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째 한나라당의 청년 조직을 이끌었다. 대학원에서 체계 있게 배운 정치이론을 강산이 변하도록 실험을 해 온 것. 시의원으로 밑바닥을 다지고 청년운동으로 당의 중추가 된 한나라당 청년위원회 길기연 부위원장이 출사표를 던졌다. 아직 산 넘어 산이지만 그 너머 새 정치의 기운은 왕성하다.
정치는 바른 정(正)자입니다

수많은 청년 당원들이 상대 당으로 떠나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패전지장의 심경이 어땠을까. 그러나 길기연 부위원장은 팽이와 같았다. 내려치는 채찍에 굴하기보다 오히려 그로 인해 더욱 생명력을 얻은 팽이처럼. 당시 서울시 청년위원장이던 길 부위원장은 오히려 당이 세풍, 총풍 등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서울시 청년위원들과 함께 야당 탄압에 대한 항의시위에 앞장섰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한 것이고 집안 내력은 무시하지 못한다는 말이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는 야은 길재 선생의 19대 직계 후손이다. 고려 말의 충신으로 조선 건국 후 요직을 하사하겠다는 것을 마다하고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강직한 기개로 초야에 묻힌 인물. 21세기에 오버랩되는 길기연 부위원장 역시 그의 충심과 닮은 꼴인 듯하다.
“내게 있어 정치란 바를 정(正)자라 생각합니다. 본인이 바르게 가야 국가도 바르게 간다는 신념이죠. 고려대 정책대학원에서 총학생회장을 맡으면서 당대의 정치인을 많이 뵐 수 있었어요. 그들을 통해 정치의 리더십을 배운 것 같아요.”
사람들의 중심에 서는 것은 어릴 때부터 그의 장기였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전교 학생회장을 하면서 요즘 정치의 축소판을 목격했을 때였다. 전교 선거로 치러진 학생 선거에 사탕이며 색연필이 난무했다. 10남매 중 아홉째였던 그에게는 그런 ‘재력’이 부러울 뿐이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돈으로 타락한 선거에서 질 수는 없었다. 분명 상대방 후보는 ‘바르지 않은 행동’을 했고, 바르지 않은 후보가 되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가 승리했다.
“돈으로 사람의 마음을 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일찍 깨달은 것 같아요. 사람의 마음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그때 배웠어요. 그때 저는 공부만 파는 공부벌레는 아니었어요. 핸드볼 선수로 인기도 많았고요. 학교 웅변 대표로 많은 대회에 나가 상을 타오기도 했죠. 그러면서 아이들을 하나 둘씩 내 편으로 만들었던 것 같아요.”
그러나 아이들의 시뮬레이션 정치판과 현장 정치는 같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그 마음은 변함이 없다고. 당내에 젊은 후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길 부위원장이 유독 ‘순수청년’을 자임하는 이유는 10년간에 걸친 당내 청년운동 때문이다. 길 부위원장은 “30대에 당 청년운동에 뛰어든 후 가장 중요한 시기를 청년운동에 바쳤다”고 말했다.
이렇게 ‘비전 없는’ 정치만 하고 다닐 수 있었던 것도 아내 최미숙(44)씨의 내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여유 없는 형편에 어머니로부터 받은 결혼자금 50만원으로 결혼을 했다. 대학을 두 번이나 다니는 바람에 동료들보다 사회 진출이 늦었으나 뚝심과 강단 있는 그를 선택하는 데 아내 최애숙씨는 주저하지 않았다.
“당내 청년 조직을 이끌려면 항상 정신이 없어요. 만나는 사람도 많고 주어진 일도 수도 없으니까요. 그렇다고 가정 일에 소홀하지 않았어요. 두 아이도 아버지의 말이라면 100% 신뢰할 정도로 아이들과도 대화를 많이 합니다. 이렇게 생활에 철저한데, 밖에 나가 무엇을 하건 바가지 긁을 수 없는 거죠!”
아내의 말처럼 그는 2001년 청년위원회 수석부위원장이 된 후 일부 여당 시절의 티를 벗지 못한 구습을 일소하면서 야당 체질의 강건한 청년조직을 재건했다. 지금은 전국 16개 시·도청년위원장과 2만 명의 청년위원으로 구성된 당 전국청년위원회의 실질적인 지휘를 맡고 있다. 위원장인 오세훈 의원이 사임한 후 4월 총선을 앞둔 요즘 그의 짐은 더욱 무거워졌다. 그는 더욱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굴레나 짐은 그에게 대수롭지 않다. 젊은 피로 새 정치를 시작해야 하는 마당이기에 한나라당에 대한 젊은 세대의 지지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배짱 정치, 무력 정치를 타파할 수 있는 당의 근간 세력을 육성하는 한나라정치대학원의 총동문회장을 맡고 있다. 이 대학원을 통해 배출된 450여명의 졸업생 중 150여명이 전국 각지에서 시장, 군수, 시의원이 되었다.

사업에서도 발군의 재주를 가진 그는 한국에 진출한 퍼시픽 아일랜드클럽 호텔(P.I.C호텔)의 영업부장으로 스카우트되어 영업 부진으로 철수 직전인 회사를 아시아 각국에 있는 지점 중 최고의 실적을 올리는 회사로 끌어올렸다. 이런 전력 탓인지 ‘젊은 정치’를 통해 도입하고 싶은 것은 마케팅 개념이라고. 당 지도자를 추종하는 정치가 아니라 누구나 참여하고 보편화되어 따를 수 있는 정치를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정치도 광고를 해야 하고 이벤트도 벌여야 한단다. 이렇게 공개된 마케팅이 밀실 정치를 없애는 첩경이라는 것.
의정 활동에 대한 포부도 크다. 호텔에 대한 규제를 풀어 숙박비를 인하함으로써 해외 관광객을 대거 유치하도록 하겠다고 말한다. 국회의원으로 구성된 해외 세일즈단을 조직해 전 세계에 우리 상품을 알리고 수출하는 데 앞장설 포부도 가지고 있다. 비즈니스 등으로 세계를 돌아봤던 경험을 밑바탕으로 정치 마케팅의 신기원을 이루겠다는 꿈이 점점 영글고 있는 것이다. 그가 돌아본 세계 각국은 무려 80여 개국에 이른다. 그중 아내와 동행한 경우도 많은 데 그 나라의 수도 20여 개국에 이른다고.
서울시 의원으로서의 경험그의 정치 비전에 밑그림이 되었다. 당시 노숙자 문제와 실업자 문제가 그의 주요 관심사. 서울시 의회 한나라당 부대변인과 문교보사위 간사, 원내 부총무를 맡기도 했다.
지역 활동도 다양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한국청년회의소(J.C) 서울지구 이사를 역임했다. J.C 재직 중 그는 외국 교포 초등학교에 동화책 보내기, 북한어린이돕기 모금운동 등에 적극 참여하기도 했다. 또한 서울시 25개구 10만명의 동호인이 있는 생활체육 탁구연합회 회장을 맡아 생활체육 발전을 위해서도 봉사하고 있다.
몸이 10개라도 모자란 활동 폭에 혀를 내두를 정도. 지난 1월 200여 명이 한나라당 비례대표 후보에 신청서를 냈다. 이제 초심으로 돌아가 당의 개혁 의지를 가늠할 척도가 될 비례대표 의원 선정을 기다리는 와중에도 핸드폰 벨은 쉴새없이 울리고 있다.
글 / 강석봉 기자 사진 / 임재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