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체력의 극한을 시험하는 철인3종 경기. 경남 통영시 한산면 일대에서 벌어진 ‘2003 국제트라이애슬론 대회’에서 오상미 선수가 여자 일반부 경기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체계적 훈련 없이 혼자만의 외로운 단련으로 ‘철의 여인’이 된 그녀를 경기 현장에서 만났다.

지난 6월 8일, 경남 통영 한산도에서 열린 2003 국제트라이애슬론 대회. 사이클 및 마라톤 완주길이는 왕복 10㎞씩 총 20㎞다. 선수들이 마라톤 경주를 하고 있는 동안 옆에서 함께 달릴 수 있다는 사실이 우선 흥미진진했다. 페달을 밟는 동안 선수들과 얘기도 하고 그들의 표정을 찬찬히 살필 수 있었다.
한산도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는 기분은 말 그대로 날아갈 듯했다. 30℃를 웃도는 찌는 듯한 더위에 아스팔트는 이글거렸지만, 한산도 앞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 덕분에 뜨거운 아스팔트 위를 달리기에도 충분히 시원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하늘을 이고 있는 푸른 바다. 주변 풍광을 온 몸으로 느끼면서 달리는 모습은 영화에서나 연출되는 듯한 멋진 장면이었다. 달리는 선수들의 진지한 표정과 선수들을 응원하러 나온 한산도 주민들의 순박한 얼굴들이 풍경만큼이나 정겹다.
그러나 자연과 인간의 멋진 조화를 만끽하는 것도 잠시. 드디어 오르막길이 보였다. 충무 여객선 터미널 근처에서 빌린 자전거로는 턱도 없었다. 수영(2㎞)과 사이클(20㎞) 코스를 마친 뒤 달리고 있는 선수들이 후들거리는 다리로 땅을 내딛고 있는 동안 기자는 자전거의 두발에 더 기대어 네 발을 달리면서도 그들을 따라잡기엔 역부족이었다. 이미 근육 곳곳이 팽팽하게 절여왔다. 하는 수 없이 내려서 자전거를 끌고 가는 수밖에. 앞에 보이던 47번 선수는 벌써 보이지 않았다.
5㎞쯤 달렸을까. 오르막과 내리막이 혼재된 난코스. 정수리에 수직으로 꽂히는 햇살을 피할 그늘도 없었다. 이쯤되니 ‘무엇 때문에 이런 힘들 경기를 할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자에게는 우승자를 만나 취재해야한다는 의무감이라도 있다고 하지만, 대회에 참가한 461명의 일반인들은 왜 사서 고생을 할까 말이다. 포기하고 응급차에 몸을 실어 볼까하는 생각도 여러 차례 했다. 하지만, 땀을 뻘뻘 흘리며 벌겋게 상기된 얼굴이 안됐는지 생수와 김밥을 건네주는 주민들의 따뜻한 인정으로 마음을 추스리며 길을 재촉했다.
1㎞를 앞두고 대회 본부석이 보였다.
사이클 코스의 반을 돌았을 뿐인데 어느새 ‘드디어 해냈다’며 스스로 대견해 하고 있었다. 우승자부터 찾았다. ‘철인’이라는 단어가 주는 위압감은 우승자를 보기 전부터 선입견을 만들고 있었다. 벌어진 어깨, 울퉁불퉁한 팔과 다리, 터프한 스타일... 예상은 빗나갔다. 올 8월 졸업을 앞둔 서울여대 체육학과 99학번 오상미씨(28). 3시간4분27초 여자 일반부 정상. 키 163cm, 몸무게 54kg의 아담한 몸매의 그녀는 근육질도 터프한 스타일도 아니었다. 42㎞를 완주하고 나온 사람답지 않게 지친 기색도 없이 마냥 웃고 있던 그녀는 평범한 여대생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부드러운 모습 속에 만만찮은 내공이 숨어 있음을 곧 눈치챌 수 있었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경기’를 마친 오씨는 5급 청각장애인. 10㎞를 힘들게 달려 온 그녀에게 경외감이 일어, “수고했어요. 많이 힘들었죠”라며 손을 덥썩 잡았다. 인사를 하고 나자 오상미씨는 대뜸 “그럼 친구해요. 나, 친구가 별로 없어요”라며 마냥 신나했다.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그녀의 손을 잡고 편하게 얘기를 나눌 호젓한 곳을 찾았다.

오상미씨가 처음 트라이애슬론을 접한 때는 1987년. 당시 중학생이던 그녀는 아버지가 철인 3종을 완주할 때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
“아버지가 참 멋져 보였어요. 그래서 철인경기가 무척 매력적이었죠.”
87년부터 8년 간 아버지와 함께 아마추어대회에만 나갔다. 94년이 돼서야 처녀 출전하게 된 오씨는 국내외 트라이애슬론 대회에 60여 차례나 참가, 수차례 우승 기록을 갖고 있다. 94년 이후 4년 간 국가대표로 뛰었고 99년 제주도 `아이언맨’ 대회(수영 3.5㎞, 사이클 180.2㎞, 마라톤 42.195㎞)에서 11시간 3분 기록으로 `제주 아이언맨’에 등극하기도 했다. 이 때 그녀가 세운 기록은 4년째 철옹성을 지키고 있다.
국가대표 시절 아시아선수권 대회에서 상위 20위권 내에 꾸준히 랭크됐던 트라이애슬론 유망주. 그러나 오씨는 남모르는 아픔을 간직하고 있었다. 네 살 때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면서 머리를 다치는 바람에 보청기를 착용해야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청각장애를 갖게 된 것. 하지만 세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그녀는 의사소통에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평소에 보청기를 끼고 다니지도 않을 정도로 어느 정도 들리지만 주변인들의 편견어린 시선은 그녀를 아프게 했다. 오씨에게 더 큰 괴로움은 또 다른데 있었다. 철저한 외로움 속에 오직 혼자서 철인경기를 준비해야 한다는 점이다. 소속팀도 후원자도 없었다. 국가대표 시절에도 인기종목에서 소외돼 혼자 경기를 준비해 참가해야 했다.
“동네 수영장과 집 근처 산책길에서 연습한 게 전부였어요. 체계적인 훈련을 받아 본적이 없어요. 그랬다면 세계대회에서 메달을 따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을 텐데...”
트라이애슬론 전문선수로 크기에는 국내 여건이 너무도 열악했다. 올해 국내 첫 트라이애슬론 월드컵을 개최한 트라이애슬론 연맹에 도움의 손길을 뻗어봤지만 `기다려 봐라’는 답변 뿐이었다. 이번 대회 참석을 위해서도 그녀는 동인천에서 통영까지 혼자 왔다. 사이클을 넣은 가방을 어깨에 매고 통영까지 물어 물어 고속버스에 몸을 싣고 이틀 전에 도착해 혼자서 코스를 살폈다.
지난해 5월엔 사이클 연습 도중 길거리에서 마주 오는 차를 피하다 넘어져 왼쪽 복숭아 뼈가 으스러지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3개월 간 병상에 눕는 바람에 연습은커녕 학교도 휴학했다. 국제대회를 앞두고 철심을 3개나 박는 등 그녀가 겪은 좌절감은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인터뷰 도중 비치는 그녀의 표정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한물 갔다는 수군거림을 들을 땐 죽고 싶었어요. 보란 듯이 일어서서 보여주겠다는 결심을 했죠.”
공백기간이 길어서 사실 힘들기도 했다. 집이 있는 동인천에서부터 태릉에 있는 학교까지 2시간이 넘는 시간을 거리에 쏟으며 연습할 수 있었던 시간은 하루에 고작 3시간. 그것도 잘 닦여진 아스팔트가 아닌 울퉁불퉁한 동네 주변을 몇 바퀴 도는 게 전부였다. 뼈를 깎는 고통을 느꼈다는 오상미씨에게 트라이애슬론의 의미는 무엇일까.
“마약과도 같아요. 한번 해보시면 아실 거예요. 경기 도중엔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하는 생각도 들고, 경기가 끝나면 ‘다신 하지 말아야지’하면서 고개를 흔들죠. 하지만 힘든 만큼 더 빠져 드는 게 트라이애슬론이에요. 결승점에 이르면 해방감을 느끼면서 `죽을 때까지 할 수밖에 없겠구나’하고 깨닫게 돼요.”
진정한 싸움은 역시 또 다른 자신과의 싸움. 어느 순간 마주하게 되는 모습은 다름 아닌 자신 속의 자신이라는 것을 그녀는 그 어린 14살의 나이에 이미 깨달았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회의는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고통과 함께 거친 숨결에 담아 날려 버렸다.
오상미씨의 꿈은 트라이애슬론 월드컵 출전이다. 체계적인 훈련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는 호주에 가서 공부도 하고 싶다.
“엄청난 비용의 학비도 그렇고, 걸림돌이 많아요. 그래도 꿈이 있으면 길이 있겠죠. 남자 친구요? 트라이애슬론에 미쳐서 주변을 돌아볼 시간이 없었었는 걸요. 힘들지만 저, 쓰러져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 날 거예요. 꿈을 놓지 않을 거예요”
트라이애슬론이란?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운동경기로 꼽히는 종목으로, 철인3종경기로 불리기도 한다. 수영, 사이클, 마라톤을 순차적으로 하는 이 경기는 고도의 지구력을 요한다. 수영 3.9㎞, 사이클 180.2㎞, 마라톤 42.195㎞ 등 모두 226.3㎞를 달리며 규정시간은 17시간. 완주 자에게는 ‘철인(iron man)’이라는 칭호를 준다. 경기단체마다 대회규정도 다르고 종목마다 규정시간이 있어 제시간 내에 들어오지 못하면 실격 처리된다.
1990년 세계연맹(ITU)이 창립됐고 이를 계기로 폭발적 인기를 얻어 현재 130개국에 1천만명의 동호인이 있다. 철인3종 경기는 2000년 시드니올림픽 개막경기로 열려 개막식 다음으로 많은 관중을 동원했다. 올림픽종목은 수영 1.5km 사이클 40km 달리기 10km로 도합 51.5km의 코스다.
글/심희정 기자(경향신문 체육부) 사진/경향신문 포토뱅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