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 방송 미리 엿보는 차트 디자이너 임은지

인기 방송 미리 엿보는 차트 디자이너 임은지

댓글 공유하기
“방송 3사 뉴스·오락 프로그램 차트는 제 손에서 만들어진다구요”

뉴스나 오락 프로그램에서 초대 손님들의 생각이나 사생활을 차트로 보여주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어색한 분위기에서도 귀여운 캐릭터와 튀는 문장으로 꾸민 차트를 하나씩 벗겨가면 재미난 입담이 나오기도 한다. 이런 차트는 누가 만들까? 방송 3사에서 종횡무진 활동하고 있는 임은지의 하루.



임은지씨(33)의 하루는 다음날 오전 5시경에서야 끝난다. 아침 뉴스에 사용할 보드판이나 삽화를 돌리고 나면 그제야 한숨을 쉬며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우유나 신문 배달하는 사람들과 아침 인사를 나눈 지도 벌써 5년째.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면서 행운아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우연한 인연이었어요.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로 사무 보조 일을 하고 있었거든요. 점심식사 자리에서 전공에 대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오면서 처음 일을 하게 됐습니다.”

대학 3학년 시절, 중소기업진흥공단에서 서류정리나 복사 등 사무원들을 위해 보조 업무를 했다. 이화여대에서 정보디자인학과를 전공하고 있던 그녀에겐 너무나도 동떨어진 업무였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위해 조직 생활의 경험을 쌓고 싶었다. 틀에 박힌 학교 생활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에 대한 모험이 필요했다.

그녀는 망설임없이 일을 시작했다. 우선 인사하는 습관부터 바꿨다. 큰 소리로 환하게 웃으며 던지는 인사에 처음엔 다들 당황하며 그냥 지나치기 일쑤였다. 그렇게 한 달 정도 흘렀을까. 점점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우직하게 맡은 일을 해내던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각종 외부 전시 행사로 인해 디자인팀에 일이 쌓이면서 꼼꼼하게 디자인할 사람이 필요했다. 모 중소기업 홍보판 디자인이 그녀에게 맡겨진 것이다. 그날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고.

“단순 보조 업무를 하면서 전공과 관련된 일을 하게 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어요. 행운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지요.”

홍보판을 제작하며 홍보 비디오를 만들기 위해 스튜디오 촬영 현장을 가게 됐다. 자신이 만든 홍보 문구에 대한 반응과 화면 속에서 비쳐지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였다. 한창 활영을 하던 중 우연히 스튜디오에 놀러 온 모 방송국 PD의 눈에 띄었다. 옆에서 보조 업무까지 해주던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바로 연락처를 주고받은 것.

“연예인들도 길거리 캐스팅이 있잖아요. 말하자면 저도 그런 셈이죠(하하).”

휴대폰 입력 용량으로도 모자란 인맥

맡겨만 주면 무조건 해내고야 만다는 철학으로 시작한 일이 이젠 하나의 사업체로 번져갈 정도다. 밀려오는 일로 직원과 밤새는 건 기본. 매일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아침 뉴스는 전날 저녁에 일거리가 주어진다. 뉴스 내용을 보고 상상력을 동원해 이런저런 아이디어 회의를 하다 보면 다음날 오전 2시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해 마무리하고 나면 4시가 된다. 이때부터 ‘배달’에 나선다. 여의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경비실에 커다란 차트와 작은 그림을 맡겨두면 임무 완료. 생각하기조차 싫은 실수로 큰 일을 치를 뻔한 경험도 있다. ‘배달 사고’가 그것.

“MBC에 가져다 두어야 할 것을 KBS 경비실에 맡겨둔 적이 있었어요. 방송 10분 전에 연락받고 다시 전달했습니다.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식은땀이 날 지경이라니까요. 3일 밤을 꼬박 새면서 일하고는 깜빡 졸아 방송 바로 직전에 전달한 적도 있었어요. 일을 하고 나서 긴장이 확 풀렸던 것 같아요.”

컴퓨터로 작업하는 일이 많다 보니 정전이나 번개가 제일 두렵다고. 3년 전 장마철에 밤새워 해놓은 일을 번개 한 방에 고스란히 날린 적도 있단다.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 ‘느낌표’ ‘아주특별한 아침’ ‘찾아라 맛있는 TV’ KBS ‘TV는 사랑을 싣고’ ‘비타민’ ‘아침 마당’ SBS ‘한선교 정은아의 좋은 아침’ ‘생방송 모닝 와이드’ 등이 그녀의 활약 무대. 그녀가 자랑스럽게 말하는 건 단 한 번도 약속을 어긴 적이 없다는 점이다.  시간과 장소, 똑 떨어지는 디자인은 물론 배달까지 완벽하게…. 일 잘한다는 소문이 나면서 케이블 방송에서도 그녀를 찾는다.

“2년 넘게 일하면서 한 번도 만나지 않은 방송국 사람들도 있어요. 상의는 전화나 팩스, 이메일로 하고 송고는 출근 전 새벽에 하니까요. 그러다 보니 전화나 이메일로 안부를 묻게 되죠. 방송의 철칙은 약속을 지키는 것이니까 그것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어요.”

일에 쌓여 지내다 보니 여행 가는 건 꿈도 못 꾼다. 명절도 없고 휴가도 없다. 때론 훌쩍 어디론가 떠나고 싶지만, 마음을 잡고 다시 일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물론 저 없어도 일할 사람들은 많겠죠. 하지만 저만 믿고 일을 맡기던 사람들에게 예의가 아닌 것 같아요. 믿음이 쌓이다 보니 가끔 제 회사는 아니지만 애사심도 생기더라구요. 후배들도 양성해 좋은 길로 인도해주고 싶어요.”

글 / 강수정(객원기자)  사진 / 박남식

화제의 추천 정보

    Ladies' Exclusive

    Ladies' Exclusive
    TOP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