서 직접 눈에 보이는 것 외에도 다양한 유추나 해석을 폭넓게 내릴 수 있는 분입니다. 또 예술가의 열린 마인드 때문인지 변화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재미있어 하시죠. 새로운 일에 ‘아! 이건 해보면 재미있겠구나!’라고 말씀하시는 사장님을 보면 어린 저희가 오히려 놀라기도 하죠.”

Success Point 3.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던 실무 경험

앞서 말한 것처럼 무용게임에 대한 기획안을 들고 찾아갔던 회사에서 그녀는 첫번째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마침, 그녀가 제안서를 들고 찾아갔던 그 회사는 해외 마케팅 부서를 신설하려는 준비를 하던 곳이었다. 그러던 때에 보무도 당당하게 제안서를 들고 찾아온 미국 유학파 아가씨는 여러모로 제격인 인재로 여겨졌던 모양이다. 우선 영어가 됐을 것이고, 신선한 아이디어도 마음에 들었겠지. 거기다가 제안서를 들고 찾아나설 정도의 용의주도함이나 적극성, 자신감은 큰 점수를 땄으리라.

회사는 많은 배려를 해주면서까지 그녀를 잡아두기로 했다. 무용을 위한 시간은 언제든지 내줄 것이며, 마케팅 부서는 통째로 그녀에게 위임했다. 물론 회사의 중요사안에 대한 결정권도 약속받았다. 그렇게 해서 그녀는 자신의 인생에서 예상치 못했던 ‘직장인’이 되었다.



막상 그렇게 시작하고 보니 예상외로 직장인 생활도 흥미로웠다. 워낙 한 가지 일에 몰두하고 집중하는 편이기도 했지만 조금씩 가시적인 성과도 늘어갔다. 간간이 공연도 하고, 강의도 나갔지만 ‘이러다 무용은 뒷전이 되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들 정도로 그녀는 자신의 직장에 무섭게 적응했다. 게임 산업의 메커니즘을 속속들이 배울 수 있었다.

그러다 IMF 직전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그녀는 외국계 컨설팅 회사로 직장을 옮기게 됐다. 이곳에서 그녀는 금융이나 벤처투자, 경영 컨설턴트에 관련된 업무를 했고, 경영이나 산업구조 전반에 관한 폭넓은 공부를 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그 무렵 4년째 되던 직장생활에서 그녀는 위기의식을 강하게 느꼈다. 직장생활에 너무 적응을 잘 한 나머지 무용에 대한 비중이 조금씩 약해지고 있었기 때문.

“뭔가 큰 결정을 내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마지막 배팅을 하기로 했죠. 대학교수로 이력서를 내놓고, 또 큰 공연을 하나 기획했어요. 그 두 가지 일 중에 하나라도 크게 성공하면 무용을 하고, 그렇지 못하면 회사 일에 더 열중하기로요. 대학교수 일은 잘 성사가 되지 않았지만, 공연은 그럭저럭 성과를 거두었어요. 그동안 직장생활에서 배운 마케팅력도 한몫 크게 하긴 했죠. 그런데 그 공연을 앞두고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했던 회사의 게임 개발자들이 회사를 차리자고 찾아왔어요. 마음이 많이 흔들렸고, 공연이 끝난 후엔 바로 회사 설립에 들어갔죠.”

그녀는 두 번의 직장 생활을 통해 뜻하지 않게 마케팅과 게임, 그리고 경영에 관해서 제대로 배울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그녀의 직장 생활은 현재의 그녀를 만들기 위한, 잘 짜여진 수업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적절했다.

웹젠을 경영하면서도 이런 사실들은 실제적으로 큰 도움이 되었다.

“위기도 꽤 있었어요. 처음 서비스가 활성화된 후엔 서버가 불안정해서 유저들의 끊임없는 불만이 제기됐죠. 회사 시스템의 한계 때문에 극복할 수 없었던 문제들은 마케팅적으로 해결을 했어요. 물론 절대 편법은 아니었어요. 진심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접근을 하자 유저들도 곧 쉽게 수긍하고 따라와주더군요.”

구체적인 예를 꼭 들지 않더라도, 발레리나로 무대 위를 도약하고 있어야 할 그녀가 이렇게 능숙하게 게임 회사를 차리고, 자금을 투자받고, 그 회사를 키워놓은 것은 게임시장과 마케팅, 그리고 경영에 관한 한 누구 못지않은 전문가라는 것을 여실히 증명해주고 있지 않은가.

Success Point 4. 함께 달려온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성공

인사가 만사라는 평범한 진리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것도 자신이 고용자가 아닌 경영자의 입장이 되면 용케도 그 사실을 까맣게 망각하는 재주를 지닌 사람도 적지 않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지 않았다.



“4억원을 투자받아서 웹젠을 시작했어요. 개발단계에선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도록 했고, 개발자 3명만 데리고 말 그대로 일에만  파묻혀서 지냈어요. 예술의 전당 부근에 작은 사무실을 얻어서 내부는 먹고 자는 것을 해결해가면서 일할 수 있도록 아늑하고 멋지게 인테리어도 했어요. 주식배당도 많이 해주고, 한약을 달여 먹이기도 했어요. 사실 은근한 압력도 많이 넣은 게 사실이지만요. 그래도 정말 재미있게 일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어요. 오픈을 앞두고 첫 여름휴가 때는 개발자들과 그들의 여자친구들 모두를 데리고 제주도로 여름휴가를 다녀오기도 했고요.”

웹젠의 창립에 관해 이야기하는 그녀의 눈길이 먼 곳과 가까운 곳을 오가며 더듬듯이 아득했다가 뭔가 잡아낸 듯 반짝인다. 그 눈길이 무엇을 더듬는지, 무엇을 잡아채고 돌아온 것인지 짐작이 갈 만도 했다. 누구나 그런 시절을 보냈다면 인생에 보석 하나를 심어두고 틈틈이 꺼내보고 쓰다듬어 보는 것과 같지 않을까.

성공이 무어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혹 많은 돈을 버는 것? 아니면 이름을 날리는 것? 아니, 그녀는 전혀 다른 개념을 끌어와서 대답했다.

“성공은 노력하고 열심히 해서 그것에 대한 대가를 충실하게 거둬들이는 것 아닐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걸어온 길에 함께 동참했던 사람들이 성공이란 단어를 두고 함께 기뻐할 수 있는 것이라야 하고요. 돈요? 글쎄요. 전 제가 얼마나 돈을 벌었는지에 대해서는 실감하지 못해요. 제가 갖고 있는 주식들을 실제로 돈이라고 느껴본 적은 없는 것 같네요.”

이수영 대표는 현재 마이클럽에서도 성공하고자 한다. 즉 함께 일하고 있는 직원들과 같이 힘껏 달리고, 그 뒤엔 기쁜 성과를 같이 거둬들일 생각이다. 그래서 가능한 열심히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편안하고 아늑한 환경, 그리고 함께 나간다는 동료의식. 그녀가 직원들에게 주고 싶어하는 것들이다.

Success Point 5. 때로는 냉정해야 하고 때로는 미쳐야 한다

“여자로서 성공한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예상하듯 난관이 꽤 많죠. 어떨 땐 꽉 막힌 선입견과 편견 속에서 질식할 것 같은 순간도 있어요. 꽤나 자주요. 회사를 잘 키워놨는데도, 나름대로의 성과물을 보여줬다고 생각하는 그런 순간에도 의심은 끝나질 않더군요. 그래서 여자가 성공하는 것은 남자가 성공하는 것보다 몇 배 더, 훨씬 어렵죠. ‘여자가 성공하려면 자기 자신에게 냉정하고 정확해야 한다!’는 이야기 하나만 하고 싶어요.

사람들과 사회의 편견 속에서 여자들은 이렇게 생각하기 쉽거든요. ‘그래, 이 정도만 해도 됐어. 충분히 열심히 했어.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여기까지만 온 것도 어딘데’라고요. 상황이 어려우니 대충 자신에게 유리하게 생각하고 걸음을 멈춰버리기  쉬우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끝나버리면 성공이란 단어는 멀어져버리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라는 말처럼, 그러나 그녀는 자신에게 냉정한 만큼 일에 대해선 열정적이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는 미칠 정도로 빠져드는 것. 그래서 결국 무언가를 얻어내는 것이 그녀의 방식이었다.

어릴 적 발레를 시작할 때도 그랬다. 부모님과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발레에 미쳐 있었기에 대학을 수석으로 진학했고, 유학까지 다녀올 수 있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일을 배울 때도, 웹젠을 설립하고 코스닥에 상장시키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어릴 적 발레리나의 꿈을 택할 때 그랬듯이 다른 사람보다 정열적으로, 강단 있는 방법으로 사업을 이끌었다. 때로는 미쳐서 일하고, 때로는 냉정하고 배포 있게 행동했다.

그 방법은 제대로 먹혀들어갔다. 어려운 경제 상황이었지만 투자를 받을 때도 급하게 마음먹지 않고 기다려 높은 배수로 좋은 조건에서 성사를 이루어냈다. 그리고 그녀의 냉정한 판단력과 일에 대한 열정이 웹젠의 신화를 이룩했고, 이제 여기 새로운 시도의 길목에 그녀를 끌어다놓았다.

그녀는 지금 또다시 굴복이냐 타개냐의 길목에서 동분서주하고 있다. 아니, 길은 이미 타개로 들어서 있으니 이 말은 틀린 듯하다. 그녀가 CEO로 들어선 여성포털 마이클럽은 이제 올 여름 그녀가 다시 도약하는 새로운 발판으로서 거듭날 준비를 마치고, 일발장전에 들어갔다.

“좋은 회사로 만드는 것이 목표입니다. 구체적으론 우선 코스닥을 목표로 하고 있고요. 여기서도 뭔가 보여줄 수 있다고 만용을 부리고 있죠.”

그녀의 근거 있는 만용이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길 기다려본다. 여름이 끝나기 전에 시원한 승전보가 들려오길 말이다.

글 / 김영인(자유기고가)  사진 / 신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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