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움의 손길 필요한 곳이라면 배낭 하나 둘러메고 당장이라도 떠나야죠”
스물 여덟의 청년 이승복씨는 귀중한 이십대의 대부분을 자원봉사 활동에 쏟아 부어왔다. 세계 곳곳을 다니며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 속에서 기꺼이 소통해온 이승복씨. 편하고 안정된 길 대신 불편하지만 보람된 길을 찾아 나선 그의 여정엔 젊은이다운 패기와 세상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동행한다.
예쁘고 잘생긴 생김새보다 ‘좋은 표정’을 가진 이들이 더 멋있어 보일 때가 많다. 아름다운 외모는 머지 않아 익숙하고 질리지만, 아름다운 표정은 볼 때마다 새롭고 기분 좋다. 타인에게 힘이 되어 주며 그 관계 속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이라면 분명 ‘좋은 표정’을 선물로 받을 것이다. 욕심과 이기심을 덜어내면 그만큼 찡그릴 일도 줄어들 테니.
이승복씨(28)가 그렇다. 가식 없는 웃음과 환한 표정이 노란 얼굴의 스마일 마크를 연상시킨다. 그런 그에게 썩 어울릴 만한 별명이 하나 있다. ‘박카스 청년’. 모난 데 없이 둥글면서도 ‘지킬 건 지키는’ 소신과 패기가 엿보였다고 할까.
# 미국에서,
열두 살에 미국 이민, UC 버클리대 기계공학과 졸업
이승복씨가 본격적으로 자원봉사에 관심을 갖게 된 건 1997년 유럽 배낭여행길에 올랐을 때부터다. 스위스 루체른을 여행하던 어느 날, 여행중 만난 한국 대학생이 사고로 머리를 다쳤다. 만리 타국에서 위험에 처한 그의 곁을 떠날 수 없어 꼬박 2주 동안 옆에서 지키며 돌봐주었다. 얼마 후, 독일을 돌아 다시 루체른에 도착했을 때 심한 복통을 호소하는 한 여대생 여행객을 또 만났다. 급히 병원으로 데리고 갔더니 담석증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그때도 마찬가지로 퇴원 때까지 그 학생을 간호했다. 자신의 일정에는 적잖은 차질이 빚어졌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뿌듯함과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치고 이민을 떠난 승복씨는 당시 UC 버클리대 기계공학과에 재학중이었다. 소중한 경험을 안고 유럽 여행에서 돌아온 그는 그때부터 남을 돕는 일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학기중에는 LA에 있는 ‘노숙자의 집’에서 주방 일을 도왔어요. 방학 땐 한국에 들어와 보육원과 장애인 시설을 찾아 봉사활동을 자원했지요. 세계 자원봉사자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워크 캠프’라는 것이 있는데 보통 10주 정도 계속됩니다. 저는 98년부터 3년 연속 참여했죠. 슬로바키아에서는 국립공원을 가꾸는 일에 참여했고, 폴란드에서는 영어를 가르쳤어요. 헝가리 캠프에서는 노숙자들을 위한 시설에서 페인트 칠을 하는 등 허드렛일을 하며 많은 경험을 했습니다. 힘들기도 하지만 의미 있는 일에 기여할 수 있다는 건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이지요.”
각종 자원봉사 활동에 참여하면서 그는 자신의 적성을 새롭게 깨달았다. 전공 공부보다는 곳곳을 다니며 사람들을 돕는 일이 훨씬 더 의미 있게 느껴졌고, 그 속에서 뿌듯한 행복감도 맛봤다. 4학년이 되던 99년에는 평화봉사단(Peace Corps)에 지원해 단원으로 선발됐다. 평화봉사단은 개발도상국의 교육, 농업, 무역, 기술 향상과 삶의 질 개선 등을 위해 미국 정부가 자국의 청년들을 교육시켜 해당국에 파견하는 봉사단체로, 현재 69개국에서 6천7백여 명이 활동하고 있다. 평화봉사단원이 되기 위해서는 학사 혹은 해당분야 5년 이상의 경험이 필요하고, 다양한 자원봉사 경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직장 상사와 봉사활동 단체, 친구 등으로부터 최소 3장 이상의 추천서를 받아야 함은 물론 철저한 건강 검진도 통과해야 한다. 평화봉사단의 임기는 총 2년 3개월인데, 처음 3개월은 파견 전 훈련기간이다.
# 네팔에서,
교육 낙후한 산골 오지 마을에서 수학·영어 교사로 봉사
대학 졸업 후 2000년 8월, 이승복씨는 네팔로 떠났다. 그가 파견된 곳은 테헤라툼의 작은 산골 마을. 하루에 한 번 버스가 들어가고 마을에서 버스 정류장까지 3시간은 족히 걸어야 하는 외딴 곳이었다. 유엔이 지정한 ‘지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인 네팔. 하물며 산골 마을이니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는 오지 중의 오지였다.
그는 공학을 전공했다는 특성을 살려 초등학교 수학 교사로 발령받았다. 능통한 영어 실력을 살려 이내 영어 교사도 겸하게 되었다. 네팔어는 우리말과 어순이 일치하기 때문에 비교적 빨리 익힐 수 있었다. 몇 개월 후부터는 어렵지 않게 네팔어로 수업을 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정작 그를 힘들게 했던 건 언어가 아니라 그곳 사람들의 빈약한 교육 의지였다. 학부모나 학생은 물론이고 가르치는 교사마저도 교육에 별뜻이 없어 보였다. 수업은 거의 시간 때우기 식으로 진행됐고, 학생들의 피드백을 끌어내기 위한 숙제조차 전혀 없었다.
“처음엔 그야말로 어리둥절했죠. 아이들이 결석을 해서 집에 찾아가 봤더니 추수철이라 학교를 올 수 없다는 거예요. 농사일이 공부보다 우선이라는 거지요. 그도 그럴 것이 그곳 사람들은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하는 삶이거든요. 좁은 면적에 계단식으로 쌓아올린 농지에다, 현대식 농사법이 전혀 도입되지 않아 모든 과정이 철저히 수작업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요. 당연히 막대한 노동량이 필요한 거죠. 그런 상황을 보고나니 차마 아이를 야단칠 수 없더군요.”
그곳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고 나니 교육 시스템 자체를 바꾸겠다는 무모한 꿈 대신 최대한 가능한 범위 내에서 양질의 교육을 해야겠다는 절충안을 얻었다. 수업에 들어가기 전 꼼꼼하게 수업계획안을 작성했고, 배운 내용에 대해서 숙제를 내주었다. 생전 숙제라는 것을 받아본 적이 없던 아이들은 오히려 신나했다. 숙제 검사는 꼼꼼하고 철저하게 했다. 잘 한 학생에게는 도장도 찍어주고 격려 글도 남겨주었다. 처음에는 어쩔 줄 몰라하며 숙제를 감당하지 못했던 아이들도 도장받는 재미, 스티커받는 재미에 더욱 열성을 보였다. 과중한 수업 시간과 과제 체크로 온종일 쉴 틈 없이 일이 쌓여도 행복해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그에게 보람과 뿌듯함을 주었다. 아이들 개개인에 대한 자료를 만들어 학생 카드도 만들고, 시내에 나가 배구공과 네트를 사와서 방과 후에 배구 수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수업에 빠진 아이들도 배구하는 날이면 늦게라도 학교에 올 정도로 아이들은 배구를 좋아했다.
“일 년 정도 지났을 때 봉사단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세미나가 수도인 카트만두에서 있었어요. 아이들에게 찍어줬던 사진을 현상하기 위해 카메라와 간단한 세면도구를 챙겨서 시내로 나왔죠. 일주일 일정이니 그저 간단한 배낭 하나만 메고 나왔어요. 그런데 그 사이에 공산주의 혁명을 주도하는 마오쩌뚱주의 반군들이 내전을 일으켰어요. 제가 있던 테헤라툼까지 그 세력이 뻗는 바람에 본부로부터 복귀 금지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아이들에게 전해줄 사진만 바라보며 하루, 일주일, 한 달… 결국 그 후 일 년 동안 마을로 돌아갈 수 없었어요.”
나머지 일 년의 임기는 북쪽 산악지대인 무스탕에 있는 학교에서 보냈다. 그리고 2년 3개월의 봉사단원 임기를 마치던 2002년 11월에야 자유로운 신분으로 다시 테헤라툼 산골 마을을 찾을 수 있었다.
“제 하숙방을 먼저 찾아갔죠. 솔직히 일 년간이나 비워두었으니 제 물건들도 사람들이 알아서 가져갔거나 처리했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제가 나올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그 상태 그대로 남아 있더군요. 제가 꼭 다시 돌아올 거라고 생각한 거죠. 순간 마음이 울컥해지면서 순수한 그 마음들이 너무나 고맙게 느껴졌습니다.”
# 팔레스타인에서,
전쟁으로 얼룩진 곳에 한국의 문화를 소개하는 전시회 개최
지난 12월 8일, 그는 2주간의 팔레스타인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다. 중동의 화약고로 불리는 그곳에서 그는 한국문화를 알리는 조촐한 전시회를 마련했다. ‘워크 캠프’에서 알게 된 친구 김지은씨의 제안으로 시작된 일이었다. 지은씨는 자원봉사 단체인 ‘프로젝트 호프(Project Hope)’와 연계해 팔레스타인 나블로스시에 있는 안 나자흐 대학과 인연을 맺었는데 그런 인연으로 대학 측과 합의하에 한국문화 전을 갖기로 했던 것이다. 지은씨는 승복씨에게 동참해달라고 부탁했고 그는 기꺼이 의미있는 일에 참여했다.
“문화관광부, 국정홍보처 등에 자료를 요청하는 등 떠나기 2주 전부터 부지런히 전시회 프로그램을 짰어요. 동양화, 서예, 탈, 젓가락, 연,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풍경 사진들, 태권도, 한복, 고유 음식 등 한국 문화 전반에 대한 소개를 준비했습니다. 김치·고추장·약과·유과도 가져갔는데, 특히 약과는 그곳에서도 인기가 많았답니다.(웃음) 한국 영화를 소개하고 싶어서 ‘집으로’ ‘JSA’ ‘엽기적인 그녀’ 등 DVD도 챙겨 갔어요. 아쉽게도 현지의 장비 상태가 좋지 않아 영화 상영은 하지 못했지만.”
안 나자흐 대학이 있는 나블로스시로 들어가기까지 검문이 굉장히 까다로웠다. 2000년에 있었던 2차 인티파다(팔레스타인의 민중봉기) 이후 이스라엘의 감시와 통제가 삼엄해졌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검문을 통과하기 위해 두 사람은 연인 행세를 해야 했고, 입국 이유도 성지순례라고 말해야 했다. 출국할 때도 그동안의 행적에 대해 약 1시간 정도 따로 검문을 받았는데, 이를 위해 떠나기 몇 일 전부터 가짜 일정을 짜서 말을 맞췄을 정도였다. 숙소에 머무를 때도 이스라엘 군인들이 시시때때로 검문을 나와 살벌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런 와중에 전시회를 두 곳에서 열었다. 안 나자흐 대학 도서관과 팔레스타인 난민촌인 발라타 캠프 지역에서였다.
발라타 캠프에 사는 아이들은 열악한 교육 환경에서 보고 듣는 것이라곤 온통 전쟁에 관한 것뿐이었다. 그런 아이들에게 잠깐이라도 전쟁이 아닌 다른 세상과 문화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나라 역사와 한글·우리나라 지도·화폐 등을 소개했고, 제기차기·윷놀이 등 우리나라 전통 놀이도 함께했다. ‘아리랑’ ‘떳다, 떳다 비행기’ 같은 우리나라 민요와 동요를 가르쳐줬더니 무척 즐거워하며 따라했다. 전시회 기간 동안 내내 두 사람은 한복을 입고 다녔는데, 그 모습이 당연히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특히 안 나자흐 대학에서는 학생들의 정치적인 질문도 쏟아졌다. 한국은 왜 이라크에 파병하는 것이냐, 오사마 빈 라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부시를 어떻게 평가하느냐 등. 전시회 도중 예상치 못했던 의외의 반응도 있었다. 한국의 결혼 문화를 소개하는 영상을 상영하는데 신랑과 신부가 키스하는 장면이 문제가 됐던 것. 엄격한 이슬람 문화권에서 공개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또, 남자가 여자에게 악수를 청하면 안 된다는 금기를 몰라 실수를 하기도 했다.
전시회는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학교 측에서도 처음에 기대했던 것보다 1백 배 정도의 호응이 있었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 한국에서,
‘안양 이주노동자의 집’에서 봉사 활동중, 봉사활동은 평생의 업(業)
2002년 12월, 우리나라로 돌어온 그는 지난 여름 태풍 매미로 수많은 피해가 났을 때도 주저없이 삼척으로 달려갔다. 인터넷을 뒤져 ‘전국재해구호협회’에 직접 연락을 해 자원봉사를 신청했던 것. 여기저기서 답지한 구호품들 분배 업무를 비롯해 자원봉사자들 배치 문제 등 수많은 업무를 단 한 사람이 맡아 보고 있었다. 그에게는 사무 담당자의 지원 업무가 주어졌고, 2주 동안 구호센터에서 먹고 자며 수재민들과 함께했다.
“잠자리요? 하도 여기저기서 많이 자봐서 전혀 문제되지 않아요.(웃음) 배낭하나 둘러메고 떠나면 되는 걸요. 누울 곳만 있으면 어디서든 잘 수 있습니다.”
2003년 3월부터 현재까지 안양 이주노동자의 집에서 매주 일요일 상담봉사를 하고 있다. 네팔인 근로자들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통역을 담당하기도 한다. 필리핀, 인도 등지에서 온 근로자들을 위해 영어 통역도 함께 한다. 그곳에서 네팔 사람들을 만날 때면 가슴 한 켠에 늘 품고 있던 네팔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도 한다. 타국에 와서 고생하며 억울한 일도 많이 당하는 그들을 보면서 안타까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현재 그는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에 지원서를 넣고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다. 합격만 하면 전학생에게 장학금이 지원되기 때문에 좋은 환경에서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게 된다. 앞으로 그는 유네스코나 유니세프 등 복지를 위한 국제 기구에서 일해보고 싶다. 특히 아동교육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또 다른 꿈도 있다. 그것은 보다 장기적인 꿈이자 계획이다. 스스로 자원봉사단체를 직접 운영해보고 싶은 포부가 바로 그것이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도 많고 도움을 주고 싶어하는 사람도 많은데 정작 그 연결고리가 크게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남부럽지 않은 미국의 명문대학에서 전도 유망한 학과 공부를 하고도, 안정된 미래 대신 자원봉사에 뛰어든 그를 보고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의 소신은 건강하고 또한 확실하다.
“같은 학교 같은 과를 졸업하고 전공을 살려 1년 동안 엔지니어로 일한 친구가 있어요. 그 친구가 최근에 회사를 그만두고 구급차 운전사로 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의 목표는 소방관이 되는 것인데, 요즘은 구급차 운전을 하며 소방관 시험을 준비중이라고 하더군요. 저는 그 친구에게 멋지다고 말해줬어요. 자기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려는 모습이 너무나 좋아 보였어요. 무엇이든 자기가 정말로 하고 싶고 스스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 아니겠어요.”
글 / 박연정 기자 사진 / 강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