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세월 동안 철저하게 역사 속에 묻혀 있던 대한민국 현대사의 비극이 영화 ‘실미도’를 통해 대중에게 알려지면서 화제가 됐다. 이제 실미도는 연일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관광지로 변모했다. 실미도의 비밀을 평생의 한으로 간직해온 실미도 부대 생존자 김방일씨는 그런 변화를 지켜보며 만감이 교차한다. 그와 함께 ‘그곳’, 실미도를 다시 찾았다.
사건 전날 받은 특박 때문에 건진 목숨
“훈련병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강우석 감독의 영화 ‘실미도’가 개봉 19일 만에 전국 관객 5백만 명을 돌파했다고 한다. 국내 영화사상 최단 기간 5백만 돌파 기록이라고 하니, 가히 ‘실미도風’이라 할 만 하다.
아닌 게 아니라 실미도 가는 길, 겨울바람이 유난히 매서웠다. 서울에서 인천 국제공항 고속도로를 타고 약 한 시간을 달려 도착한 잠진포 선착장은 일요일이라 그런지, 이른 시간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눈에 익은 영화 포스터가 선착장 매표소에 보란 듯이 걸려 있다.
실미도는 무의도에 딸린 아기섬이다. 선착장에서 배로 5분 정도 들어가면 엄마섬인 무의도에 도착한다. 무의도에서 실미도의 초입인 실미해수욕장까지는 또다시 차로 약 10분 들어가야 한다. 하루에 두 번 바닷물이 빠지면 실미해수욕장에서 실미도까지 걸어서 들어갈 수 있는데, 고운 뻘이 드넓게 펼쳐진 바닷길 위로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었다. 뺨을 때리는 차가운 바람만이 을씨년스러움을 더해줄 뿐, 여느 관광지의 바닷가와 다르지 않은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광이다.
실미도 부대, 즉 684부대 생존자인 김방일(60) 당시 소대장과 실미전우회 회원 5명이 실미도를 찾았다. 김방일씨는 영화 ‘실미도’에서 허준호가 연기한 조 중사 역할의 실제 모델로, 1971년 8월 23일 ‘실미도 사건’이 일어나기 전날 우연찮게 특박을 받는 바람에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교육대장과 함께 출장차 섬 밖에 나와 있던 그는 사건 전날 부대로 복귀하던 중, 당시 약혼녀였던 아내 김명애씨(58)에게 연락을 받았다. 마침 인천에 친지분들이 와 계시니 복귀하기 전에 인사를 드리고 가라는 것이었다. 이미 부대를 향하는 배에 오른 김씨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교육대장은 즉석에서 하루 외박을 허락했고, 그것이 그에게는 천우신조가 한 것. 현재 그는 고향인 충주에서 냉난방 설비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이미 몇 차례 실미도를 찾았던 김방일씨는 비교적 차분한 모습이었지만, 십수 년 만에 실미도를 다시 찾은 나머지 5명은 모두 착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날 동행한 실미전우회 회원은 회장인 김방일씨를 비롯해서 김성진씨(60·설비업), 김이태씨(60·농업), 김양구씨(59·임대업), 김정현씨(55·운수업),성영균씨(55·경비업) 등 총 6이태씨를 비롯해서 기간병이던 김성진, 김정현, 성영균씨는 모두 실미도 부대에서 1년 이상 복무했던 사람들이다.
특히 김정현씨는 사건 당일 현장에서 살아남은 5명의 기간병 중 한 사람으로, 훈련병들의 공격이 시작되자 재빨리 내무반을 뛰쳐나가 바위 뒤에 숨어 있다가 겨우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꼭 한 번은 와봐야겠다고 생각했다”(김성진씨), “아직도 그때 훈련병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김양구씨)고 말하는 회원들의 얼굴은 회한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실미전우회에 대해 묻자 회장인 김방일씨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지난 99년, MBC에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를 촬영할 때 서로 연락이 닿아 실미전우회를 만들었어요. 현재 회원이 스무 명 정도 되는데, 당시 돌아가신 교육대장의 아들도 명예회원으로 가입했죠. 1년에 서너 차례 만나면서,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탑 건립 문제와 그들의 명예 회복 문제를 논의하고 있습니다. 또 당시 근무했던 기간병들의 월급이나 수당 등에 대한 상부의 착복 의혹과 부당한 처우에 대해서도 당국에 보상을 요구할 생각입니다.”
영화를 통해 알려졌다시피 실미도 사건이란, 1971년 8월 23일, 북파 공작을 목적으로 조직된 684부대의 훈련병들이 인천에서 탈취한 버스를 몰고 노량진 유한양행 앞까지 진출해 난동을 부리다 자폭한 사건이다.

당시 정부는 이들을 북한 ‘무장공비’라고 발표했다가 3시간 만에 ‘공군 관리하의 특수범’이 벌인 ‘군 특수범 난동 사건’이라고 정정했다. 1968년 4월에 만들어졌다 해서 684부대로 불린 실미도 부대는 1968년 1월 21일, “박정희의 모가지를 따겠”며 청와대 앞까지 침투한 ‘김신조 사건’에 대한 박정희 정권의 보복성 정책의 일환이었다. 31명의 훈련병 가운데 7명은 훈련 과정에서 사망했고, 서울로 탈출했던 24명은 모두 자폭하거나 사형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경비병 5명과 김방일 소대장 등 6명뿐이다.
실미해수욕장을 지나 실미도 안으로 들어가니 자그마한 오솔길 입구가 나왔다. 좁은 입구를 지나 숲속으로 20여 분 가파른 길을 올랐다. 섬 한가운데 이렇게 은밀한 곳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후미진 곳. 중턱에 오르다 보니 건축물이 있었던 듯 주춧돌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여기가 바로 교육대장의 숙소”라는 김방일씨의 설명이 뒤따랐다. 영화의 내용으로 치자면 안성기가 설경구 앞에서 권총 자살한 바로 그 방인 셈이다.
물론 실제 교육대장은 훈련병들에 의해 첫 희생자로 살해당했다. 언덕을 다 오르고 나니 이내 널따란 평지가 나왔다. 오른쪽 아래께에는 당시 부대원들이 식수 겸 생활수로 사용했다는 우물도 눈에 띄었다. 숲속에 들어앉아 있어 바깥에서는 여간해서 눈에 띄지 않는데다 넓은 평지라 부대원들이 훈련하고 생활하는 요새로는 최적의 장소였다는 것이 김방일씨의 설명이다.
돗자리를 깔고 가져온 떡과 과일, 각종 음식을 놓고 위령제를 준비하는 부대원들의 얼굴이 일순간 침울해졌다. 인권을 유린당한 채 젊음을 희생당한 훈련병들과, 아깝게 젊은 목숨을 잃은 기간병들을 위로하며 절을 하고 소주를 흩뿌리는 동안, 김방일 소대장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맺혀 있었다.
“사건 직후 즉시 부대로 복귀해 상황을 처리하라는 명령을 받았어요. 아비규환의 현장을 바라보면서 처음엔 훈련병들에게 그렇게 괘씸한 생각이 들 수 없더군요. 당시 현장의 상황이라는 건 처참하기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어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참혹하게 죽은 부하들의 모습을 보며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 정신이 내 정신이 아니었다고 할까요. 내부반에서 훈련병들이 남긴 ‘소대장님 죄송합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라는 쪽지를 발견했을 땐 만감이 교차하더군요.”
엽기적인 담력 훈련 등 강도 높은 훈련
“영화보다 수십 배는 더 가혹한 훈련이었죠”
김방일씨와 일행의 한결같은 증언에 따르면 당시의 훈련은 영화에서 묘사된 것의 몇 배는 더 강도 높은 것이었다고 한다. 묘지를 파헤쳐 해골과 뼈를 추려낸 뒤 나무판에 붙여 ‘우리의 신조’라는 상징물을 만들기도 했고, 그 과정에서 시체를 입에 갖다대는 등 담력 훈련도 병행됐다. 외줄 타기 훈련의 경우 영화와는 달리 아예 손잡이 줄이 없어서 위험천만했다. 장애물 돌파 훈련 때는 출발 후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뒤에서 무조건 총을 발사하는 바람에 훈련병들이 죽을 힘을 다해 초인적인 속도로 달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영화에서 묘사된 대로 외줄 타기 훈련을 하다 두 명이 떨어졌는데, 실제로는 둘 다 죽지는 않았다. 그중 한 명은 영화 속에서처럼 취사병 노릇을 했다고 한다. 또, 영화 속에서는 훈련병 대다수가 사형수 등의 극악 범죄자로 그려졌지만 실제로는 전과자 반, 일반인 반이었다는 것이 김방일씨의 증언이다. 전과자도 절도나 폭행, 강간 등 잡범 수준이었고, 일반인들은 구두닦이나 암표 장사, 서커스 단원 등 다양한 직업군이었다고 한다.

3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 하면서 훈련병과 기간병들 사이에 정이 싹텄음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훈련병들이 그처럼 극단적인 행동을 취할 수밖에 없었던 것에 대해 김방일씨는 열악한 부대 내 처우를 그 이유로 꼽았다.
“처음 1년 동안은 대우가 정말 좋았어요. 소갈비도 자주 나왔고 달걀과 사과는 거의 매끼 부식으로 나왔을 정도니까요. 담배도 신탄진, 아리랑 등 가장 좋은 것들로만 제공됐죠. 그러던 것이 나중에는 보리밥에 단무지, 담배도 화랑으로 바뀌는 등 갑자기 개 돼지 같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그런 식으로 서서히 버림받는 게 아니냐는 분위기가 훈련병들 사이에 서서히 퍼져갔던 것 같아요.”
실미도에서 보낸 시간은 김방일씨에게 악몽과도 같은 엄청난 고통이라고 한다. 군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무조건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지만, 훈련병들에게 가혹한 훈련을 시키던 기억을 떠올리면 죄책감에 괴로워 밤잠도 설친다. 가끔 꿈속에서 훈련병들이라도 만나면 그들의 이름을 애써 떠올려 수첩에 적어둔다고 한다.
“당시 사고로 죽은 기간병들은 모두 국립묘지에 안치됐지만, 훈련병들은 신원조차 알려지지 않은 채 실종자 처리됐을 뿐입니다. 그들도 나름대로 나라를 위해 국가에 충성한 사람들 아닙니까? 제 마음속에 남아 있는 죄책감을 속죄하기 위해서라도 죽기 전에 그들의 한을 풀어주고 싶습니다. 이름도 찾아주고, 명예도 회복해줘야죠. 그것이 바로 살아남은 자의 몫이 아니겠습니까?”
글 / 박연정 기자 사진 / 임재철
30여 년 만에 무덤 앞에서 조우한 훈련병과 소대장
실미도 부대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했던 김이태씨(60)는 이날 오전 3시 자리에서 일어나 인천으로 향했다. 살아 생전 꼭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부대가 위치했던 해안에서 치러진 위령제가 끝나자 김씨는 소주 한 병을 집어들더니 조용히 자리를 떴다. 김씨는 곧바로 산길도 없이 소나무와 가시덤불만 우거진 산길을 헤맸다. 15분쯤 지났을까. 김씨는 비석도 없고 잡초만 무성한 초라한 무덤을 찾아냈다.
“석구야, 이제야 왔다. 술 한잔 받아라. 담배도 한대 피우고….”
평소 피우지 않던 담배에 불까지 붙여 정성껏 무덤 앞에 놓은 김씨는 남쪽 먼바다를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고 두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33년 동안 어느 누구도 찾지 않은 이 무덤의 주인은 조석구 훈련병(당시 22세).
“1970년 8월 31일 10km 수영 훈련 날이었는데, 해안에서 300m 떨어진 곳에서 석구가 ‘소대장님’하고 부르기에 쳐다봤더니 물속으로 잠기고 말았어요. ‘석구야’ 하고 뛰어갔지만 구할 수 없었고 물이 빠진 뒤 바위틈에서 시신만 찾아냈죠.”
김씨는 조석구씨의 시신을 수습한 뒤 죽어서라도 따뜻한 남쪽을 바라보라고 이 섬의 정남향 산봉우리에 묘를 만들었다. 그러나 조석구씨의 사망은 상부에 간단하게 보고만 됐을 뿐 부대의 특성상 가족들에게 제대로 알려졌는지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무덤은 그동안 누가 주인인지도 모른 채 방치돼 왔고 언제 누가 다시 찾을지 모른다.
김씨는 “나도 조만간 석구가 먼저간 곳으로 갈 텐데 가기 전에 꼭 한 번은 이곳을 찾고 싶었다”면서 “당시 실미도 훈련병 중 인질·강간사건을 저질러 처형당한 친구들과, 훈련하다 비명에 횡사한 석구를 똑같이 대할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실미도 부대 이후 보안사와 농업기반공사 등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 지금은 고향인 경북 의성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김씨는 매일 2시간씩 마을 공중화장실 2곳을 청소하는 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지옥보다 더한 훈련과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가혹한 일들을 했던 이승에서의 죄과를 조금이라도 씻기 위해 무슨 일이든 못하겠어요.”
글 / 한대광 기자(경향신문 지방자치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