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불모지인 유럽의 책 시장 홀로 개척한 번역작가 채운정

한국문학 불모지인 유럽의 책 시장 홀로 개척한 번역작가 채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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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문화도 로비 시대, 우수한 우리 문화를 수출할 때입니다”

독일에서 22년간 체류하며 우리 문학 번역에 힘써온 작가 채운정은,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한국에 대한 유럽 사람들의 인식을 바꿔보고자 우리 문학 알리기에 뛰어들었다.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던 ‘가지 않은 길’에 관한 그녀의 여정을 들어봤다.

서울대 의대 자퇴하고 떠난 독일 유학길



국제화 시대엔 문화에도 ‘힘의 논리’가 적용된다. 자연의 삼투압 원리처럼 강대국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약소국으로 전이된다. ‘문화 식민지’라는 말도 괜한 말이 아니다. 자국의 문화를 지키고 가꿔나가는 것 이상으로 자국 문화의 우수성을 알리고 홍보하는 일이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말 그대로 문화도 로비하는 시대가 됐다.

번역가이자 작가, 시인, 그리고 지적 재산권 수출입 전문 에이전시의 대표이기도 한 채운정. 지난 15년 동안 그녀는 한국문학에 관한 한 불모지에 가까웠던 독일 땅에 우리 문학을 소개하는 ‘문화 로비스트’로 앞장서왔다.

독일 하인리히 하이네 대학에서 독문학과 철학을 공부한 그녀는, 메카토아 듀이스부룩 대학교 대학원을 전체 수석으로 졸업한 재원이기도 하다. 듀이스부룩 대학에서 철학자 헤겔 전문가인 베르시 교수의 수제자로 박사 과정을 밟으며 전임강사로 교편을 잡았던 그녀는 안정된 길 대신 ‘가지 않은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전무하다시피 한 한국문학 번역 작업에 뛰어들었던 것. 독일내 한국인 2, 3세들에게 우리 문화를 알리고 가르쳐주고 싶다는 일종의 사명감 때문이었다.

“도서관에 가면 중국이나 일본 관련 저서는 수백 권이 넘어요. 그런데 한국문학이나 관련 저서는 통틀어도 1백 권이 될까 말까죠. 더구나 독일에는 60년대 이후 취업 이민온 한국인들이 많아요. 그래서 교포 가정이나 한-독 가정이 적지 않죠. 그 가정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외양은 한국인이지만 영혼은 독일인입니다. 그 아이들에게 정체성을 찾아주고 싶었어요. 강연을 다니면서 만난 아이들이 어머니의 나라를 궁금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 뭉클함을 느꼈습니다.”

지난 15년간 그녀는 고은의 시집 「조국의 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자서전 「나의 삶, 나의 길」  박완서의 소설 「꿈꾸는 인큐베이터」 등 수많은 우리 문학을 번역·출판하며, 창작 활동에 전념해왔다. 유색인종이 좀처럼 끼기 어려운 독일의 백인 문학계를 비집고 들어가 기꺼이 한국의 문학과 문화를 알리는 민간 외교관이 되어온 것. 그 결과 현재 그녀는 독일 지식인들과 한국 내 독문학자들 사이에서 한국문학 번역에 관한 한 자타가 공인하는 일인자다.

채운정 작가는 지난해 10월 귀국하기 전까지 22년 동안 독일에서 생활했다. 80년대 초 암울한 정치 상황에 환멸을 느껴 유학길에 오른 것이 그 시작이었다. 서울대 의대 1학년에 재학중이던 80년 당시, 학교에 제대로 다녀본 기억이 없다. 매일 데모의 연속이었고, 격렬한 아비규환의 현장을 경험하면서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 시위 현장의 충격적인 경험이 악몽으로 되살아날 정도라고 한다. 1년 남짓 적을 두고 있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양력에 서울대 타이틀을 넣지 않는다. 서울대 출신 전 대통령의 실정으로 IMF 위기를 겪었고, 서울대 출신 소위 엘리트들이 우리나라를 망쳐놓은 부분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타이틀이 그리 자랑스럽지 않다”면서 화제를 돌렸다.

“지난 92년부터 본격적인 번역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교포 2, 3세들을 위해 우리나라의 전래동화를 번역해

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런 저의 기획을 높이 평가한 독일의 문학 재단 ‘아카데미 실러스 졸리투드’에서 4개월 동안 번역 연구 지원을 받았습니다. 문학인을 양성하는 취지에서 매년 유망한 문학인들을 엄격히 심사, 선정해 예술인촌에서 숙식을 제공하고 월급까지 주면서 지원하는 곳이죠. 한국인으로는 제가 최초 수혜자였습니다.”

김대중 대통령 자서전 등 다수의 저작 번역

춘향전, 홍길동전, 콩쥐팥쥐 등 1백여 개의 민담과 전래동화를 묶어서 번역을 끝냈지만 책으로 나오기까지 많은 난관에 부딪쳤다. 여러 출판사들의 문을 두드려봤지만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한국에 대한 인식이 낮다는 이유로 책을 내주지 않았다. 정 책을 내고 싶으면 종이 값을 마련해 오라는 식이었다. 사비로 충당하기에는 적지 않은 그 돈을 마련할 수 없어 우리나라의 문예진흥원에 도움을 요청해봤지만, 동화에 대한 담당자들의 편견 때문에 지원받을 수 없었다.

“독일 사람들은 우리나라 동화를 번역하라고 생활비까지 지원해주었는데,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도와주지 않는구나 싶어 서운한 마음이 들더군요. 결국 아까운 원고를 2년 동안 썩힐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다가 안 되겠다 싶어 한국 대사관에 찾아갔죠. 번역비는 포기할 테니 종이 값이라도 지원해달라고…. 당시 영사님의 도움으로 95년에 책이 출간됐습니다.”



동화책은 시쳇말로 ‘대박’이 났다. 독일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즈음에 자녀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곤 하는데 ‘한국의 전래 동화’가 엄청나게 팔려 나간 것. 초판이 매진되고 재판까지 찍을 정도였다.

“선진국에서 출판 시장을 뚫는다는 건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중국은 역사가 깊고 일본은 경제 대국인데 한국은 뭘로 유명하냐는 식이죠. 태권도와 김치 정도밖에 말할 게 없더군요. 더구나 분단국이라는 현실, 북한이 독재정권이고 가난하다는 인식이 우리나라에까지 좋지 않은 이미지를 주고 있습니다. 그나마 월드컵 이후에는 우리나라에 대한 인식이 많이 좋아졌지만요.”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1년에 한 권씩 꾸준히 책을 내온 그녀는 활발한 번역 활동과 열성적인 로비 활동으로 독일 유수의 출판사로부터 계약을 따내는 데 성공했다. 독일 최고의 출판사 중 하나인 쥬어캄프에서 고은 시인의 「조국의 별」을 출판했을 당시, 뮌헨 프랑크푸르트, 베를린 등 5개 도시를 돌며 ‘한국 문학의 밤’ 행사를 여는 등 로비에도 열정적이었다. 그런 활발한 홍보 활동에 힘입어 고가의 하드 커버인 초판 5천 부가 모두 팔려 나가는 성공을 거뒀고, 2000년에 출간한 김대중 대통령의 자서전 「나의 삶, 나의 길」 역시 정치경제 관련 최고의 출판사인 알게마이네 신문 출판사에서 출간해 좋은 반응을 얻었다. 당시 이 책이 노벨상을 주관하는 스웨덴 한림원에 들어갔고, 그것이 김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는 후문이다.

요즘 그녀는 2005년에 있을 프랑크푸르트 세계도서전시회 건으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매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리는 세계도서전시회는 주제 국가 한 곳을 정해서 그 나라의 문학, 영화, 연극, 미술, 무용 등 문화 전반에 대해 대대적으로 소개하는 대규모 행사다. 자국에 대한 막대한 홍보 효과 때문에 각국의 유치 경쟁이 치열한 상황. 지난 93년부터 유치를 위해 10년간 로비해온 우리나라는 2005년 주제국으로 선정됐다. 로비 단계부터 깊게 관여해온 채운정 작가는 독일에서의 오랜 체류 경험과 저작 활동을 인정받아 문화관광부와 외교통상부 관계자들의 협조 요청으로 행사 준비를 위해 애쓰고 있다. 이를 위해 현재 그녀의 저서와 번역서들이 모두 국립중앙도서관에 들어가 있는 상태다.

“독일에는 번역문학 활성화를 위한 예술가 재단이 9천여 개에 이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문예진흥원, 대산재단, 한국문학번역원, 한국국제교류재단 등 유관 단체가 고작 4개 정도밖에 없어요. 국제화 시대에 우리나라의 위상 제고를 위해서라도 유럽 땅에 우리 문화를 소개할 필요성이 절실합니다. 이를 위해서 번역문학가의 양성이 시급하다고 생각해요. 왜 우리나라는 외국 책들을 수입만 하고 우리 책을 외국에 수출할 생각은 하지 않냐는 거죠. 그 일에 제가 앞장서고 싶습니다. 5월에 국내에서 그림 전시회를 열 생각이에요. 외국에서 생활하는 동안 취미 삼아 수집한 외국 화가들의 작품 1백여 점을 전시·판매해서 그 수익금으로 예술문화재단을 설립할 겁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요.”

글 / 박연정 기자  사진 / 박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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