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리그 최초의 여성심판 꿈꾸는 캐나다 교포 2세 국선경

메이저리그 최초의 여성심판 꿈꾸는 캐나다 교포 2세 국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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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를 위해서 음악의 꿈은 과감히 포기했어요”

미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초의 여성 메이저리그 심판을 꿈꾸는 캐나다 교포 2세 국선경. 지난해 세계 여자선수권대회에서 주심으로 활약하며 능력을 인정받은 그녀는 올해 10대1의 경쟁률을 뚫고 당당히 마이너리그에 입성했다. 비올라를 전공한 음악도가 야구 심판이 됐다. 한국 야구를 배우기 위해 고국 땅을 밟은 그녀를 만났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메이저리거 되고 싶다



미국 프로야구에서 활약하는 한국인 가운데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올해 스물한 살인 캐나다 동포 2세 국선경이 거친 남자들의 세계에 과감히 도전장을 내민 주인공이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네 살 때부터 음악을 접한 그녀는, 야구선수였던 아버지를 통해 자연스럽게 야구를 배웠다. 이민 초기, 그들이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장소는 교회였다. 당시 골프가 고급 스포츠로 인식되어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야구는 스포츠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도시락을 준비해 예배 후 야구를 즐겼고, 야구를 통해 협동심과 단결의식을 고취할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는 펜스에서 경기를 지켜보는 그녀가 부모에게는 한없이 사랑스러웠다.

“열두 살 때 여자 야구팀에도 들어갔어요. 동네에서는 남자들과 야구를 하기도 했죠. 고등학교 때 심판이 필요하다는 부탁을 받고 용돈을 벌어볼까 해서 참여했는데, 야구도 하고 돈도 버니까 기분이 좋던데요. 그게 인연이 돼서 야구로 인생의 목표를 바꿨죠.”

바이올린과 피아노에도 조예가 깊은 그녀는 몬트리올의 맥길대학에서 비올라를 전공했다. 고등학교 때는 ‘토론토 심포니 유스 오케스트라’에 선발될 만큼 수준급. 단원이던 친구들 7명과 같은 학교에 다니면서 학창 시절 내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학생들 전체가 참여하는 콘서트가 있었어요. 공연을 하기 전에는 늘 긴장하게 되거든요. 잠깐씩 쉬는 시간도 있지만 한 악장이 끝날 때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려요. 마지막 악장이 거의 끝날 무렵 어깨를 받치던 패드를 떨어뜨렸는데, 나무 바닥이라 소리가 장난이 아니었죠. 제가 뻔뻔스러운 표정을 지으니까 다들 누가 실수했는지 모르더라고요. 공연이 끝나고 옆 친구와 실컷 웃었어요.”

그런 그녀가 음악을 포기하고 야구 심판이 되겠다고 하자 집안의 반대는 만만치 않았다. 소리도 질러보고 협박도 했지만, 자유분방한 의식에서 성장한 그녀를 부모도 이길 수 없었다. 반대한다고 이해할 그녀도 아니었기에 그럴 바에는 철저한 후견인이 되기로 했다. 심판을 볼 때는 야구에만 신경 쓰기 때문에 잡념이 사라진단다. 또 시합할 때는 오직 자신의 판단만 믿는다. 야구의 매력은 늘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진다는 것.

투수가 던진 공이 포수가 아닌 심판의 야구공 주머니에 들어간다거나 홈런으로 넘어간 공이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다 결국은 구장 안으로 다시 들어오는 등 경기장에서의 이변(?)은 경기를 흥미롭게 한다.

야구 심판이 갖춰야 할 조건은 아무리 기분 나쁜 일이 있어도 표정관리를 잘해야 하며, 여자 심판이라고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 화장실에 가고 싶어눈물이 날 지경에도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심판이라는 직업을 이해하고 여행을 좋아하는 남자친구를 만나고 싶어하는 그는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않겠냐”며 웃는다. 심판을 보기 위해 여러 지역을 이동하다 보니 자연적으로 만날 시간도 줄어든다며 교사가 남자친구의 직업으로 가장 이상적일 것 같다고 한다. 주로 여름 시즌에 경기가 있으니 교사라면 방학 때는 함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야구에 본격적인 관심을 가진 그녀는 캐나다 온타리오리그 심판 자격증을 획득했다. 재작년 미국 플로리다 주 짐 에반스 심판학교에서 5주 동안 심판 교육을 수료한 뒤, 그 해 9월에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개최된 세계 여자선수권대회에서 주심을 보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싶어 부모를 졸라 미국 프로야구 전문 심판을 양성하는 해리 웬들 스태트 심판학교에서 전액 장학금을 받으면서 5백여 여명의 지원자들과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2차에 걸친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선발되어 루키 어드밴스리그에서 정식 심판으로 데뷔, 76경기를 소화했다.

“10시간 이상 차로 이동해야 하는 강행군이지만, 꿈을 이루기 위해 한 걸음 다가갔다는 사실이 기뻐요. 보수도 적은 편이지만 돈보다 중요한 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겠죠? 동료와 번갈아가면서 운전을 하는 것도 이제는 재미있는 추억이 됐어요.”



캐나다에는 아마추어 여자 심판만 3백 명에 이른다. 그러나 프로 심판은 국선경을 포함해 2명. 미국 프로야구 통산 6명밖에 안 된다. 그러나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여성은 아무도 없다. 고질적이고 전통적인 시스템으로 인해 마이너리그에서 메이저리그로 올라가는 비율도 고작 2%에 불과하다. 그녀의 꿈은 메이저리그로 가는 것이다.

우선 한국 야구를 배우기 위해 4주간 심판학교에 참여한 그녀는 야구 심판이 되려는 여자들에게 힘주어 말한다.

“절대로 포기하지 마세요. 꿈은 이루어진다고 하잖아요. 저와 함께 여자 심판이 되기 위한 도전해보는 거 어때요?”

심판을 하면서 대학에서 컴퓨터 사이언스와 경영학을 전공하겠다는 그녀는 메이저리그 심판이 되지 못할 때를 대비한다. 어눌한 말투 속에 살짝 웃는 미소가 사랑스럽다.

글 / 강승훈(객원기자)  사진 / 강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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