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이순원이 전하는 ‘길 위에서 배우는 삶’

작가 이순원이 전하는 ‘길 위에서 배우는 삶’

댓글 공유하기
준비하고 몰입한 것만큼만 보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길 위의 인생이다

대관령 너머, 저기 해가 진다

어린 날, 내 꿈은 내 발로 대관령을 한번 넘어보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대관령 동쪽 산밑 마을에서 자랐고, 대관령은 언제나 저 세상을 향한 내 꿈을 병풍처럼 차단하고 서 있던 산이었다.

매일 아침 해는 동쪽에서 떠올라 서쪽으로 졌다. 어린 시절 이른 아침 해뜨는 모습을 보기 위해 뒷동산에 오른 적도 많았다. 그러면 해는 저 멀리 동해바다를, 그리고 바다 위의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그보다 더 붉은 자신의 얼굴을 내밀곤 했다. 그 해가 지는 곳이 대관령이었다.

바다에서 해가 떠오르는 모습은 매일 볼 수 없었지만(이걸 매일 보자면, 날 맑은 날 매일 아침 다섯 시쯤 자리에서 일어나 뒷동산으로 올라가야 한다.) 대관령으로 해가 지는 모습은 날 맑은 날이면 거의 매일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마당에서도 볼 수 있었고, 소 풀을 뜯기러 간 산에서도 볼 수 있었다. 이맘때쯤 학교에서 돌아오면 우리는 집안의 소를 몰고 산으로 간다. 그리고 대관령 너머로 해가 떨어지고 어둑어둑 땅거미가 질 무렵 소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때마다 궁금했던 것이 저 해지는 산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어른들 말로는 그곳에도 이곳과 똑 같은 마을이 있다고 했다. 산이 높아 한 여름에도 모기가 그렇게 많지 않으며, 또 한낮도 이곳보다는 덜 덥다고 했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죽 가면 원주라는 도회지가 나오고 또 서울이 나온다고 했다.

그러나 아직 어린 우리는 대관령을 쉽게 넘지 못했다. 아니, 넘을 수가 없었다. 우리가 그곳을 넘어야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린 날 우리에게 대관령은 어른들만이 넘는 길이 되고 말았다. 강릉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형이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가기 위해 넘는 산이고, 어른들이 대관령의 배추밭이며 무밭이며 감자밭에 품을 팔러가서 보름이며 한 달간 있다가 오는 곳, 또 동네 형들과 아저씨들이 새로 대처로 직장을 구해 떠나는 길이 바로 대관령이었던 것이다.

더러 서울에 친척집이 있는 아이들이 방학에 그 산을 넘기는 했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 산을 넘어보지 못했다. 그저 궁금한 것만 많은 산, 어른들만 넘는 산, 해가 지는 산이 대관령이었던 것이다.

일상의 모험들, 대관령을 넘다

어린 날, 내 여행의 시작은 바로 대관령을 넘는 일로부터 시작했다. 초등학교 시절엔 그 산을 넘는 꿈만 꾸었고, 정작 그 산을 내 발로 넘었던 것은 중학교 3학년 때의 일이었다. 어느 해 여름 큰비가 와서 대관령의 길이 크게 파였다. 그때만 해도 대관령은 아직 비포장도로였다. 우리 마을 역시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던 시절의 일이었다. 집안 어른들 대신 대관령으로 길닦이 인부(마을 공동으로 하는 일)를 나간 것이었다. 마을 앞까지 나온 트럭을 타고 어른들을 따라간 곳은 대관령 중턱쯤이었다.

그러나 그 날 나는 길닦이 일을 했던 것이 아니라 트럭에서 내린 대관령 산중턱에서부터 대관령 꼭대기까지 걸어 올라가 보았다. 대체 저 산꼭대기엔 뭐가 있는지 도무지 그것이 궁금해 견딜 수가 없던 것이다.

물론 그 위에도 산이 있었다. 산과 같은 밭이 있었고, 작은 촌락들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올라갔던 길은 서쪽으로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날 그곳 꼭대기에서 나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더 걸어가고 싶었지만 뒷일이 감당되지 않았다.

그 날은 대관령 꼭대기에 올라가 보는 것으로 모험을 멈추었지만, 한번 그렇게 내 발로 거기에 올라가 본 다음부터 나는 더욱 우리가 사는 세상의 서쪽이 궁금했다. 고등학교 때 학교를 2년 간 쉬면서 대관령에 올라가 고랭지 채소 농사를 지었던 것도(이때의 이야기는 내 소설 ‘19세’에 거의 그대로 나와 있다.) 그쪽 세계에 대한 참을 수 없는 궁금증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영동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그런 추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내 발로 걸어서 대관령을 한번 넘어보는 것. 그 시절엔 무전 여행이라는 것이 유행했었고, 돈은 없지만 튼튼한 다리를 가지고 있었던 우리는 그 첫걸음을 늘 대관령을 향해 놓았던 것이다.

이제, 숲만 보지 말고 나무를 보라

이제 내 아이가 그때의 나만큼이나 자랐다. 큰 아이는 대학생이고, 작은 아이는 중학생이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일 때 그 아이의 손을 잡고, 내 어린 날과는 반대로 대관령 꼭대기에서부터 강릉 시골 할아버지 집까지 걸어갔던 적이 있었다. 지금 대관령의 그 길은 새로 뚫렸다. 우리가 걸어갔던 길은 ‘구도로’라고 불리는 아흔 아홉 구비의 고갯길이었다.

그 아이가 지금은 그때의 여행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자라면서 이 아이도 나만큼이나 왕성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어서 방학 때마다 늘 여행을 떠나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아이에게 ‘길 위에서 배우는 삶’에 대해 얘기했다.

그리고 또 하나 내가 아이의 여행에 강조했던 것은 ‘나무만 보지 말고 숲을 보라’가 아니라 ‘숲만 보지 말고 나무를 보라’였다.

흔히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또 여행에서 입버릇처럼 말한다. 나무만 보지 말고 숲을 보라. 아마 그것은 작은 것만 보지 말고 큰 것을 보라는 뜻과, 또 부분만 보지 말고 전체를 보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여행에서는 그 반대여야 한다. 대개의 사람들은 여행을 떠나면 나무는 보지 않고 숲만 보고 돌아온다.

경주로 떠나든 설악산으로 떠나든 단지 그곳에 갔었다는 것과 머물다 왔었다는 것에만 의미를 두지 그 도시와 그 산에 널려 있는 세세한 유물들과 자연의 표정들은 제대로 살펴보지 않고 돌아오는 것이다. 그리고 마치 거기에 갔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인 듯 열심히 사진만 찍고 돌아온다. 그건 올바른 여행이 아니다. 여행은 ‘숲’을 보러 떠나는 것이 아니라 ‘나무’를 보러 떠나는 길이다. ‘나무’를 봄으로써 ‘숲’을 보는 여유를 길 위에서 배우는 우리 삶의 또 다른 공부인 것이다.

카메라 없이 떠나는 여행은 어떨까

사람들은 여행을 떠날 때 습관적으로 카메라를 챙긴다. 마치 거기에 갔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듯 열심히 사진을 찍는다.

몇 년 전 아내와 함께 20일 가량 중국 내륙 지역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이런 저런 준비를 하며 카메라만은 일부러 가져가지 않았다. 이제까지 내 경험으로 볼 때 카메라는 여행의 동반자가 아니라 방해꾼이었다. 눈으로 보고 오면 되는 것을 기계에 담아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여행이 목적이라기보다는 여행 중 사진촬영이 목적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물론 전문 사진작가야 그것 자체가 일이니 카메라를 여행의 동반자처럼 챙겨야겠지만 일반 사람들이 여행지에서 무얼 그리 열심히 카메라를 눌러댈 일이 있겠는가. 목적은 오직 하나다. ‘내가 언제 어느 때에 거기에 이렇게 갔었다’ 하는 것을 남들에게 증명해 보이기 위해 조금만 색다른 풍경이 보이면 그 앞에 서서 그토록 열심히 셔터를 눌러대는 것이다.

그래도 카메라가 없으면 아쉬울 것 같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여행지의 풍물과 풍경은 사진으로 담아오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가슴에 담아오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추억을 깊게 하고 여행지의 인상을 깊게 한다. 여행지에서 열심히 카메라를 눌러대는 것은 연속적으로 울려대는 전화를 받으며 책을 읽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게 되면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도 사진으로만 그것을 추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중엔 어쩌면 그것조차 헷갈릴지 모른다. 대체 이 사진을 언제 어디에서 찍었는지조차. 아름다움은 기계에 담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담는 것이다.

사람들은 여행을 가서 열심히 셔터를 눌러댄다. 카메라가 여행을 온 것인지 사람이 여행을 온 것인지 구분가지 않는다. 함께 여행을 가서도 열심히 사진을 찍는 사람에게 나중에 무엇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으면 대개는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말한다. 여행, 하면 우선 카메라부터 떠올리는 이 그릇된 맹신은 대체 언제부터 생긴 풍속일까.

올 여름 카메라 없이 여행을 떠나 보라. 이제까지 어떤 여행보다 의미 깊은 여행이 될 것이다. 여행에도 몰입이 필요하다. 미리 준비한 것만큼만 보게 되고, 몰입한 것만큼 보게 되는 것, 그것이 길 위의 인생, 여행인 것이다.

부디 건강하게 다녀오시길......

이순원의 힘, 강원도의 힘

작가 이순원은 400년 전에 조직된 대동계가 아직도 이어지고, 이 땅에서는 유일하게 촌장제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강원도 산골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19일장으로 지낸 할머니의 장례와 1년 소상, 3년 대상의 유교적 가례를 자연스러운 생활의 일부로 알고 지낸 어린 시절이었다. 그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도 그가 스무 살이나 됐을 무렵의 일이라고 하니, 그가 보고, 듣고, 겪고 자란 모든 것들이 그대로 작품을 위한 살아있는 재료가 될 수 밖에.

‘얼굴’,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 등의 초기작을 통해 냉철하고 분석적인 시각을 보여줬던 그는 ‘은비령’ 이후 ‘수색, 그 물빛 무늬’, ‘그가 걸음을 멈추었을 때’ 등 최근작으로 오면서 점점 더 자신의 고향인 강원도로 회귀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 자신도, 자신의 작품 중 많은 수는 자기의 이름으로 고향이 써주고, 가족과 친척들이 써주고, 동네 사람들과 어린 시절의 동네 친구들이 써준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영화 ‘강원도의 힘’을 본 누군가가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이 ‘강원도의 힘’에는 강원도의 힘이 없었다”며 별로 우습지도 않은 우스개 소리를 하던 생각이 난다. 작가 이순원에 대해 생각하다보니 문득 그 기억이 떠오른다. 영화 ‘강원도의 힘’에 강원도의 힘이 있는지 없는진 몰라도, 작가 이순원에게는 분명 강원도의 힘이 있으니까.

작가 이순원 1957년 강릉출생/1988년 [낮달]로 [문학사상]신인상 수상/1996년 동인문학상 수상/1997년 현대문학상 수상/2000년 이효석문학상 수상/ 창작집 [그여름의 꽃게] [얼굴] [말을 찾아서] [그가 걸음을 멈추었을 때], 장편소설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 [수색 그 물빛 무늬] [아들과 함께 걷는길] [19세] 등

진행/박연정 기자  사진/전영기

화제의 추천 정보

    Ladies' Exclusive

    Ladies' Exclusive
    TOP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