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탄이 빗발치는 곳에서 보내온 평화의 세레나데 프리랜서PD 강경란

포탄이 빗발치는 곳에서 보내온 평화의 세레나데 프리랜서PD 강경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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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고비 넘기길 수차례, 분쟁의 참상 속에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파”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이란, 미얀마, 캄보디아, 필리핀, 인도네시아, 소말리아, 알바니아, 코소보… 이름만 들어도 그 첨예함이 극에 달한 분쟁 지역이다. 누구도 자신을 지켜줄 수 없는 그곳에 카메라 하나 달랑 들고 총탄 사이를 헤쳐가며 현실 영상을 담아온 여자. 프리랜서 PD 강경란의 세상 속으로.

# 사선에서 생명을 말한다…언제나 존재하는 죽음의 확률



콩 볶는 소리가 난다. 더도 덜도 말고 바로 그런 소리다. 밀림 속에서 맥놀이 되는 그 요란한 굉음은 이내 귀를 멀게 하고 정신을 멍하게 만든다. 더는 지체할 수 없다. ‘이러다 죽겠군’이란 생각이 스치면 이내 경호를 담당한 건장한 청년이 반경 2km 후방에 숨겨놓은 오토바이까지 손을 잡아끌며 내달린다. 잘 뛰지 못하는 신체적인 한계를 그의 완력에 의지해 질질 끌려가는 수밖에 없다. 죽을 상황이 되면 어떻게 그리도 살고 싶다는 생각이 용솟음치는지…. 그러나 그 다발적 굉음은 꼬리를 물듯 우리를 뒤쫓는다. 살려고 죽어라 뛰어 내닫는다.

허나 이 총소리보다 더 아찔한 것이 있다. 그렇게 강하게 잡아끌던 손이 힘도 들었을 게다. 혼자 뛰면 자기 생명은 온전할 터. 계약된 나를 살리느라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 꽉 잡은 손도 갈등하게 마련. 살고자 그 손 잡은 내가 그 옥죈 아귀 힘이 달라지는 것을 모를 리 없다. 점점 아귀가 풀리는 느낌. 만감이 교차한다. 그도 살고 싶은 게다. 내가 살고 싶은 만큼 그도 살고 싶어서 장애물인 나를 버리려나 보다! 그럴 때면 손을 놓칠 세라 내 쪽에서 있는 힘을 다해 그에게 매달린다.

그렇게 정신없이 사지에서 튕겨져 나오면 이제 안심이다. 이렇게 딱 2km만 벗어나면 적어도 벌집이 되어 죽을 일은 없다. 이골이 난 분쟁 지역 프리랜서 PD의 삶은 이렇게 오늘 하루를 또 버텨냈다.

“전 사실 산도 잘 타지 못하고 다른 사람처럼 날래지도 못하거든요. 혹시 모를 위험을 대비해 동작이 빠른 젊은 사람과 동행 하죠. 안전 부분을 책임져주는 사람 말이에요. 쉽게 말해 유사시에 저를 잡거나 들쳐업고 안전 지대까지 나오는 역할을 맡기는 거예요. 대부분 위험 지역은 반경 1~2km만 피하면 그렇게 위험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위험 지역으로 들어가기 전에 그만큼 밖에다가 오토바이나 안가(안전가옥)를 마련해둬요. 그런데 상황이 위험한 만큼 누구나 살고 싶어서…

그도 위험을 느끼면 살겠다고 손에 힘이 빠지는데, 쫓아가느라 정신없는 상황에서도 그 느낌이 얼마나 소름 끼치던지…. 사실 그곳은 지옥이거든요. 게릴라전이란 게 적도 아군도 불분명한 상황이고, 도로보다는 밀림을 헤치다가 발생하는 일이잖아요. 강행군은 필수고 앞뒤 상황이 모두 부정확하니 공포는 극에 달하죠. 바지에 오줌 싸는 사람도 봤어요.”

그러나 전투에 참가한 사람들이 악마와 같이 행동해도 여전히 사람일 수밖에 없다고.

“물론 죽은 사람도 봤고 죽인 사람도 봤어요. 실제 전투를 벌이는 이들도 누군가를 죽인다는 죄책감과 자신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어우려져 정말 복잡한 마음이 돼요. 전투할 때 목숨을 거는 만큼 이 안팎에 정말 예민해 있거든요. 낙엽이 떨어지는 소리나 양철 흔들리는 소리에도 불안해해요. 그런 곳에 그렇게 고생하며 갔다 오면 한 일주일은 아무 일도 못해요. 다행히 제가 자기 합리화를 잘하거든요. 방어기제가 발달한 셈이죠.”

강경란 PD(44)는 벌써 15년째 부지기수로 이런 상황을 겪어내며 세계의 화약고를 탐사하고 있다. 생명을 담보로 이렇게 위험한 일을 시작한 것은 80년대 말, 러시아 연방 극동에 있는 반도 캄차카에 가면서부터다. 분단 후 남한 사람으로는 그녀가 처음이다. 자신과 AD, 카메라맨과 그 조수 이렇게 네 명이었다. 김정일 관련 특종을 노리고 들어간 것이라 ‘기념비적’인 첫 방문엔 별 의미를 두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북한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은 ‘이적단체와의 회합’이었고, 그들과 대화를 하면 ‘이적단체와의 통신’으로 졸지에 철창 신세를 질지도 모를 일이다. 정보를 제공할 북한인 가이드 역시 이와 마찬가지일 터. 첫번째 약속 장소였던 아무르 강변에 정보원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털모자를 쓰지 않으면 머리가 깨질 것같이 추운 그곳에서 더 기다릴 수도 없어 호텔로 돌아왔다. 첩보영화를 많이도 봤는지 만나자고 약속하는 시간은 여지없이 야심한 밤이었다. 그러나 정보원과의 ‘접선’은 자꾸 엇나갔다. 그런 일이 서너 번을 넘다 보니 불안해졌고, 이곳에서 미아가 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공포감마저 들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포기하다시피 마지막 약속 장소인 하바로브스크의 시장에서 접선을 시도했다. 포기하는 심정으로 넋 놓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동무”하며 나타난 그들. 반갑기보다 무서웠고 일이 잘못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 있다는 불길한 상상이 가슴을 짓눌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전면전 현장을 취재하는 것보다 그때가 더 겁났던 것 같다.

“사실, 전쟁이 일어나면 오히려 마음이 편해요. 이라크전 같은 것을 취재할 때도 마찬가지죠. CNN 기자들만 쫓아다니면 돼요. 그들이 있는 곳은 미군들이 절대 폭격하지 않거든요. 게다가 그들은 펜타곤(미 국방부)으로부터 직접 얻은 전쟁에 관한 고급 정보를 가지고 있는 터라 다른 나라 종군기자들이 특종할 여지는 거의 없다고 봐도 돼요. 다만 이 전쟁을 어떤 시각으로 보도할 것인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죠.”



이라크처럼 세계 어느 곳이라도 분쟁이 터지면 곧바로 달려갔다. 아프가니스탄, 이란, 미얀마, 캄보디아, 필리핀, 인도네시아, 소말리아, 알바니아, 코소보 등 수많은 나라에 뛰어들어 취재 활동을 벌였다.

그곳에선 오직 혼자다. 방송사도 국가도 취재 현장에선 별개일 수밖에 없다. 프리랜서인 만큼 그 무서운 곳을 혼자 쏘다니며 영상을 만들었다.

“이런 곳의 취재는 오히려 편해요. 안정된 사회가 아니기에 취재에 필요한 절차나 조직, 지위 같은 것이 전혀 없어요. 분쟁 지역에서는 이런 것이 다 무시되죠. 유일한 방법은 무작정 머리를 들이미는 것뿐이죠. 한마디로 ‘KBS는 되고 강경란은 안된다’는 등식이 그곳에서만큼은 성립되지 않아요.”

이렇게 열혈 다큐멘터리 PD도 처음엔 우연한 기회에 방송 일을 시작했다. NGO 활동을 하다가 한국전쟁 관련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며 KBS와 인연을 맺었다. 입사한 것이 아니라 한 프로젝트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일도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 고참 PD가 두 달 정도 미국, 멕시코, 캐나다 등을 돌며 답사 여행을 제안한 것이 이 일에 발을 담그게 된 배경이다. 프로그램을 안 만들어내도 된다는 해방감에 정말 재미있게 여행한 기억이 있다고.

“얼마 전 방송된 ‘몽골리안 루트’는 참 유서 깊은 프로그램이에요. 10여 년 전 저도 그 작업에 참여했고, 그렇게 오랜 기간 제작해 얼마 전에야 전파를 탄 것이죠. 그리고 개국할 때 입사한 Q채널에서 정말 좋은 여건에서 다큐멘터리를 찍었어요. 이때 아웅산 수지를 만나는 등 다른 고민 없이 작품만 찍을 수 있어 좋았거든요. 지원도 확실했고요. 조금만 더 방송사를 밀어줬어도 좋았을 텐데….”

그러나 다큐멘터리 채널이 금전적인 부분에서 비용 대비 효율이 엄청 떨어지다 보니 문을 닫고 말았다. 결국 프리랜서로 다큐멘터리 일을 계속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무게 있는 사람들도 많이 만났다.

# 세상의 주인은 결국 민초…허명의 지도자와 진정한 영웅

분쟁 지역의 지도자들도 두루 만났다. 미얀마의 반독재 시위를 이끌어 1991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아웅산 수지를 비롯해, ‘피플 파워’로 집권한 필리핀의 두 번째 여성 대통령 아로요, 현 인도네시아 대통령 메가와티 등 동남아시아의 여성 지도자들을 만났다. 분쟁과 전쟁으로 얼룩진 국민들을 평화로 이끌어줄 주인공이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2003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이란의 법률가 시린 에바디도 만났다. 이런 탓에 이들에 대한 느낌들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동아시아의 여성 지도자들은 대부분 부모 잘 만난 덕에 지도자가 되었죠. 인상과 매력은 모두 다르지만, 지도자로서 갖춰야 할 안목과 덕목은 분명히 있어요. 우리가 배워 익힐 수 있는 롤 모델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란 최초이자 마지막 판사 출신인 에바디는 극도의 가부장적 이슬람 문화 속에서 여성을 위한 법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변호사라고 평가해요. 하지만 저는 생각이 좀 달라요. 이란 여성의 결혼과 이혼 문제, 양육권 등 차별법안을 개혁하는 성과를 이뤄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했지만 에바디는 중립적인 위치에 있는 법률가죠. 덜 투쟁적이고, 덜 민중적인 에바디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것은 미국과 유럽의 ‘입김’이 작용한 것으로 봅니다.”

중동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지 않고 정권 교체가 가능한 나라는 이란밖에 없다. 우리는 그들이 정체되어 있는 줄 알지만 이란은 지금 보수와 개혁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고. 그녀의 말을 곱씹으면 결국 그곳에서 조금이라도 입지를 넓히려는 강대국의 전략이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된 셈.

사실, 중동은 서로간에 첨예하게 칼날이 서 있다. 아랍권을 자주 방문했던 그녀가 이스라엘에 처음 들어갔을 때, 공항에서 아무 대답도 들을 수 없는 상황에서 6시간 구금되었던 경험이 그것을 증명한다. 무시로 아랍권을 드나드는 그녀를 호락호락 보내줄 수 없다는 것인데, 그후로는 출발하기 전부터 우리 공관을 통해 말이나 서류를 넣는 버릇이 생겼다. 그들에게는 여권에 찍힌 그녀의 족적이 훈장이라기보다 낙인으로 보였나 보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세상을 바로 보게 한 창살들이며, 결국 그녀의 인생에 아로새겨진 훈장일지 모른다.

“분쟁 지역의 아이들에게서 세상의 모순을 발견하죠. 가슴 아프게도 그들의 눈에는 분노와 증오가 가득해요. 심지어 어린아이들이 온몸에 폭탄을 묶고 탱크에 뛰어들어 자폭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 증오의 눈빛을 보고 있으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는 듯해요. 그곳이라고 우리와 다를 것은 없어요. 엄마는 놀러 간 아이들을 기다려요. 그러나 그렇게 기다려도 오지 않으면 죽은 거예요. 시신도 찾을 수 없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 탓인지 아이들을 많이 낳아요.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요. 분쟁과 전쟁 속에서의양육하는 게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 번민들을 안고 살아가니 쉬 늙는 듯해요. 40대 여성이 60대 할머니처럼 보이거든요. 그래도 그들은 살아요. 화살을 돌릴 만한 인물이 분명히 있는데, 그냥 살아요. 순박하게 살아요. 그 모습에서 이념과 종교 등의 거창한 사상을 뛰어넘는 ‘진리’를 발견하게 돼요.”

# 프리랜서로서의 삶…나말고 누가 이 일을 할 것인가



그녀의 부모 역시 마찬가지다. 딸 많은 집의 막내라 하나 정도는 하고 싶은 일에 매달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녀의 역마살에 한마디하지 않는 그녀의 어머니에게서 뭔가 할 말을 참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이제 체력이나 자신감이 서서히 없어지기도 해요. 저라고 다른 사람과 다를 것은 없거든요. 나이가 드니 세상에 대해서 비굴해지는 정도가 커지는 것 같아요. 아는 분들은 그것이 겸손해지는 것이라 덕담을 해주지만, 작년하고 뭔가 달라진 것은 분명해요. 물론 이 일을 바로 놓지는 않을 거예요. 결혼요? 그것도 이런 생각의 연장선상에 있어요. 여지껏 혼자 일해왔잖아요. 그러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여대를 나오고 일에 매달리다 보니 남자를 만날 시간이 없었던 거지요. 그렇게 남자와 더불어 사는 것을 피하고 싶진 않아요.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한 쉰쯤이면 그렇게 누군가와 더불어 살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바쁘긴 바쁘게 살아왔다. 1년을 따지면 50분짜리 다큐멘터리를 6~7편 만들고 10분 안팎의 프로그램은 20편 정도 제작한다. 당연히 아이템은 분쟁 지역의 사람들이다. 그러니 시간이 없을 밖에.

솔직히 유럽을 돌며 문화 기행 같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해보고 싶기도 하다고.

여지껏 그렇게 많은 프로그램을 만들어왔는데, 대중에게 알려진 분쟁 지역 전문가는 모 방송사의 여기자 모씨. 좀 속상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우리끼리 얘기할 때 태생적인 한계라고 해요.(웃음) 방송사도 스타가 필요하잖아요.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 스타는 만들어지게 되어 있죠. 그러나 15년 동안 이 일을 해오면서 저 그들보다 못하지 않다, 내가 더 낫다는 자존심을 가지고 일하고 있어요. 일부 프리랜서들이 조직에서 훈련받지 못해서 개인적으로 트레이닝 기회를 갖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들이 작품에 반영되는 예도 있지만, 저와 같은 사람들이 이후에도 꾸준히 나올 것이기에 새로운 시도는 계속될 것이라고 봐요. 방송사와의 관계도 그 이전에 비해서 훨씬 좋아졌고요. 이런 게 발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찌 보면 지도자들에게서 보다 ‘투쟁 정신’의 일면이 보이는 NGO 활동가와 언론인에게서 희망을 본다고. 1991년 걸프전 당시 여성의 몸으로 전쟁의 포화에 뛰어들어 일약 ‘스타’가 된 크리스티안 아만포 CNN 국제부장,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이 베들레헴 예수 탄생 교회를 점거하고 무기한 단식 투쟁을 벌이자 목숨을 걸고 합류해 함께 투쟁한 케롤라인 콜 LA타임스 기자 등이 그 예인데, 머리가 아닌 몸으로 평화를 실천하는 모습에서 감명을 받았다고.

번듯하고 고상한 이념은 언제나 식언이 된다. 평등, 평등은 물론 좋은 말이나 어떻게 실천하느냐가 관건인 셈. 아무리 말이 앞서도 세상 곳곳은 분쟁과 전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곳의 사람들은 죽음에 무감하며 하루를 버텨내는 것이 전부. 삶이라기보다 살아가는 것. 그 피해자는 노약자와 여성, 사회적 약자들이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그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것이 그녀의 꿈이다. 감은 눈과 막힌 귀로 머릿속의 이상만 채찍질해서 떠벌이는 세상의 평화는 공허한 메아리. 그녀가 경각의 순간을 넘어 우리에게 전해오는 수많은 이야기 속에 귀 열고 눈떠서 ‘아픔’을 확인하고, 머리와 뜨거운 가슴으로 세계 평화를 기원할 밖에.

글 / 강석봉 기자  사진 / 박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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