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명이 싸움쟁이! 아이들이 공부하는데 딴죽 걸면 백번 천번 싸워야죠”
한국전 전후 이 땅의 아이들을 보살핀 이들이 있었다. 생김새와 말이 달랐지만 사랑만은 느낄수 있었다.
이제 지구촌 곳곳에서 받은 사랑을 베푸는 이들이 있다. 멕시코에서 ‘소녀들의 집’을 운영하는 정말지 수녀도 그 중 하나다. 배고픈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싸움쟁이이자 그들의 어머니인 수녀님의 사랑 속으로.
허허벌판을 최고의 교육시설로 만든 힘은 사랑!
삶은 진정 투쟁인가 보다. 그것이 거스르기 힘든 벽이라면 더더욱. 인류가 극복해야 할 철옹성은 어찌보면 가난이다. 돈이야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다지만, 가난한 이의 주머니는 언제나 푸념과 한숨만이 가득하다. 희망의 동전은 애초부터 사치였던 것처럼. 정말지 수녀(39)는 빈부격차가 심한 멕시코에서 빈민가 여자아이들을 모아 무료로 교육을 시키는 ‘소녀들의 집(비야 데 로스 니뇨스)’을 운영하고 있다. 우리나라 각지에 있는 ‘소년의 집’ 운동을 멕시코에서 벌이고 있는 것이다.
소녀들의 집은 지지리도 못살던 1964년 당시 한국 내 ‘마리아 수녀회’의 설립자이기도 한 고(故) 슈왈츠 신부가 부산에 고아들을 위한 ‘소년의 집’을 설립한 게 그 출발점이다. 지난 1990년 멕시코에 소녀들의 집을 설립하자 정말지 수녀도 슈왈츠 신부를 따라 멕시코로 갔다. 한국에 이어 필리핀에서 고아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펼친 슈왈츠 신부가 1992년 별세하면서 정 수녀는 원장직을 맡게 됐고 이후 온갖 시련을 헤쳐왔다. 40여 년, 우리나라 어린이들이 받은 은혜를 우리나라 수녀들이 멕시코 찰코시에서 보답하고 있는 셈이다.
멕시코에서도 가난한 지역으로 유명했던 이곳은 1990년만 해도 허허벌판이었고 학교 건물도 1채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은 총 10만 평의 규모에 각종 첨단 교육시설에다 4채의 건물이 들어섰으며 학생 수도 4천 명을 넘는다.
얼마 전 자신이 가르치는 멕시코 소녀들과 함께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정말지 수녀도 마찬가지다. 가난의 멍에를 쓴 이들을 위해 치열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오죽했으면 ‘싸움쟁이(Peleonera)’란 별명을 얻었을라고.
이들에 대한 사랑이 각별한 정 수녀는 지난 1997년 현지의 찰코시에서 이 학교가 점유하고 있는 땅에 대한 토지세로 30만 페소(약 3억6천만원)를 내라는 통고를 받고 득달같이 시장을 찾아갔다. 이 만큼의 세금을 낸다면 학교 운영조차 어려워질 상황이라 앞뒤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정 수녀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시장과, 두 팔을 걷어붙이고 설득과 협박(?)을 반복하며 물고 늘어지는 수녀의 설전은 결국 정말지 수녀의 승리로 끝났다. 이 때부터 그런 별명을 갖게 된 것이다.
“여기 사람들은 정부에서 하라고 하면 설사 그것이 부당하더라도 그냥 물러서는데 전 그렇게 할 수 없더라고요. 못 먹고 못 사는 아이들이 공부해보겠다고 모였는데, 그 빈민가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물러서면 안 되죠. 그들이 뭐라고 불러도 좋아요. 나의 작은 노력이 멕시코의 가난한 아이들을 훌륭한 사회인으로 키우는 데 일조한다면 그런 말을 듣는 게 뭐 그리 대수겠어요. 백 번 천 번 그런 말을 들어도 싸워야죠.”
그러나 실제로는 어머니로 불린다. 13년째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는 정 수녀를 소녀들은 ‘마드레(엄마)’라고 부른다. 멕시코시티에서 1시간여 떨어진 찰코 수녀원을 책임지고 있는 정 수녀는 이 기간 동안 1만 명이 넘는 중학교 졸업생이 이곳을 거쳐 갔다. 얼마 전에는 처음으로 2백60명의 고등학교 졸업생을 배출했다.
“같이 놀아주면서 대화도 하고, 뜨개질이나 바느질도 가르칩니다. 비뚤어지기 쉬운 환경에서 살았던 탓인지 소녀들이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끼는 것 같아요. 가난하다고 더럽고, 무질서하게 살면 안 되잖아요. 비록 돈은 없지만 희망과 꿈을 갖고, 반듯이 살아갈 수 있는 겁니다. 그걸 빈민 가정 아이들에게 가르칩니다.”
꿈이 없던 아이들에게 꿈을 가르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고픈 배를 움켜쥐고 꿈을 얘기하는 것은 공허하기 이를 데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 수녀의 노력으로 그들은 꿈을 얘기한다. ‘가난한 사람들도 최고의 시설에서 최고의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하고 싶다’는 꿈은 거지반 이룬 셈이다. 꿈은 바이러스와도 같다. 또한 세포분열을 통해 희망으로 성장한다. 심지어 그 학교 졸업식에 대통령의 참석이 논의될 정도로 유명세를 얻고 있으며 실제로도 지난해엔 대통령 영부인이 졸업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복지부 장관은 일 년에 수차례씩 들러 학교 현황을 돌아본다. 정 수녀는 이제 멕시코에서는 유명인사다. 폭스 멕시코 대통령과도 친분이 돈독하고, 대통령 비서실과는 언제든지 통화할 수 있는 ‘핫 라인’도 있다.
정 수녀는 신입생을 모집하기 위해 매년 1월만 되면 전국을 돈다. 가난하면서도 배움의 열정이 있는 아이들을 찾아내기 위해서다. 요즘 들어선 훌륭한 교육시설과 학업성취도도 지역 내 최고인 것으로 확인되면서 시장도 자녀들을 입학시키려고 안간힘을 쓸 정도 소녀들의 집에 대한 명성이 나면서 이제는 경쟁률이 4대 1을 넘는다고 한다.
이렇게 소녀의 집이 자리를 잡은 것은 정 수녀 등 3명의 한국 수녀들의 헌신과 몇 년째 계속해서 장학금을 주는 등 도움을 아끼지 않고 있는 LG전자 멕시코법인의 노력도 빼놓을 수 없다. 현지 교민들도 정성을 모아 전달한다. 한인 사회의 단결도 더욱 공고하게 됐다. 결국 현지인을 돕기 위해 시작한 일이 우리를 돕는 기현상이 자연스레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얼마 전 한국을 다녀갔다. 1백20명의 찰코 재학생 합주·합창단원들이 한국에서 열흘간 일정으로 공연활동을 펼친 것이다. 멕시코 전통춤과 음악뿐만 아니라 우리 대중가요도 선보였다. 부산 소년의 집 오케스트라가 아이들에게 자긍심을 갖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듯이 멕시코 소녀의 집 합주·합창단도 이런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직접 건반과 드럼, 콘트라베이스, 만돌린, 타악기를 연주하며 합창하며 율동이 들어가 발랄한 끼를 느끼게 한다. 이들은 이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멕시코 방문 공연, 멕시코 대통령궁 공연, 멕시코 정부기관 홍보용 로고송 녹음 등으로 현지에서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천사의 합창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꿈을 품은 가슴에 희망을 얘기하는 입을 통해 바이러스처럼 번지는 환한 미소로 다가온다. 정 수녀의 말처럼 “희망이 없던 아이들이 꿈과 자신감을 갖고 우리 학교를 떠날 때가 가장 큰 보람으로 느껴진다”는 말처럼 희망을 얘기하고 희망을 싹틔우는 그런 날이 눈앞에 펼쳐지기를 바라며.
글 / 강석봉 기자 사진 / LG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