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명백백한 자국의 영토도 주장하지 않는 자에게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들은 주장하고 우리는 침묵한다. 침묵은 금일까. 그렇다면 그동안의 침묵으로 우리는 금을 산더미처럼 쌓았어야 했다. 그러나 금은커녕 원한만 쌓였다. 정부는 손놓고, 국민들만 속에서 천불이 난다. 조선어부 안용복, 독도의용수비대장 홍순철, 독도주민 최종덕으로 이어지는 민간의 독도 지키기. 이제 그 바통을 독도명예군수 정광태가 단단히 잡는다.
“본적이 독도야! 그럼 내가 일본인인가? 웃겨…”
세월이 흘렀으니 독도지킴이(www.dokdokorea.net)에도 변화가 따르는 법. 독도명예군수인 정광태(49)의 얼굴에도 수염이 거칠해져 20년이란 시간 여행의 고단함이 묻어났다. 연예인이면서 독도를 품다 보니 ‘외로운 섬’ 독도를 닮아가는지도 모를 일. 국민가요 ‘독도는 우리 땅’의 가사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업그레이드 버전이 나왔다. 1983년 발표한 노래가사인 ‘경상북도 울릉군 남면도동 1번지’는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로 바뀌었다.
2000년 독도유인화운동본부에 의해 독도의 행정구역이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산 1-37’로 변경되면서 2001년에는 새롭게 ‘독도는 우리땅’을 녹음하기도 했다. 2002년에는 ‘아름다운 독도’라는 베스트 앨범도 나왔다. 타이틀곡 역시 ‘아름다운 독도’로 ‘나는 가리라, 그 섬에 가리라, 아침해 첫 태양 떠오르는 거룩한 우리 땅’이란 가사에서 알 수 있듯 결연함이 서려 있다.
노래 가사가 바뀌는 것처럼 세상은 변해간다. 하지만 이상하게 잊을 만하면 터져나오는 일본 사람들의 망언은 여전히 그대로다. 아니 이유가 있을 듯하다. 20년이 넘도록 저러는 것을 보니 조직적이란 생각마저 든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만 내 일로 여기긴 않아요. 일본이 저러는 것은 계획적이고 정략적이에요. 자료를 남기는 거죠. 그런 후에 뭐 하겠어요.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이것봐라 우리가 꾸준히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하지 않았는냐라 하지 않겠어요.”
그의 명함이며 독도수호대 책자에 있는 제목 이 더없이 피부에 와닿는다. ‘명명백백한 자국의 영토도 주장하지 않는 자에게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국무총리와 서울대 법대 학장을 지낸 기당 이한기 선생이 쓴 ‘한국의 영토’에 있는 글이다. 이 글의 호소력이 사뭇 감정을 북받치게 만들기 때문인지 울릉도 도동 약수공원에 자리잡은 독도 박물관의 1층 전시실에도 당당히 걸려 있다.
“독도노래비 하나 만드는 것도 그래요. 뭐 그렇게 꼬투리를 잡는 것이 많은지… ‘59년 왕십리’ 노래비도 왕십리에 있는데, ‘독도는 우리 땅’의 노래비는 아직도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잖아요. 이뿐이 아니죠. 이 노래가 과잉 충성하는 공직자들에 의해 한때 금지곡으로 지정되기도 했으니까요.”
정광태의 말은 기본적으로 원색적이다. 독도에 관해 그간 사무친 일들이 많은 탓이겠지만 그 절절한, 그러나 속이 시원한 육두문자를 글로 전하지 못함이 아쉽다. “일본은 기본적으로 섬나라라 도둑 근성이 있어요”라며 풀어놓는 그의 말은 한쪽에서 망언하면 한쪽에서 방관하는 갑갑증을 날리고도 남음이 있었다.
“나도 노래를 부를 땐 독도에 대해 잘 몰랐죠. 그런데 자꾸 주변에서 네가 독도에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겠냐고 해서 84년 독도를 다녀온 후 독도에 반했어요. 그때 예포를 쏴주었던 당시 독도의용수비대 홍순철 대장은 내게 ‘독도 대통령’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죠. 망망대해에 떠 있는 독도를 보고 있지니 가슴이 뭉클해지도록 아름답더라구요.”
매해 8월15일이면 독도를 찾는다는 그 역시 처음에는 우리처럼 독도에 문외한이었다. 20년이 넘도록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이 국민가요의 취입도 어찌 보면 해프닝이었다.
이 노래가 처음 불려진 곳은 1983년 KBS-2TV의 인기 코미디 프로그램인 ‘유머 일번지’에서였다. 당시 잘 나가던 개그맨인 장두석, 임하룡, 김정식 등과 함께 그 노래를 불렀는데, 컴필레이션 음반을 기획하던 대성음반에서 연락이 왔다. 약속 장소에 나갔더니 음반 관계자가 약속 시간보다 1시간 늦었다. 장두석, 임하룡, 김정식 등 인기 개그맨들은 스케줄이 바쁜 탓에 그냥 가버리고 군제대 후 한가했던 정광태만이 남아서 음반 관계자를 기다렸다. 뒤늦게 나타난 음반 관계자는 “혼자서라도 녹음을 하자”는 제의를 했고 결국 그가 ‘독도는 우리땅’의 주인이 됐다.
이 노래를 만들어 정광태에게 독도지킴이를 위임한 박인호(52·본명 박문영)씨는 77년 TBC에 PD로 입사해, 80년 KBS로 옮겨 ‘밤을 잊은 그대에게’ ‘안녕하세요, 황인용 강부자입니다’ 등을 연출했던 라디오 PD 출신. 92년 SBS를 거쳐 PD 생활을 마감하고 현재는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살고 있다. 그는 ‘독도는 우리땅’ 외에도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김치 주제가’ 등 민족적 자존심을 일깨우는 노래를 만들었다. 그의 노래는 정광태의 입을 통해 마술처럼 사람들의 기억에 각인됐다.
이 때문인지 일본이 무서워하는 사람은 정광태 뿐인 듯하다. 방송 일로 일본을 가려다가 비자가 거부된 일은 익히 알려진 사실. 그러나 당시 정광태가 미국 영주권자였기에 무비자로도 갈 수 있다는 사실은 모른 모양이었다. 한마디로 비자 없이도 일본을 갈 수 있는 처지의 사람을 서류 미비란 이름으로 거부를 한 것. 비자 발급이야 발급청의 재량이라지만… 어딘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정광태는 아예 미국 영주권을 포기했다. 한발 더 나아가 2000년 정광태는 독도로 본적을 옮겼다.
“지난 90년부터 96년까지 미국에 이민가서 살았거든요. 그런데 독도가 저를 잡아끌더라고요. 독도에 관한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을 참을 수가 있어야죠. 그래서 96년 가족들은 남겨둔 채 혼자 한국으로 들어왔죠. 그리고 2000년엔 아예 본적을 독도로 바꿨는데, 내가 우리 국민 중 6번째였던 걸로 기억해요. 지금은 저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900여 명이 된다고 하니 든든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내 본적이 독도인데 자꾸 일본 사람들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면 내가 일본인이란 말인가요. 내 참….”
현재 매주 수요일 SBS 러브 FM 김성환의 서울 아리랑에 고정 게스트로 출연 중인 그는 독도가 걱정돼서 방송 일도 예전처럼 하지 못하고 있다. 역시나 마지막 말도 독도 이야기다.
“다 국력이 약해서 그런 거예요. 모두 열심히 일해야 돼요. 독도는 우리의 자존심이 걸린 땅이에요. 힘을 키워서 강력하게 대응하는 방법 밖에 없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남북통일도 해야죠.”
우리 정부가 독도 문제에 미온적인 것은 일본의 ‘분쟁지역화 의도’에 넘어갈 우려가 있어 현상 유지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탓에 일본이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외치고 우리는 ‘대마도는 일본 땅’을 외치는 꼴이 되었다. 기당 이한기 선생의 다음 문구는 못난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주장할 근거가 있는 것이기에 주장하는 것이고 또 주장할 가치가 있는 것이기에 주장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일본은 이 명언을 따르고 있고 우리는 이 명언을 잊고 살아온 것이다.
글 / 강석봉 기자 사진 / 지호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