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게릭병 5년째 투병, 마약퇴치 위한 재활기원 국토순례 나선 장후용 목사

루게릭병 5년째 투병, 마약퇴치 위한 재활기원 국토순례 나선 장후용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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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유명한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이 물리학에 전념하게 된 것은 루게릭병이 발병된 이후라고 한다. 목동 나눔교회 담임 목사인 장후용 목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자신에게 고통이 찾아왔을 때, 비로소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이 눈에 보이게 됐다.

루게릭 진단 이후가 ‘진짜 삶’

5월 26일, 20명의 사람들이 장기간 여행 떠날 채비를 갖추고 커다란 플랜카드 앞으로 모여들었다. 플랜카드에 적힌 글자는 ‘마약중독회복자와 루게릭 환우의 회복 재활기원 국토순례’. 이 국토순례의 1차 경기도 여정이 끝나고 강원도 여정이 시작되던 첫 날, 이 여정을 준비하고 이끌어 가고 있는, 나눔교회의 목사이자 마약퇴치운동본부 송천 쉼터 팀장인 장후용 목사를 만났다. 장후용 목사 본인도 98년 루게릭병 진단을 받고 5년째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목동 강서고등학교 앞에 자리한 나눔심리상담소는 입구에서부터 연분홍 계단에 칸칸이 놓인 화분이 아늑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계단을 올라서서 들여다본 상담소 내부는 7~8명의 사람들이 둘러 앉아 얘기를 나눌 수 있을 정도의 테이블로 꽉 차 있었다. 책상위의 꽃꽂이며, 그만그만하니 사람 얼굴 높이에 못 미치는 책꽂이들. 좁은 공간, 세련되지 않은 아기자기함이 주는 편안함 덕분에 나른한 느낌까지 들었다.

장후용 목사가 뒤편 계단 쪽에서 올라왔다. 깨끗한 평상복 차림에 눈가에는 웃음 때문에 익숙해진 주름을 잡으며 인사를 건네 왔다.

“휠체어에 타고 굉장히 불편한 모습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오시지 않으셨어요? 대부분의 루게릭 환자들은 그런 모습이거든요. 멀쩡한 제 모습을 보고 놀라시는 분들도 종종 있습니다.”

그는 조금 차분한 분위기이긴 했지만 아주 건강해 보였고 활기 넘쳤으며 건장했다. 테이블에 마주 앉으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한꺼번에 쏟아놓았다. 특히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은 국토순례단에 관한 이야기. 마약퇴치 활동을 홍보하고 일반인 차원 마약류 복용 예방 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계획된 이번 순례에는 전국을 돌며 8월까지 진행될 예정이라고 했다. 그 자신도 이 날 이들 순례단에 합류하기 위해 강원도로 떠날 일정을 잡아놓고 있었다.

그가 특별히 마약과 루게릭병을 위해 활동하는 것은 자신의 지나온 삶의 자취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어린시절 마약류의 복용으로 건강하지 못한 시간들을 보내기도 했고, 한참 일에 묻혀있을 때 루게릭 진단을 받았다. 그런 풍파 속에서 그의 삶이 풍요를 찾은 것은 루게릭 진단을 받고 얼마 안되서였다.

“처음엔 원망과 분노가 컸었죠.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오히려 진짜 인생이 시작된 기분입니다. 제 고통을 통해서 살아 있는 동안 해야 할 일들을 더 분명히 깨닫게 됐고, 그 일들을 기꺼운 마음으로 열심히 실천할 수 있게 된 것 같네요.”

루게릭 진단을 받을 98년 당시 그는 지금과 같은 목사가 아니었다. 의료기기 회사에서 일에만 푹 파묻혀서 지내던 시절. 젊은 아내보다도, 어린 아들 보다도 회사와 일이 우선이었던 때였다. 그가 처음 자각증세를 느낀 것은 95년. 지사 설립을 위해 대구에서 근무를 하고 있던 때였다. 지사장이라는 막중한 임무와 과도한 스트레스로 피곤에 지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하루는 왼손으로 핸드폰을 쥔 채 엄지손가락으로 번호판을 누르려고 하고 있었는데, 순간적으로 핸드폰을 누르려던 엄지손가락이 움직여지지 않더니 이내 핸드폰이 손에서 떨어져 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첫 번째 외적인 증세였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겨버렸다. 병원을 찾아도 고통스러운 근육 검사만 계속될 뿐 병명도 나오질 않았다. 그리고 그는 다시 일에 파묻혔다. 그 일은 까맣게 잊어버리게 됐다.

2년여가 지나고 서울 본사에서 상무이사로의 승진 발령을 기다리고 있던 중 다시 자각증상이 나타났다. 손님들과 식사를 할 때였다. 잡고 있던 젓가락이 손에서 빠져나가는데도 그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숙여 잡으려고 했지만 그것조차 뜻대로 되지 않았다. 급기야 쓰러지는 일까지 있었다. 처음 찾아간 강북삼성병원에서는 ‘운동신경근 장애’인 것 같다며 그에게 서울대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아볼 것을 권했다. 이곳에서 그는 루게릭 진단을 받았다. 믿기지가 않아서 재검사를 했지만 역시 결과는 똑같았다.

그래도 믿을 수 없었던 그는 모든 검사자료를 독일의 한 병원에 보내서 의뢰를 했다. 2개월 후에 날아온 결과는 역시 루게릭이었다. 루게릭이라고 불리는 ‘근위축성 측생경화증’은 뇌와 척추의 이상으로 근육이 무력화되고 상실되는 질병으로 보통 진단을 받고 난 후 5년 안팎밖에 살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인 불치병.

회사에선 그의 병명을 알게 되자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그를 퇴사시켰다. 건강도 돌보지 않고 몸 바쳐 일했던 회사지만 정작 그가 어려운 순간에는 매섭게 그를 내쳤던 것이다. 그에게 남은 것은 회사와 세상에 대한 원망과 미움뿐이었다. 아직 어린 아들과 아내에 대한 걱정도 그를 더욱 막막하게만 만들었다. 그 때도 역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그는 원망 속에서도 자신이 이런 병에 걸린 것은 분명 하나님의 뜻이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금식 기도에 들어갔다.

“신앙이 없는 분들은 아마 이해하기가 힘들 겁니다. 금식 기도 중에 저는 하나님께 답을 들었죠. 기도를 하는 중에 신탁을 체험했습니다. 순간의 경험이라고 생각했는데 눈을 떠보니 7시간이 지났더군요.”

그가 금식 기도를 한 것은 2월, 그리고 3월이 되자 그는 바로 신학대학으로 향했다.

“아빠를 위해서 기도할게”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의 병세는 더디게 악화되었다. 98년 루게릭 진단을 받고 입원해 있을 당시 함께 병실에 있었던 두 사람은 이미 하늘나라로 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런데 그는 아직 건강하고, 일상생활을 하는데도 거의 지장이 없었다. 힘든 순간이 있다면 앞으로 가족들과의 미래를 꿈꿀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 그리고 그들에게 경제적인 여유도 제공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이다.

하지만 이제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은 누구보다 의젓하고 아빠를 잘 이해해주서, 어쩔 땐 그 때문에 더욱 마음 아프기만 하다.

“아빠가 어떤 병에 걸렸는지 잘 알고 있어요. 다만 아직 어리기 때문에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자세히 이해하지 못하겠죠. 엄마와 아빠가 늦게 집에 들어가는 날이면 저녁밥을 지어놓고 기다리기도 합니다. 김포 큰 아버지 집에 놀러 갔을 때 였어요. 동네 놀이터에 갔는데 아이들이 처음 보는 얼굴이라 텃새를 심하게 했나보더군요. 아이가 시무룩할까봐 다독여주려는데 이렇게 말을 하는 겁니다. ‘아빠, 저 아이들은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 못해서 저러는 거야.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법을 모르는 거야, 그치?’ 요즘 아이는 자라서 목사가 되겠다고 합니다. 아버지인 저의 모습을 기꺼이 받아들여주는 아들의 모습에서 많은 힘을 얻게 됩니다.”

그 날 아침에도 강원도에 보름 정도 다녀와야 한다는 장목사의 말에 아들은 든든한 눈빛으로 그에게 말했다. “아빠 몸조심해서 다녀와. 아빠를 위해서 기도할게.”

그의 부인은 그와 같은 마약퇴치운동본부 손천 쉼터에서 재활 치료 프로그램의 강사로 일하고 있다. 결혼 전부터 오랜 신학공부를 해온 그녀는 장목사 이상으로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다.

“아프기 전이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저를 대해주는 아내에게 가장 고맙습니다. 집안의 여러 가지 일을 언제나 저에게 부탁해주죠. 겉으로는 전혀 힘들어하는 내색이 없지만 때론 밤중에 남몰래 깨어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있는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그는 자신의 삶이 얼마나 남았는지 지금은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이 신탁 받은 일, 마약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만 생각하며 살고 있다. 가족들을 생각하면 가슴 아프기만 하지만 루게릭이란 병마가 찾아오면서 그는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다.

글/김영인(프리랜서)  사진/신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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