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으로 생각하고 생명을 바라보는 리사이클링 운동가 천정곤

환경으로 생각하고 생명을 바라보는 리사이클링 운동가 천정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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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천원으로 결혼식을 치러야 했던 좌절, 생각 바꿔 5천만 살리는 재활용 운동해요”

이제는 사업가이라기보다 운동가다. 재활용센터를 운영하는 천정곤씨는 재활용 상품을 팔기보다 재활용에 대한 생각을 전파하는 데 골몰한다. 재활용을 해 우리 국토의 곪은 구석을 치유하는 데 온 신경을 쓴다. 새로운 생각으로 자신은 물론 세상을 바꾸려는 이 사람의 똑부러진 이야기를 들어본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생각이 세상을 바꾼다는 말은 맞다. 생각은 참 많은 것을 바꿔놓는다. 절대 뒤집을 수 없을 인생 역전도 이 생각이란 모티브와 맞부딪히면 어김없이 한판승이다. 재활용센터를 운영하고 이를 통해 환경운동의 새 길을 모색하는 천정곤 대표의 삶도 이 생각 하나가 바꿔놓은 ‘파라다이스’였다.

1983년 3월, 처남의 중매로 결혼을 하게 된 그는 울산에서 식장이 있는 경북 영천으로 가기 위해 마지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빚쟁이 쫓아다닌다고 그간 모아놓은 돈을 다 써버리고 내려가는 마음이 오죽했을까. 영천에 내리니 마침 야간 고등학교에서 같이 어렵게 공부하던 친구들이 마중을 해줘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들과 어울려 하룻밤. 이들과 지낸 여관비며 밥값을 대고 나니 그나마 수중에 5천2백원이 남았다. 아무리 80년대, 그것도 시골 중소 도시지만 이 돈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전무했다. 그것도 결혼식 당일인데.

그래도 머리는 깎아야겠기에 이발하는 데 3천원을 썼다. 목욕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양복과 구두는 외상으로 구입을 했다. 그나마 번쩍이는 구두가 짝이 맞지 않는 양말의 곤궁함을 가려주니 그나마 다행.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그렇지 않아도 어찌해야 할지 모를 결혼식에서 손님인 친구들이 함 값 때문에 시비가 붙는 바람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예정되어 있던 결혼식은 끝났지만 돈이 없으니 신혼여행도 포기해야 할 상황. 그때 속에 담아두었던 무엇인가가 터져버렸다. 식이 끝나고 근처 다방에 앉아 안정을 취하려는데, 그때부터 끝없이 흐르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정오에 그렇게 되고부터 저녁이 깊도록 10시간 가까이 멈출 줄 모르는 눈물에 신부마저 할 말을 잃고 집으로 가버렸다. 아무도 없는 다방에서 영업시간 종료를 알리는 종업원의 채근에 떠밀려 밖에 나오고서야 서글픈 통곡은 끝을 고했다.

구질구질에 청승이 덧씌워진 ‘세상에 이런 일이’는 이런 이유 때문이다.

시골에서 고만고만하게 살던 5형제 맏이의 앞날은 뻔한 것이었다. 골목대장으로 아무리 주름을 잡았어도 그런 영광은 딱 초등학교까지. 중학교는 희망사항으로 남겨두고 외삼촌이 있는 부산 해운대에서 타향살이를 시작했다. 외삼촌의 직업은 연탄 직매장과 식당. 그가 할 일은 뻔하다. 연탄과 음식 배달. 끈을 이용해 양손에 든 십구공탄의 무게는 바지에 탄가루의 흔적을 여지없이 남겼고, 떡 벌어진 한상을 배달하는 피곤함은 교복 입은 또래의 시선 탓에 더욱 가중됐다. 하지만 구정물에서 연꽃이 핀다던가? 그 월급을 모아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중학교 등록금을 냈고 교복과 모자, 가방을 살 수 있었다.

“음식 배달을 할 때, 절대 쉬지 않았어요. 그냥 한달음에 갔다왔죠. 기운이 넘쳐서 그런 게 아니라, 지나다니는 또래에게 너무 창피해서… 길 중간에 쉬면 그만큼 그들 눈에 더 오래 띌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그렇게 한 거예요. 그렇지만 그런 고생이 희망을 만들어갈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중학교에 어찌해서든 들어갔는데, 연년생인 동생이 내가 갔던 길을 그대로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부모의 뜻을 거역한 맏이는 집에선 버린 자식이 되었지만 , 그 탓에 더 열심히 학교 생활을 했단다. 배구선수가 되어 학비를 면제 받았고, 대대장이며 선도부장이 되어 골목대장의 태를 벗고 모범학생이 되었다. 고등학교 역시 마찬가지. 벌면서 다녀야 했기에 대구공고 야간부를 택했고,  신문 배달과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충했다. 결국 영양실조까지 걸려가며 힘겹게 고교 과정을 마치고 대학의 꿈을 키웠으나, 결국 그 아른거리던 동생들의 모습이 발목을 잡았다. 돈을 벌어야 했다. 직장을 잡아야 했다.

그렇게 들어간 현대정공에서 열심히 일한 덕에 사무직 발령까지 받았지만, 그것으로 동생들과 부모를 공양하기엔 역부족. 전자 기술을 배워 수리센터를 열었다. 어찌 보면 탄탄대로였다.

동생 역시 중학 진학을 포기하고 우편배달부가 되었다. 그러면서 지역에서 한 신문지국을 인수해 사업을 시작할 초창기. 결국 손이 달린 동생은 형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영천에 내려가 지국을 같이하면서 1년 안 돼 3백 부이던 배달 신문을 1천 부까지 늘려 더는 걱정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돈이 꼬이면 장난을 하는 삶이 생기는 법인지 본사에서 영업권을 그들 몰래 다른 사람에게 넘기면서 하루아침에 일터를 잃었으니 속에 불이 났다. 본사로 달려가 부당함을 알리기를 몇 달. 겨우 받아온 한마디는 “다음에 좋은 지국 나면 우선 배정하겠다”는 것뿐. 결국 몇 푼 모아놓은 돈마저 이 한마디를 들으려고 다써버린 상황에서 결혼식을 올렸으니 그 막막함이 10시간의 눈물로 그렇게 터진 것이다.

그렇게 울다 정신을 차려 밤 11시가 되어서야 신부와 통화를 했고, 다시 맞잡은 손엔 ‘비 온 뒤의 땅’처럼 굳은 믿음과 재기의 용기가 넘쳐났다. “그래 다시 시작하는 거야!”

그러나 불행의 그림자는 또다시 그들을 덥쳤다. 피와 땀으로 모아 장만한 집을 사기당한 것. 결국 남에게 넘어가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했으니 그 화가 마음까지 다치게 한 모양이다. 이후부터 그 사기꾼을 쫓는 생활이 몇 달간 이어지면서 생활은 더없이 나락에 빠졌고, 그 안팎에 포항 송도해수욕장으로 가서 죽을 결심을 했다. 그러나 눈앞에 아른거리는 가족과 형제들 얼굴에 또다시 눈물만 흐를 뿐이었다. “그래 죽을 힘을 다해 살아보는 거야!”

환경을 먼저 생각하면 돈은 따라오게 마련

초등학교 졸업 후의 고생스런 경험과 권모술수와 사기의 피해 경험이 다시 사는 힘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이후 보이는 세상은 다른 세상이었다. 두 번이나 망한 가게를 목으로 택한 전자 대리점은 호황을 거두었고, 시골 구석구석을 돌며 벌린 가전제품 수리 사업도 더없이 잘 되었다. 당시, 그렇게 쏘다니다 보니 쓸 만한 전자제품이 버려지는 것을 무수히 봤고, 언론에서는 연일 쓰레기 투기 문제를 기사화했다. 갑자기 이 두 가지를 다 해결할 방법이 떠올랐다. 자신의 기술로 물건을 제대로 고쳐 저렴하게 팔면 누구에게나 좋은 일.

그러나 이것을 비즈니스로 하면 내 배만 불리는 것이니 이를 울산시청과 같이 전개해보겠다고 기획안을 꼼꼼히 써 시청에 제출했다. 결과는 예상대로였고 사업적으로 환경 문제 해결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에 파급 효과를 나타냈다.

지금은 5형제와 사촌동생, 처남과 동서들, 그리고 이모 등 무려 15명에 달하는 친인척들이 전국적인 중고제품 ‘재활용 네트워크’(www.recycle21.com)를 구성, 환경운동을 펼치고 있다. 그의 생각 하나로 쓰레기로 몸살을 앓던 국토가 기지개를 켤 수 있었던 것. 결국 재활용도 새것만큼 오래, 믿고 쓸 수 있다는 생각들을 전파하게 됐고 그가 자원 절약은 물론 환경운동의 선구자가 된셈.

1995년 쓰레기종량제가 실시되면서 센터는 폭발적 인기를 모아 하루 1톤 트럭으로 80대 분량까지 수거해오는 실적을 보이기도 했다. 천정곤씨는 “우리가 그동안 재활용시킨 제품이 1만 톤은 넘는다”며 “그만큼 물자가 절약됐다고 생각하니 가슴 뿌듯하다”고 했다.

글 / 강석봉 기자  사진 / 임재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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