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자의 편안한 쉼터 ‘수선화의 집’ 김기혜 원장

노숙자의 편안한 쉼터 ‘수선화의 집’ 김기혜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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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하다고요? 가치 있게 살고 싶은 내 욕심을 채울 뿐입니다”

남들이 싫어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 김기혜 원장.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지금도 서울역을 오가며 노숙자들을 살핀다. 그녀는 포주로 오해받아 폭행을 당한 적도 있다. 여성들을 위해 노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작년 말 YWCA에서 수여하는 ‘한국여성지도자상’을 수상한 김원장은 노숙자들에게 오히려 배우는 게 많다고 한다. 그녀가 쉼터를 운영하면서 느꼈던 일상의 행복을 소개한다.

소외된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사랑입니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취재하는 것보다 물품이나 금전적인 도움이 간절하다는 김기혜 원장(58). 2002년 4월, 여성 노숙자들의 쉼터인 ‘수선화의 집’을 열었다. 자신의 아파트를 담보로 9천만원을 빌려 목동에 아담한 보금자리를 마련, 현재는 17명의 여성들이 서로의 아픔을 어루만지며 생활하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고아나 정신장애를 겪고 있어서 주변의 도움이 시급한 실정. 외면당한 사람들은 이제 갈 곳이 없다. 상처 입은 마음을 보듬어주다보면 어느새 그들은 희망을 이야기한다. 여기 사는 사람들은 구김살이 없다. 재미없는 이야기에도 웃어주는 여유도 생겼고, 김 원장을 친어머니나 언니처럼 여긴다.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생긴 셈이다.

수선화의 집은 여느 가정과 다를 바 없다. 아침에 일어나서 식사 준비하고 청소를 하고 나면 자유 시간이다. 책을 읽거나 인터넷을 검색하기도 하고, TV도 핏줄이 다른 사람들이 살을 맞대고 살아간다는 것과 그들이 모두 여성이라는 점이다.

“제가 여자다 보니 자연스레 여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길거리에서 방황하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그들의 딱한 사정을 이해하게 되는데 그들만의 문제라고 보긴 힘들어요.왜 여자들이 노숙을 하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는데 오죽하면 노숙을 생각했겠어요?”

쉼터에는 나름대로 규칙이 있다. 샤워는 일주일에 두 번만 할 수 있고, 공동으로 사용한 물품은 분담해서 정리한다. 사회에 빨리 적응할 수 있도록 책임감을 심어주기 위함이다. 또 대화를 통해 그들의 의견을 쉼터에 반영하기도 한다. 점심을 먹고 나면 자연스레 거실로 모인다. 요즘은 부업으로 스타킹을 뒤집는 일을 한다. 반나절 일하면 2천5백원 정도를 번다. 사람마다 일하는 속도는 달라도 보수는 똑같다. 서로 배려하는 마음에서 똑같이 받기로 결정했다. 폐지도 모으고 빈 병도 줍는다. “한 달 꼬박 일해서 월급을 받으면 필요한 것도 사고 먹고 싶은 것도 사 먹는다”는 은영(가명)이는 “여자들끼리 생활해서 부담도 없고 서로의 아픔을 들춰내려 하지 않으니까 오히려 편하다”고 말한다.

쉼터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는 김 원장의 집이 있다. 아픈 사람이 있으면 새벽이라도 한 걸음에 달려오고 수시로 들락거려야 하기 때문이다. 법인이나 단체가 아닌 개인이 쉼터를 운영하다 보니 정부에서 주는 지원금은 일체 받을 수 없다. 전적으로 후원에만 의존해야 하는 상황. 아직까지는 들어오는 돈보다 나가는 것이 많다. 작년부터는 소식지를 만들어 후원하는 사람들에게 보내고 있다. 노숙자들이 쉼터에서 생활하며 느낀 점이 실려 있고, 맨 마지막에는 후원받은 금액과 물품이 빼곡히 적혀 있다. 고춧가루부터 떡 하나까지 빠뜨리지 않는다.

“정부나 법인이 마련한 시설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머무를 수 없어요. 장기적으로 보더라도 6개월이 고작이거든요. 쉼터에는 손발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헌팅턴무도병’이라는 불치병을 앓는 사람도 있는데, 장애인 요양 시설에서조차 외면당했죠. 그들에게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다시 거리로 돌아가야 할지도 몰라요.”

그녀는 아버지로 인해 자연스럽게 남을 돕게 됐다.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헌신적으로 보살피는 아버지의 모습에 감동했다. 아이들 때문에 가족은 늘 뒷전이었지만, 자신보다 아이들을 소중히 생각하던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처음에는 아버지를 많이 원망했어요. 돈이 없어서 내복 바람으로 학교에 다녀야 했을 정도니까. 가난한 살림이라 먹고살기도 빠듯한데 남에게만 신경 쓰고 가족에게 소홀하니 화가 치밀더라고요. 나이가 들수록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더해가네요. 아버지와 같은 길을 가는 제 모습에 저도 깜짝 놀라요.”

이화여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외국계 기업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엘리트가 노숙자들을 위해 산다고 했을 때 미쳤다고 하는 친구들도 있었고, 의협심이나 영웅심에 사로잡혔다고 몰아붙이는 사람도 있었다. 그녀는 불혹을 앞두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더 많은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 심리학을 공부했는데 그것도 부족해 최근에는 서강대 공공정책대학원을 졸업, 사회 사회복지사 1급 자격증도 땄다.

김 원장이 여성들, 특히 노숙자들에게 관심을 가진 건 1998년이었다. IMF로 인해 졸지에 일자리를 잃어버린 노동자들이 거리로 몰려나왔기 때문. 그녀는 불교단체의 지원으로 마련된 복지시설 ‘화엄동산’과 인연을 맺었다. 하루에 2시간 정도 노숙자들의 카운슬링을 맡아 달라는 친구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갑상선 암을 치료한지 얼마 되지 않아 말하는 게 불편했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만으로 기뻤다. 상담만 하기로 결정하고 화엄동산에서 일했는데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아 노숙자들을 데리러 직접 나가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포주라는 오해도 받고, 심지어 폭행을 당한 적도 있다. 지금까지 상담하고 보살펴준 노숙자만도 5백 명이 넘는다.

김 원장은 쉼터를 거쳐간 사람들이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 가장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쉼터에서 나간 뒤 찾아오는 사람들은 별로 없지만, 그들에게 한순간이라도 도움이 됐다면 더 바랄 게 없단다. 나누는 사랑에서 행복을 찾는 그녀는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빨리 안정된 생활을 누리길 바란다. 그들도 또 다른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길 기원해본다.

글 / 강승훈(객원기자)  사진 / 이규열

장소 / 수선화의 집(2644-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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