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본지에 탈북자 취재를 하다 중국에 구금된 석재현의 구명운동에 나선 그의 아내 강혜원씨의 사연이 나갔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 공론화되는 계기가 됐다. 이 때문이었을까. 아무도 예상치 못한 사건이 일어났다. 구금 1년 2개월 만에 석재현씨가 가석방된 것. 입국장에서 감격의 눈물 흘리는 그를 만났다.
가석방 당일 아침까지도 석방 소식 몰라

중국에 구금된 1년 2개월간, 몸과 마음 고생이 떠올랐을 것이다. 탈북자들을 한국과 일본에 망명시킬 계획인 ‘리본’을 취재하려다 중국 공안에 잡혀 구금된 때부터, 그의 시간은 멈춰 있었다.
지난 3월 19일 오후 5시 30분, 중국 칭다오(靑島)에서 출발한 KE842편이 도착했다는 신호가 깜빡이자 입국장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에 서 있던 취재진들이 모여들었고, 그를 마중 나온 독일인 의사 노베르트 풀러첸과 NGO 관계자들이 초초하게 그를 기다렸다.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가석방이었다. 그의 입국 이틀 전, 아내 강혜원씨는 외교통상부 관계자에게 남편이 19일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할 것이라는 통지를 받았다. 아내는 부랴부랴 짐을 싸서 중국으로 건너가 남편과 함께 입국했다. 지난 1년간 남편의 구명운동으로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낸 그녀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퍼져 있었다.
“저는 오늘(3월 19일) 오전 10시까지 아무런 사실도 몰랐어요. 8시부터 10시까지 제 모든 소지품을 대여섯 사람이 검사하는 거예요. 제가 썼던 글도 가져가버리고, 모든 짐을 샅샅이 검사하더라구요. 무슨 일인지 도저히 감이 안 잡혀서 불안해하고 있었는데, 10시 되니까 간부 한 사람이 선언문을 읽으면서 석방해준다고 해서 알았어요.”

감호소와 교도소에서 그는 일반 중국인과 동일한 대우(?)를 받았다. 감호소(교도소로 옮기기 전에 잠시 머물다 가는 곳)에서는 15명 정도가 어깨를 딱딱 붙이고 자야 하는 좁은 곳에서 생활했다. 20여 평 되는 교도소에서는 40~45명이 함께 지냈다고 한다. 수감자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면도기 탓에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10여 회 링거 치료를 받기도 했다.
“가혹 행위는 없었어요. 하지만 교도소가 너무 열악해서 겨울을 보내면서 손이 다 얼었버렸죠. 손톱 몇 개는 빠질 것 같구요. 감옥에서는 할 일이 전혀 없어요. 글도 못 쓰고, 일기는 더더군다나 쓰기 힘들어요. 글 쓰는 것은 모두 가져가버리거든요.”
지난 2003년 1월, 석재현씨는 탈북자를 돕고 싶다는 마음을 아내에게 내비쳤다. 그동안 탈북자 문제를 취재하면서 고민이 많았던 남편을 알기에 아내도 동의했다. 2003년 1월 18일, 그는 ‘리본’이라는 암호명 아래 중국 산둥성산(山登省) 옌타이(煙 )항에서 탈출하는 탈북자들을 취재하고 있었다. 탈북자 20여 명과 탈출을 도와주는 이들이 10여 명이었다. 누군가의 발설이 있었는지, 그들의 계획은 탄로가 났고 중국 공안에게 모두 잡혀버렸다. 위험한 일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뛰어들수밖에 없었던 것은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경일대학교 사진영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 시각디자인학부에서 보도사진을 전공했다. 1999년부터 2001년까지 대구 미래대학 사진과에서 계약교수로 근무하기도 했다. 그후 뉴욕타임스 프리랜서 사진기자로 현장 사진을 찍어왔다. 그의 작업 소재는 대부분 인간이다. 그의 생활과 작업의 대상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 밑바탕이다.

석재현씨는 중국 공안에게 함께 잡혔던 20여명의 탈북자들을 더 걱정한다. 구금된 이후 그들에 대한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신체적·정신적 구금보다 위험을 무릅쓰면서 도와주고 싶었던 탈북자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 인간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에 깊은 애정이 생긴다.
글 / 최영진 기자 사진 / 박남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