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암 3기에도 의료봉사 펼치는 히포크라테스 오흥룡 원장

직장암 3기에도 의료봉사 펼치는 히포크라테스 오흥룡 원장

댓글 공유하기
“제 몸이 병든 후에야 환자들의 고통이 느껴지더군요”

오흥룡 원장은 직장암 3기 환자다. 제천에서 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오원장이 암 판정을 받은 것은 4년전.

수술과 항암 치료 등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도 그는 의료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자신이 병든 후에야

환자들의 고통을 이해하게 됐다는 오원장의 나누는 삶…

어렸을 때 남을 돕는 것이 진정한 봉사죠!

오흥룡 원장은 환자에게 내뱉었던 무수한 말들을 기억한다. “아직도 아프세요? 조금만 참으면 괜찮아질 거예요”라며 무심코 했던 말들. 그는 직장암 3기라는 사형 선고가 내려진 후에야 비로소 의사의 말 한마디가 환자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병만 고치는 의사가 아니라 환자의 마음까지도 보듬어줄 수 있는 의사가 되겠다고 다짐한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는다. 대학 때의 혈기와 의료인으로서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던 젊은 날을 생각하면 감회가 새롭다. 바쁘다는 핑계로 생각에만 머물던 봉사활동도 이제는 마음에서 우러나 실천하게 됐다. 병마와 싸우며 보낸 시간들이 고통스러웠지만 그로 인해 인생의 참된 의미를 깨달았고 다시 태어나게 만들었다.

2000년 9월, 평소와는 다르게 피곤하고 머리가 무거웠다. 대한민국 40대 남자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흔한 증상이라고, 과도한 업무와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대변을 보는데 항문이 아프고 피도 섞여 나와 단순한 염증이나 치질인 줄로만 알았다.

“후배에게 말했죠. 치질인 것 같은데 한 번 봐 달라고요. 의사이면서도 자신의 건강에 소홀한 것 같아 부끄럽기도 했어요. 후배도 별다른 말 없이 치질일 거라 말했는데 며칠 후 서울에서 정밀진단을 받자고 하더군요. 혹시 하는 마음에 암이냐 물었더니 더 확실하게 확인해보고 싶다고 말끝을 흐리더라고요. 지금 생각하면 전형적인 암의 증상이었는데 바보처럼 치질일 거라며 호들갑 떨었던 게 생각나네요.”

모교인 한양대학교에서 정밀진단을 받았다. 두려움이 밀려왔지만 주치의에게 같은 의사로서 모든 것을 숨김없이 말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에게는 직장암 3기라는 사형선고가 떨어졌다. “하늘이 노랗다는 말의 의미가 바로 이런 거구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현재의 상황은 암세포가 자라서 넓게 퍼져 있고 다른 조직으로 전이되기 직전이라는 것이다. 조직을 드러내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때 생각한 건 “누구나 걸릴 수 있는 병이니까 나도 걸릴 수 있겠다. 이제는 죽었구나”라는 것이었다. 직장암 3기면 살 수 있는 확률은 30%로 희망을 이야기하기에는 무리다. 의사이기에 누구보다도 먼저 병을 발견한 것을 다행이라 믿으며 가족과 주변의 도움으로 치료에만 매진했다. 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문도 닫았다. 그로 인해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져 새삼 아버지의 의미를 일깨울 수 있었다.

“첫째 영훈이가 태어날 때가 레지던트 1년 차였어요. 일주일에 한번 집에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이었죠. 한밤중에 들어와 이른 아침에 나가니까 아들이 깨어 있는 모습은 볼 수 없더라고요. 한번은 한낮에 집에 들어간 적이 있는데 영훈이가 깨어 있는 모습을 처음 본 거예요. 너무 반가운 나머지 ‘영훈아, 아저씨한테 한번 와볼래’라고 했는데 그 말을 듣던 아내가 충격을 먹더라고요. 아버지라는 호칭이 익숙하지 않았을 때라 무심코 한 말에 저도 한동안 충격에 휩싸였어요”

수술을 한 후 종양을 깨끗이 제거했고 암세포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6주마다 방사선 치료와 1년 동안 항암 치료를 동시에 받았다. 이제는 머리카락도 생기고 음식의 맛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호전됐다. 항문을 봉해서 평생 배에다 인공 배변주머니를 달고 살아야 하지만 그 정도 어려움은 참을 만하다. 방사선 치료는 원주 기독병원에서 받았다. 담당 의사가 내 안색을 보더니 ‘아프냐’고 물었을 정도로 솔직히 참기 어려웠다. 그때 담당의가 ‘지금과 같은 어려운 상황을 견뎌야 어느 누구보다도 훌륭한 의사가 될 수 있다고 했는데 그 말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저에게 잊지 못하는 일이 있어요. 수술을 받은 후 삶에 대해서 담대해졌죠. 부모님이 구의동에 살았는데 갑자기 테크노마트에 가고 싶은 거예요. 마음에 드는 노트북도 사고 카메라도 사기 위해서죠. 지금 하는 말이지만 노트북은 살아 있는 동안에 아이들에게 사랑한다는 마음을 남기고 싶어서고 카메라로는 행복한 모습들을 찍고 싶었어요. 몸을 움직이기조차 힘들어 지팡이를 짚고 갔는데 다른 사람과 부딪쳐 그만 지팡이를 땅에 떨어뜨렸죠. 다시 줍기 위해 몸을 낮췄는데 아무리 해도 주울 수가 없었어요. 어느 젊은이가 지나가면서 지팡이를 주워줬는데 그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 생각하겠지만 눈물 나도록 고마웠어요. 그때부터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가야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는 항암치료를 받는 중간에 네팔로 의료봉사를 떠났다. 비행기와 차로 장장 38시간이 소요됐다. 주치의와 가족들은 완쾌된 후 가도 늦지 않는다며 반대했지만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고. 정말 아프면 가장 좋은 호텔에서 휴식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네팔 오지로 떠났지만 봉사하는 열흘 동안 그는 환자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살았다. 전혀 통증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 오히려 몸이 가벼워지는 듯했다. 그 이후로도 동료들과 라오스와 중국을 다니며 봉사활동을 했다. 앞으로는 소외된 이웃들과 불법 체류한 외국인들을 도울 계획이란다.



그는 둘째 영심이가 태어났을 때를 기억한다. 28주 만에 태어난 1.5kg의 미숙아로 패혈증에 걸려 단 하루를 버티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의료진이 같은 의사의 자녀니까 최선을 다하면 부모도 충분히 이해할 것이라는 말을 했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세상에 태어나 이름이라도 하나 있어야 된다는 생각에 다 죽어가는 아이를 끌어안고 이름을 지어주며 눈물을 흘렸다. 각고의 노력으로 건강을 회복하고 호적 신고를 했을 때가 정말 행복했다. 패혈증으로 인해 왼쪽 시력이 거의 안 보이지만 지금은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 최근에는 달리기에서 1등을 했다며 싱글벙글이다.

한양대 의대를 졸업하고 1992년 충북 제천에 있는 서울병원에서 전문의 생활을 시작했다. 사람들은 보통 시골에 있다가도 서울로 올라가려고 발버둥치는데 왜 굳이 지방으로 내려가 사서 고생을 하냐며 핀잔을 주지만 동료가 먼저 정착해 터전을 잡았고 교수님의 간곡한 부탁이 있어서 별다른 생각 없이 내려오게 됐다. 그보다는 제천이 낯설지 않았다. 10분 정도 나가면 개울이 흐르고 불판과 고기만 준비하면 남부럽지 않은 전원생활의 여유를 만끽할 수 있기 때문.

이듬해인 1993년 제천에서 서울 정형외과를 개업하고 10여 년 동안 직분에 충실한 일상을 보냈다. 그가 사형선고를 받은 2000년은 의약분업으로 사회가 시끄러웠던 시기였다. 의약의 합리화와 약품의 오남용을 방지하기 위해 시행된 의약의 분업제도가 충분한 논의도 없이 진행되면서 기득권을 가지고 의사와 약사는 철저히 맞섰고 그로 인해 직접적인 피해는 고스란히 환자와 그 가족들의 몫으로 돌아갔다.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실질적인 의약분업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 그는 제천시 의사협회장으로 있으면서 의약분업 반대투쟁을 모범적으로 이끌어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아직도 생생한, 천사같은 아내와의 첫만남

오랜만에 아내는 짐을 꾸렸다. 그동안 남편의 병간호 때문에 한시도 자리를 비우지 않았던 그녀지만 오늘만은 아이들과 1박 2일의 여행을 떠나기로 한 것. 충무와 남해바다를 보고 돌아올 예정이다. 직장암 3기면 5년 동안 생존율이 고작 30%에 불과하지만 지금껏 아무 탈 없이 건강하게 버텨준 남편에 대한 고마움을 드넓은 바다에게 말해줄 참이다. 또, 소홀했던 아이들과도 멋진 추억을 만들 작정이다. 짧은 여행이라 예전에 근무했던 ‘애광원’은 들르지 못하지만 충무의 아름다운 풍광을 아이들에게도 보여줄 생각이다.

여행은 새로운 기대감과 생활의 활력소를 만들어 준다. 신혼 때였으면 하루도 떨어져 있는 것을 참지 못하고 보고 싶다고 했겠지만 지금은 오히려 며칠 더 쉬고 와도 된다고 말한다. 이 때 아내는 한 수 거든다. “왜 바람 피울려고”라는 아내의 말에 “배에 구멍 나서 어디 바람피우겠냐”며 너스레를 떤다. 지금도 알콩달콩 재미있게 살고 있는 18년 차 부부. 그러나 지금의 아내는 하마터면 인연이 아닐 뻔했다. 젊은 시절에 그가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여인은 따로 있었다. 인턴을 마치고 군의관으로 강원도에서 근무하게 된 그는 사귀던 사람과 떨어지기 싫어서 군대 있을 때 약혼하고 제대와 동시에 결혼할 생각이었다. 매서운 추위와 맞서며 훈련을 받고 휴가를 나왔는데 헤어지자는 이별 통보를 받았다.

“편지를 주더군요. 당신과 결혼하면 행복할 것 같지만 자신의 삶은 고난의 연속일 거라면서요. 종교적인 신념이 강했던 그녀는 제가 그 몫을 채워주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나 봐요. 서로 이해하고 노력하면서 살아가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아무 말이 없더라고요. 현재는 목사의 아내가 되었다더군요”

막무가내로 떼도 써보고 지금이었으면 신파극 찍느냐고 했을 정도로 ‘죽네 사네’ 하기도 했다. 얼빠진 채로 한동안 생활했는데 보다 못한 대대장이 “떠나는 버스와 여자는 붙잡는 게 아니야”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20대의 사랑은 끝나버렸다.

인생에서 사랑이라는 부분을 빼니까 또 다른 세계가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조금씩 여유가 생기기도 했다. 때로는 외로움으로 갈증을 느끼기도 했지만 사랑이 아니라 치부해버렸다.

군대에서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고받은 사람은 같은 막사를 썼던 통신 장교였다. 물론 나이는 그보다는 한참 어렸지만. 어느 날 통신 장교의 책상에서 못 보던 사진 액자를 발견했다. 늘 보던 책상이라 눈여겨보지 않았는데 사진은 새로운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가녀린 모습과 눈망울이 매혹적인 여자였다. 그런데 액자에 있던 사진은 잡지를 오린 사진으로 한눈에 봐도 통신 장교의 여자친구라고 믿기 어려웠다.

“사진 속 그녀에 대해 물었어요. 잡지 사진 아니냐 했더니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서 아르바이트로 잡지 모델을 하고 있는데 야무지다나요? 그 사진을 볼 때마다 가슴 한구석에는 뭔가 모를 그리움이 가득한 느낌이 들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사랑이었던 거죠”

동갑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말을 애써 하고 싶었다. 애인보다는 친구 사이에 가까웠던 그들에게 애정이 싹트기 전에 떼어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씩 커피도 타주면서 그녀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들을 수 있었다. 특수교육을 전공하고 정신지체장애인 시설이 있는 충무에서 한참 들어가는 작은 섬 ‘애광원’에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주소를 물어서 편지를 썼다.

신체 건강한 대한민국 군인으로 국민들을 위해 불철주야 경계 근무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며 만나볼 생각이 없는지를 물었다. 조금은 당돌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편지였다.

답장을 기다리는 시간은 그야말로 지루함과 초조함의 연속이었다. 결국 답장이 오지 않자 또 한번 편지를 보낸 그는 “너무 하시는 거 아니에요? 편지를 받았으면 답장을 써주는 게 예의라고 생각하는데 안 그런가요?”라며 편지를 썼지만 이번에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가 보낸 편지를 다른 선생님들과 돌려가면서 읽었다고 한다. 드디어 통신 장교가 휴가를 떠나는 날이 왔다.

여자친구라 우기던 사진 속의 그녀도 만난다고 했다. 정확히 일주일 후면 그도 기다리던 휴가를 떠나게 되는데 같이 나갈 수 없는 현실이 야속했다. 그날은 때마침 연대장 특별 지시사항으로 각 부대의 앰뷸런스가 연대에 입고돼 일제 점검을 받는 날이라 아침부터 연대에 들어가야만 했다. 연대에 도착할 쯤 갑자기 위수지역을 넘어서라도 그녀를 한번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5시까지 돌아오겠다며 앰뷸런스를 연대로 보내고 역까지 달렸다. 열차는 떠나지 않았고 이미 자리 잡고 있는 통신 장교도 만날 수 있었다. 그녀와는 오후 1시에 종로 던킨도너츠에서 만나기로 했단다.

“통신 장교에게는 약속시간보다 30분만 뒤에 오면 안되냐고 부탁을 했어요. 편지를 보냈는데 답장이 없었는지도 알고 싶었고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싶어서였죠. 통신 장교가 허락하더라고요.”

평상시에 청바지를 즐겨 입는다는 청보를 입수하고 도너츠 가게로 들어갔다. 일단 혼자 있는 여자부터 찾기 시작했는데 그들 모두는 사진 속에 그녀는 아니었다. 당황했지만 일단 세 명 중에 가장 비슷한 사람을 찾았다. 그러나 그녀는 정장 차림에 말쑥한 모습이다. 역시 아닌 것이다. 그 때는 지금처럼 휴대폰이 있었던 시기가 아니라서 통신장교에게 확인할 수도 없었다. 무작정 매장 안에 있는 공중전화로 가서 수화기를 들고 통신 장교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주변 사람들의 동태를 살폈지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일단 부딪쳐보기로 했다. 정장 차림의 여성에게 “혹시 희선씨 아니냐고” 물었고 그제서야 그녀는 ‘씨익’ 미소 지으며 쳐다봤다. “처음부터 알았으면 이야기라도 해주지 왜 아무런 반응이 없었냐”고 하자 “처음부터 본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며 되물었다. 결국 통신장교를 골려주기로 합의했다. 애인인 것처럼 팔짱도 끼고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기로 약속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지금의 부부로 남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는 곁에서 용기를 북돋우며 지금까지 믿고 따라준 아내에게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다. 완치를 장담할 수 없는 병이기에 앞으로 몇 년간 고생할지는 모르지만 살아 있는 동안 다른 사람들을 위해 봉사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어느 날 갑자기 몸 속에 찾아온 암, 그리고 그 암이 함께 보듬고 온 새로운 인생, 그 속에서 사랑을 가꾸어 나가는 오흥룡 원장 부부의 아름다운 일상이 오래오래 계속되길 기원한다.

글 / 강승훈(객원기자)  사진 / 지호영

화제의 추천 정보

    Ladies' Exclusive

    Ladies' Exclusive
    TOP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