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이후 박사 과정 밟고 있는 이애란

탈북 이후 박사 과정 밟고 있는 이애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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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선을 넘어 얻어낸 자유의 몸, 통일되면 북한 주민들 위해 자원봉사자 될 거예요”

1997년 탈북한 이애란씨는 자유를 찾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반겨주는 곳은 없었다. 궁리 끝에 그녀는 보험설계사 일을 시작했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일한 결과 한 달에 2천7백만원을 받는 고액 급여자가 되기도 했다. 최근 보험회사를 나온 그녀는 식품영양학 공부를 시작, 이화여대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통일이 되면 북한 사람들에게 원없이 먹거리를 만들어주고 싶다는 그녀를 만났다.

보험 일하며 안정된 삶 찾아

이애란씨(40)는 북한에서 살기 어려웠다. 경제적으로도 힘들었지만, 월남 가족이라는 이유로 홀대를 받은 것이다. 특히 그녀의 할아버지가 남한에서 사회활동을 한 것이 북한에서는 문제가 되었다. 이런 사실이 북한 당국에 알려진 뒤에는 평양 시내에서 살 수 없었다. 그녀가 열한 살 되던 해, 양강도로 강제 이주됐다. 국내로 따지면 오지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23년을 살았다. 서른세 살 때 한 남자를 만나 결혼했고, 아이도 낳았다. 그러나 그녀는 늘 남한 사회를 동경했다. 자유를 찾고 싶었던 것이다.그러던 어느 날, 기회가 찾아왔다. 미국에 친지 한 분이 사셨는데, 그 인맥을 통해 탈북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진 것이다.

처음엔 남편과 함께 할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일을 그르치는 날엔 큰 화를 부를 것 같았다. 결국 그녀는 남한으로 가는 날까지 남편에게 알리지 않았다. 통일이 되면 다시 찾아오마 결심하고 짐을 꾸렸다. 일가족 9명과 생후 4개월 된 아들을 안은 채 죽기를 각오하고 사선을 넘었다. 1997년 10월의 일이다.

탈북에 성공하긴 했지만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직장을 구하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처음 일한 곳이 호텔이었다. 시트 정리부터 룸 청소까지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했다. 그러나 돈은 쉽게 모이지 않았다. 아이를 키우며 생활하기엔 급여가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남한 땅을 밟았을 때의 감격은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꿈을 꾼 듯했으니까요. 그런데 막상 사회에 나와보니 쉽지 않았어요. 처음 호텔 일을 시작했는데 한 달 월급이 40만원이 채 안 됐어요. 탈북자라고 하면 인식이 안 좋을까봐 조선족이라고 말했는데, 생각보다 월급을 덜 주더군요. 아끼고 아껴 겨우 살기는 했지만 늘 허덕였죠. 그래서 시작한 것이 보험 일입니다. 주위 사람들이 하기 힘든 일이니 다른 일을 찾아보라고 했지만, 당시엔 어떤 일이라도 해서 돈을 모아야 했거든요.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보험설계사 일을 하면서 보람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돈도 어느 정도 모였고 무엇보다 재미있었어요. 제가 남한에 와서 처음으로 큰돈을 만져보지 않았나 생각해요.”

보험일을 시작하고 나서부터 신바람이 났다. 탁월한 수완으로 한 달 월급을 2천7백만원까지 받는 보험왕으로 등극했기 때문이다. 보험업계에서 그녀의 이름이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S보험사 전체 판매 실적도 그해 10위권까지 치솟았다. 2001년 10월엔 보험업계에서 판매 실적이 높은 사람에게 주는 슈퍼급 진급 대상자가 되었다. 탈북한 지 3년 만에 안정된 직장을 찾은 이애란씨. 그러나 그녀에겐 늘 아쉬움이 있었다. 바로 공부에 대한 미련이었다.

보험일을 그만둔 그녀는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북한 신의주경공업대학에서 식료공학부를 전공한데다 남한의 식약청과 비슷한 과학기술위원회에서 13년간 근무한 경력이 있어서 공부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2001년엔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남한 거주 북한 이탈 주민의 식생활’이란 주제로 논문을 발표, 석사학위를 받았다.



“신의주경공업대학에서 전공한 것이 식품영양학이라 남한에 정착하면 공부하리라 마음먹었어요. 탈북 초기엔 생활고 때문에 전공을 살리지 못하다가 이화여대에서 청강하면서 기회가 왔지요. 우연히 알게 된 이대 교수님이 장학금 혜택도 있고 북한에서 공부한 전공을 살릴 수 있으니 해보라고 권유해주셨어요. 그래서 대학원에 무사히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힘든 과정도 있었다. 북한에서 영어를 공부하지 못한 탓에 진도를 따라가기가 너무 버거웠던 것. 강의는 대부분 영어로 진행됐기 때문에 도무지 수업을 따라갈 수 없었다. 오전 7시부터 오후 9시까지 아예 학교에서 사는 것은 물론 영어학원까지 다니며 수업 진도를 맞췄다.

“처음엔 공부하는 데 별 어려운 점이 없겠지 생각했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소외되는 느낌도 들었구요. 그래서 매일 오전 6시에 일어나 학원에 다녔습니다. 러시아어는 조금 할 줄 아는데 영어는 정말 모르겠더라구요. 그렇게 1년 정도 공부하다 보니 어느 정도 이해가 되더라구요. 독한 결심이 없었다면 석사학위를 받기 어려웠을 겁니다.”

그녀는 현재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탈북 이후 어려운 과정을 모두 극복하고 교수의 꿈을 키워나가고 있는 것. 그렇지만 북한에 두고 온 남편을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며 말을 잇지 못한다.

“남편에게 말하고 같이 올 생각도 했지요. 그런데 그럴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탈북하려는 계획이 사전에 알려지면 더는 갈곳이 없었거든요. 강제 추방이 아닌 더한 고초도 겪을 수 있구요. 남편도 당시엔 힘들었겠지만 잘 견뎌내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미안하기도 하고 보고 싶기도 합니다.”

이애란씨의 꿈은 박사학위를 받은 뒤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살려 남북한 문화 교류에 교량 역할을 하는 일이다. 물론 하루빨리 통일이 돼서 북한의 가족들과 상봉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다.

“제가 그곳에서 살다 와서가 아니라 북한 주민들 너무 힘들게 살고 있어요. 헐벗은 건 말할 것도 없고, 밥 굶는 일도 허다하거든요. 이곳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으면 주식으로도 가능한 대용식품을 만들고 싶어요. 사람이 먹는 것부터 해결돼야 문화도 즐기고 교양도 쌓는 거잖아요. 북한의 가장 큰 문제점은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는 겁니다. 남한이 인도주의적인 입장에서 북한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있지만 아직도 부족한 게 많아요. 제가 식품영양학을 전공한 만큼 앞으로 북한 주민들의 식생활에 관련된 일에 매진할 생각입니다.”

글 / 연세영(뉴스메이커 기자)  사진 / 전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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