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선 하나가 이렇게 다른 삶을 요구하는가 보다. 우리가 흐느적이는 사이, 그들은 사선을 넘고 사선은 생과 사를 나누어놓는다. 용케도 빠져 나온 네 번의 목숨줄. 이제 그리도 오매불망하던 한국이지만 이들에겐 여전히 낯선 곳. 하지만 대동강호프를 찾는 인파만큼 사랑을 알게 된 주순영 사장과 그녀의 동무들.
“…내몽고 사막의 길/탈북의 숨통으로 믿었던 길이/나를 캄캄한 감옥에 가둘 줄이야/공포의 눈빛 온몸의 절규도/한낱 물거품…”(사막의 늑대처럼)
“…너무도 쉽게, 너무도 빨리/올 수 있었던 이 길을/먼 길 에돌아 이제야 왔습니다/온갖 고초 다 겪고서야/이제야 왔습니다…”(마침내 여기에)
“부모 형제, 남편과 자식들이 살고 있는 땅/ 빛 바랜 사진첩의 사진들이 웃고 있는 곳/ 그러나 세월을 거슬러 꿈 많던 그 시절로/갈 수 없는 고향/어둠 속 숨죽이고 있는 공포의 땅은 더 이상 고향이 아니었다…”(북송)
최고 배우가 겪은 최악의 현실

사선을 넘었다. 네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으며 그 모진 생명을 이었다. 이제 그녀는 희망을 꿈꾼다.
상계동 아파트 단지의 상가 언저리나마 그녀에겐 행복한 공간. 생환의 아픔을 함께할 동무가 있어 더없이 행복하다. 입국 초기 이예진이란 이름으로 불리던, 그 감춰진 이름을 들춰낼 수 없었던 주순영씨(39)는 북녘을 잊지 않기 위해 지난해 8월 ‘대동강호프’를 차렸다. 다분히 북조선스러우면서도 다분히 자본주의 남한스러운 단어의 조합으로 생계의 끈을 잡고 과거를 이야기하기보다 미래를 꿈꾸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것.
‘대동강호프’에서 같이 일하는 동무(장예진 40, 강예정)들은 주중국 한국영사관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 안도만큼이나 떨리는 한마디를 외쳤다. “김정숙이다!”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생모이자 김일성의 처인 김정숙은 북한의 ‘인민’들에게 ‘영원한 어머니’였다. 주순영씨는 북한 영화에서 바로 김정숙의 역을 한 배우였고, 그 정도 영화는 북한 주민이면 한번쯤 다 보았기에 그녀의 얼굴을 한번에 알아보고 자신도 모르는 새 그렇게 외마디의 탄식을 흘렸던 것이다.
“북한에서 같았으면 이렇게 마주보고 얘기도 할 수 없었을 기야요. 지금은 한 집에서 살고 한 일터에서 이렇게 언니 동생으로 지내지만, 그때만 해도 김정숙 역을 전담했던 순영이가 눈앞에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디요.”
같이 일하는 장예진씨(40)의 당시를 회고하는 이야기는 ‘동네 술집’ 주인 주순영씨를 일약 스타덤(?)에 올리기에 충분했다. 인사치레가 아니라 그녀는 분명 스타였다.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17세 나이에 인민군 호위사령부(우리나라로 치면 수도방위사령부) 협주단에 들어가 연극배우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그녀가 인생의 전환점을 맞은 것은 1983년. 예술영화 ‘사령부를 멀리 떠나서’에서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 역을 맡게 되면서부터다.
“배역을 맡는 순간 배우는 실제 인물과 똑같은 대접을 받게 되거든요. 분장을 마치고 돌아서면 그때부터 사람들은 김일성 역에게는 ‘수령님’, 김정숙 역에게 ‘어머님’이라는 존칭어를 씁니다. 감독이나 촬영가도 배우에게 함부로 하지 못합니다. 화가 난다고 욕을 하거나 소리를 지르는 일도 있을 수 없고요. 마치 진짜 김정숙이 된 기분이었죠.”
이후 ‘민족의 태양’속편 ‘태양은 빛나리’ 등의 영화와 혁명 가곡, 연극 등에서도 김정숙 역을 도맡았다. 김일성 주석의 직계 가족을 맡은 사람을 ‘1호 배우’라고 하는데, 바로 그녀가 그랬던 것이다. 당시 갓 스물을 넘긴 나이에 그녀는 말그 대로 ‘공훈배우’가 되었다. ‘인민배우’ 다음 서역인 공훈배우는 행정부의 국장급에 해당하는 월급을 받고 생활에서도 그런 대접을 받았다. 그런 그녀가 왜 이 땅에?
다 북한의 경제 상황과 관련이 깊다. 김일성 사후에 호위사령부가 축소되고 김정일 친위대가 부상하면서 주순영씨도 ‘퇴출’ 대상이 되었다. 게다가 90년대 중반부터는 최악의 식량난이 겹치면서 이들에게 주어지던 특별공급(고위 간부에 준하는 공급)도 모두 끊겼다.
“평양 옥류관 앞 경상동, 1호 배우들이 모여 사는 아파트가 있어요. 특별대우는 경제난으로 모두 끊겼고 외화가 없으면 아무것도 구입할 수 없는데, 얼굴 때문에 밖에도 나가지 못해 사는 것이 말이 아니었죠. 체면 때문에 굶는다고 말도 못하고, 사람들은 잘 사는 줄 아는데 그때는 1호 배우들도 굶어죽지 않은 게 다행입니다.”

인생이 꼬이려고 들면 웬만한 ‘액막이’가 아니면 거스를 수 없다. 특별대우를 받던 1호 배우들은 백두산창작단 관리 대상에서 97년경 국립연극단으로 소속이 옮겨져 위상은 더 초라해졌다. 다행히도 주순영씨는 호위사령부 소속으로 함경북도 경성에 위치한 온포특각(옛 주을온천), 김일성 별장에 배치받아 좋은 생활은 유지됐다. 먹고사는 데 문제가 없던 그녀에게도 사회의 혼란은 견디기 힘든 상황을 가져왔다. 생계의 위협이 서서히 다가왔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과는 다른 위치에 있었기에 남한 방송을 손쉽게 들을 수 있었고,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 중국의 성장상을 알았던 터라 그녀 역시 중국에서 새로운 활로를 찾으려 했다.
‘빽’을 이용해 해외로 나갈 수 없는 안내원 신분으로 출국 허가증을 받고 중국 땅을 밟았다. 사실, ‘병환중인 어머니 약을 구할 수도 있겠구나’란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돈이란 것이 그리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라 대금 결제 때까지 중국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냥 가면 돈이 없어서 약도 가지고 들어갈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그게 악수였다. 북한에서 들려온 소식은 이미 문제가 되었으니 들어오지 말라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체류하면서 다방을 차렸고 용케도 잘 되어 돈이 모이나 싶었다. 그러나 안 되는 사람은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고, 중국 공안에 체포되어 북한에 압송되기에 이른다.
“저 같은 경우가 한둘이 아니었기에 그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지 알고는 있었어요. 북한 국경수비대에서 가지고 있던 3백 달러를 쥐어줬죠. 그랬더니 수영 못하는 저를 안전하게 끌어서 강을 건너게 해주었어요. 다시 돌아온 곳에서 할 줄 아는 게 있어야죠. 다시 다방을 차렸어요. 그랬더니 또 공안이 들이닥치더라고요. 이번엔 여유 있게 뇌물을 주고 빠져 나왔어요.”
그러나 장사가 언제나 잘되란 법은 없다. 게다가 종업원이 인사 사고를 내는 등 더 버틸 수 없는 상황이 이어졌다. 결국 허술할 것 같은 내몽골 쪽으로 방향을 틀어 탈출을 시도했지만 그 역시 불발. 국경수비대에 잡혀 철창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다시 연변으로 이송되었지만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뇌물 주는 데도 요령이 생겨 다시 경각의 상황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돈을 모아 베트남으로 우회하려다가 다시 잡혔고 또, 빠져 나오는 상황이 이어졌다. 이제는 방법이 없었다.
이 과정은 계간 시 교양지인 「시로 여는 세상」 지난해 가을호에 자세히 나와 있다. 주순영씨가 탈북 체험시 5편을 공개했기 때문이다.
희망주점에는 사랑이 넘친다

우여곡절 끝에 2002년 한국대사관을 목표로 진입을 시도해 2003년 1월, 한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이제 새로운 삶이다. 연일 이어지는 손님들의 성원 덕에 가게를 늘려야 하지 않을까 하는 즐거운 걱정도 하게 되었다. 기다리는 손님들 때문에 확성기로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 자리 좀 양보해주세요”라고 할 정도라고.
“어떤 분들은 기다리는 손님들이 많으니 맥주 한잔 드시고 나가서 몇십 분 기다리다가 다시 와서 먹고, 또 나가 기다리다가 먹고 하는 경우도 있어요. 이런 분들이 많이 오시니 술집이지만 치근덕거리는 분도 없고 그저 감사하는 마음으로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학습도 시행착오를 저질렀다. 작년 11월 초, 대동강호프에서 미성년자에게 술을 팔다 적발, 관할 서울 노원구청에서 3개월 영업정지 처분을 받았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 31일 서울 행정법원에 구청을 상대로 영업정지 처분 취소 청구소송과 집행중지 신청을 제기, 7일 법원에서 영업정지 1개월과 벌금 1백만원이라는 조정 권고안을 받아냈다.
“남한 청소년들이 조숙하고 세련돼 구분하기 어려워서 생긴 일이거든요. 그때 이후로는 정말 좀 젊은 손님이다 싶으면 조심조심해요.”
검찰과 구청측에 선처를 호소해 가게 문을 닫는 것은 막을 수 있었지만, 그만큼 자본주의 학습은 ‘치도곤’을 맞으며 톡톡히 치른 셈이다.
“연초에 동네 인근의 사회복지 시설에서 노약자들과 시간을 보냈어요. 모두 고향을 찾고 하지만 우리는 만날 사람들이 없잖아요. 갈 곳 없는 노친네들과 한때를 즐긴 것이 너무 좋았거든요. 돌아오는 설날에도 그분들과 함께 보낼 거예요.”
자유를 찾아온 곳. 이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품게 했지만 여전히 통한으로 얼룩진 이산의 아픔은 어쩔 수 없다. 주순영씨는 어린 외동딸이 눈에 선하고, 동거하는 장예진·강예정씨 역시 두 자식을 두고 온 어미의 애절함을 가슴에 묻고 있다. 일요일이면 근처 교회에서 머리 숙여 기도 올리는 이들의 기도문이 불을 보듯 뻔하다. 어쩌면 대동강호프에서 부어주는 맥주는 이들의 눈물이 녹아 있는 통한주요, 이들의 미래의 넘쳐나는 희망주일 수 있다. 이들과의 짧은 만남이 통일을 염원하는 가슴 저림을 깊게만 만든다.
글 / 강석봉 기자 사진 / 임재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