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그를 야구선수로 기억하는 팬들이 있다. 잘나가던 야구선수가 헤어 디자이너로 변신한 것은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니다. 그의 말대로 ‘국내 최초의 야구선수 출신 헤어 디자이너’인 김민국.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성공의 찬스로 거머쥔 이 남자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고교 3학년 때 만난 아내가 가장 든든한 후원자
마흔 살쯤 야구장 달린 펜션 갖는 게 꿈

‘글쎄… 저 사람이 헤어 디자이너? 에이~ 아닐 거야. 헤어 숍에 물건 대주는 거래처 사장님 아닐까?’ 김민국의 첫인상이다. 183cm에 100kg을 웃도는 건장한 체구, 떡 벌어진 어깨, 솥뚜껑만한 손, 그리고 마운드를 뒤흔들던 우렁찬 목소리. 아무리 뜯어봐도 헤어 디자이너라기보다는 운동선수 스타일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약 15년 동안, 제 손에 가장 많이 들려 있던 물건은 숟가락, 젓가락이 아닌 야구공과 글러브였습니다. 밥 먹고 잠자는 시간 외에는 야구장에서 사는 게 전부였어요. 평생 야구만 할 줄 알았죠. 근데 가장 왕성하게 활동할 나이인 스물일곱 살에 마운드를 떠났어요. 부상 때문이었죠. 그후 헤어 디자이너가 됐습니다.”
김민국(32)은 건국대를 졸업할 당시만 해도 야구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신인 프로야구 선수 중 한 명이었다. ‘무쇠팔’이라 불리던 그를 마운드에서 내려오게 만든 일은 부지불식간에 일어났다. 쌍방울 레이더스에 입단한 지 두 달 정도 지났을 때 러닝 훈련 중 인조 잔디의 움푹 파인 곳을 헛디딘 그는 오랜 부상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대퇴부 인대가 늘어나 혼자서는 걸어다니기도 힘들만큼 부상이 심했다. 집 안에서 지낸 시간이 4개월, 그후에도 김민국은 1년여를 벤치에서 보냈다. 팀 동료들이 야구공을 쫓아 잔디에서 뛰고 구르는 동안 그는 긴 한숨을 쉬며 지루하게 괴롭히는 부상과 씨름을 했다.
“그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간이었죠. 야구를 그만두는 것보다 두려운 건 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었어요. 친구들이 공부할 때 저는 야구만 했거든요. 근데 이제 와서 다른 걸 해야 한다니… 앞이 막막하더라구요.”
야구공을 들었던 손에 헤어 디자이너용 가위를 드는 일이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당시 김민국의 어머니는 30여 년 동안 헤어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었고, 한살 터울의 남동생 역시 헤어 디자이너로 명성을 쌓아가고 있었기 때문. 그가 마음만 먹으면 베테랑 헤어 디자이너 두 사람이 ‘헤어 디자이너 김민국의 새로운 탄생’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쉽게 마음의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야구만 하던 내가 다른 사람의 머리를 만질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그의 발목을 잡았기 때문. 하루에도 열두 번씩 ‘하자, 말자’ 결심을 번복했다.
“동생은 럭비 선수였어요. 고등학교 졸업 후 어머니의 숍에서 미용 기술을 익혔죠. 제가 은퇴할 즈음에는 동생 이름의 미용실이 이대 앞에 떡하니 자리를 잡았죠. 혹시 아세요? 김경록이라는 조금 촌스러운 헤어 디자이너? 그 사람이 바로 제 동생이에요. 동생한테 헤어 디자이너 수업을 받았어요. 왕 스승은 어머니고 행동대장(?)은 동생이에요.”

어렵게 결심한 만큼 그는 헤어 디자이너 수업을 받았다. 어머니와 동생에게 배우다 보니 기술을 전수받는 시간도 훨씬 짧아졌다. 말 그대로 엑기스만 뽑아서 ‘쪽집게 수업’을 받다 보니 다른 사람들이 5년 이상 배울 것을 그는 1년 6개월 만에 마스터했다. 물론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다.
“초창기에는 퍼머 말다가 이게 아니다 싶으면 어머니나 동생한테 사인을 보냈어요. 그럼 어머니께서 ‘저기, 김민국 선생 저쪽 손님 좀 봐주실래요?’ 그러고는 제가 딴 손님한테 간 사이에 잘못된 부분을 고쳐주셨죠. 그런 어머니께서 벌써 환갑을 넘기셨어요. 지난해 중반까지만 해도 활발하게 활동하셨는데, 이제는 단골손님 부탁이 아니면 숍에 나오지 않으세요.”
김민국이 헤어 디자이너로 변신한 지 올해로 6년이 됐다. 그가 야구공을 놓고 헤어용 가위를 잡았을 때 “부상 치료를 잘 해서 다시 마운드에 서라”며 몸져눕기까지 했던 아내는 얼마 못 가 마음을 바꿨다. 헤어 디자이너로 변신한 그에게 “당신의 선택이 현명했다”며 김민국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가 된 것. 고등학교 3학년 때 만나 프로에 입단할 무렵 결혼한 아내와 사이에 다섯 살짜리 딸과 두 살짜리 아들이 있다. 부러울 것이 없다. 그래서 김민국은 헤어 디자이너로 변신한 것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2004년을 맞아 김민국은 많이 바빠졌다. 헤어 디자이너로서 새로운 변신을 서두르고 있기 때문. 지난해부터 그는 ‘붙임머리’에 홀딱 빠져버렸다. 이름도 생소한 ‘이런 붙임머리 봤니?(kimkim.co.kr)’라는 붙임머리 전문 미용실을 개발한 건 그의 아이디어 덕분이다.
“처음 헤어 디자이너가 됐을 때부터 붙임머리에 관심이 많았어요. 붙임머리는 짧은 헤어스타일에 가발을 붙여서 긴 헤어스타일을 만드는 거예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헤어스타일은 가장 민감한 부분이거든요. 붙임머리 손님은 저희 숍에서만 한 달에 2백~3백명이에요.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붙임머리에 관심을 보이죠. 하지만 비싸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게 단점이었어요. 제가 그것들을 싹 없앴죠.”
암흑일 것 같았던 인생의 터닝 포인트에서 헤어디자이너로 변신해 당당하게 성공한 김민국. 그에게는 마흔 살 즈음에 이루고 싶은 꿈이 하나 있다.
“제주도에 작은 야구장이 달린 펜션을 짓고 싶어요. 프로야구 시즌에는 일반인들에게 임대하고, 시즌이 끝난 후에는 야구선수 가족들이 편하게 쉬면서 운동도 할 수 있는 곳 말예요. 그때쯤이면 저도 우리 아이들과 어울려 야구공을 던지고 있겠죠.”
인생에는 세 번의 찬스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찬스가 언제 왔는지, 언제 갔는지도 모르고 산다. 극소수의 사람만이 찬스를 성공으로 이끄는 것. 김민국은 자신에게 날아온 찬스를 잡았고, 성공을 향해 던졌다. 그리고 지금 그 결과에 만족하며 미소 짓고 있다.
글/경영오 기자 사진/한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