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우물의 소중함을 이제야 알게 됐다. 피혁과 영업, 이 2가지의 달란트로 성공의 문턱까지 갔던 뭉크코리아의 전병덕 사장은 사업적인 외도 때문에 지옥을 경험해야 했다. 실패했지만 좌절하지 않고 오뚝이처럼 우뚝 선 그의 한 우물 성공기를 소개한다.

(주)뭉크코리아 전병덕 사장의 성공 스토리는 뭉클하다. 이 회사는 핸드백, 구두 등 피혁 패션 토털 브랜드다. 중국 시장 개척에 성공해 인생에서 또 하나의 황금기를 구가하기 시작했다.
“중국 진출을 하기까지 한 3년 걸렸나 봐요. 그간 매달 중국에 가 안면을 트고 신뢰를 쌓았어요. 급하게 서두르다가 망하는 우리 기업인을 많이 보아온 터라 항상 조심스러웠죠. 지금 거래선을 튼 중국 기업은 중국 내 랭킹 톱의 회사예요. 중국 내 대리점만 640여 개가 있는 큰 회사죠. 10개월째 사업 협의차 방문하고 나서야 사장을 만날 수 있었죠. 그만큼 그들 역시 우리와 거래를 트기까지 매우 신중해요.”
그가 10개월간 사업 협의를 했던 사람은 부사장이었다. 항상 사장은 출장 중이라고 해서 만날 수도 없었다. 어느 정도 이야기가 오고 가서 협의할 때 쯤, 갑자기 안면식이 없는 사장이 그를 보고 싶어한다는 전언을 받았다. 마음을 연 것이다. 그런데 그가 사장이라고 만난 사람이 여지껏 만나온 부사장이었던 것. 황당하기도 했지만 숱한 만남 속에서도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그렇다고 배신감이 들지는 않았다. 다만 이들의 ‘만만디’ 정신이 생활과 기업 활동 속에 뿌리 깊게 박혀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이제 뭔가가 이뤄지는 것 같은 자신감마저 생겼으니.
“우리 기업의 실패 원인 중 첫째는 중국 사람들을 쉽게 생각한다는 거예요. 우리가 조금 잘산다고 그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사람도 많아요. 처음부터 ‘나를 도와주세요’라는 식으로 그들을 띄워주며 만남을 이어갔어요. 그렇게 맺어진 인연은 쉽게 저버리지 않아요. 제가 부도를 맞았을 때도 그냥 계약을 파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도와줄 테니 잘 해봐라, 당신 성공할 수 있다’며 격려를 해주더라니까요.”
물론 인간성 하나로 성공할 수 있는 사업은 많지 않다. 여기에 사업적인 비전은 필수. 듬직한 파트너와 보조를 맞춘 것이라 요즘 신나게 일을 하고 있다.
“잡화 토털 매장으로 프랜차이즈의 성공 모델을 제시하겠어요. 그동안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대리점 전문 잡화 브랜드들이 관리 체계 미비로 론칭한 지 얼마 안 돼 중단하는 사례를 지켜보면서 경쟁력 있는 전문 숍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꼈어요.”
직영 숍에서 진열된 제화와 핸드백 등 한정 품목을 가지고는 영업에 한계를 느껴 토털 잡화 매장을 구성하려는 것. 단일 매장 내에 남녀 수제화, 핸드백, 비즈니스 백, 캐주얼 백, 백팩, 액세세리 등 다양한 아이템을 구성해서 시즌에 구애받지 않고 고른 매출을 유도하겠다는 복안이다. 시즌별로 기획 상품을 제시하고 중국 생산을 통해 저가 제품을 선보여 비수기에도 매출을 떨어뜨리지 않겠다는 전략도 세워놓고 있다.
그러나 저가에만 머물지 않겠다고 한다. 그 핵심은 제품력에 초점을 맞춘 지속적인 브랜드 운영. 이를 위해 패션 트렌드를 리드하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최신 유행 디자인을 현지에서 제공받고 수입 원부자재를 사용해 품질을 높였다고 한다.
그동안 준비 과정에 심혈을 기울인 만큼 추진력도 대단하다. 이런 힘은 그가 피혁 업계에 처음 들어왔을 때와 다르지 않다.

“정말 열심히 일했죠. 솔직히 아는 게 있어야죠. 홍보도 해본 적 없고요. 아는 사람도 없이 방송사 PD를 수소문해서 만나고 신문사 기자를 찾아가 만나주기를 애원했어요.”
직원들이 퇴근하지 못할까봐 퇴근 시간 즈음 자리를 비웠다가 늦은 밤 아무도 없을 때 돌아와 디스플레이를 새롭게 고치기를 수차례….
“소비자 반응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어요. 전국 랭킹 1위의 대리점이 됐고 이어 대구와 대전점을 오픈했죠. 그 시절 크게 세 번은 울었어요. 점장 발령에 겁이 나서 울고, 일이 너무 힘들어서 울고, 대리점이 성공적으로 자리 잡아서 울고….”
처음 주어진 기회를 단단히 부여잡은 것이다. 자신감이 생긴 만큼 욕심도 생겼다. 몇 년 더 같이 일하자는 사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독립하기로 결심했다. 믿었던 회사는 퇴직한다는 그에게 퇴직금마저 주지 않았다. 붙잡고 싶은 만큼 그 손길을 뿌리친 그를 원망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업 구상을 접을 수도 없는 일. 그의 수중엔 전셋집을 뺀 140만원의 자금이 전부였다. 그러나 도움의 손길은 먼 곳에 있지 않았다.
“친구의 도움으로 가게 구할 돈을 얻었어요.
1천만원으로 안산에 잡화 가게를 열었는데, 맞은편 사장님이 장사 잘하는 사람이 인수했다니까 긴장했나 봐요. 저에게 다른 업종으로 전환할 것을 종용하더라고요. 먼저 주인이 남겨놓은 물건을 제 값에 다 인수한다는 조건으로 말이에요. 사실 전 피혁 가게를 할 생각이었는데, 운이 좋았죠. 물건 들여올 돈이 저절로 생겼고 2천 점이 넘게 디스플레이 돼야 하는 가게에 1백60점 놓고 시작했죠. 그런데 개업 20일 만에 2000점을 넘게 팔았어요,
사업은 계속 잘되어 6개월만에 빚을 다 갚을 정도였어요. 1년 만에 똑같은 가게 하나를 더 냈고요. 정말 7년 동안 장사를 잘 했습니다. 집도 사고 부모님도 모실 수 있게 되었고요.”
그러나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단다. 가게를 정리하고 중장비 사업에 손을 대 빚까지 지게 되었다. 암담했었다. 할 일 없이 시간을 소일할 밖에. 다행스럽게도 예전에 사업할때 알고 지내던 어르신이 자신의 가게를 내주었다. 남대문시장에서 30년간 장사를 하던 그분은 그의 성실함 하나만 그에게 가게를 맡긴 것이다. 다시 기회는 주어졌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열흘 만에 임대료 2억원을 벌었다. 찾아오는 손님이 얼마나 많은지 24시간 풀타임 영업을 했다. 4년 정도 남대문 시장에서 장사를 하면서 상가 건물도 사고, 잃었던 집도 사고… 부러울 게 없었다.
“마흔 살까지만 일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했어요. 마흔 살 되던 해, 계획대로 사업에서 손을 떼고 미술도 하고 도자기도 배웠죠. 그런데 외환 위기가 오면서 사업을 정리하고 부동산과 공장을 운영했는데, 그게 또 자충수였어요. 아주 쫄딱 망했으니까요.”
그동안 이뤄온 것, 그것도 온 정열을 바쳐 이루어놓은 것이 물거품 같았다. 우울증에 가슴이 쉴 새 없이 벌렁거렸고,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죽음밖에는 길이 없어 보였다. 허탈함이 극에 달하자, 가족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죽을 생각에 한강 둔치에서 소주를 다섯 병이나 먹었지만 막상 그러지는 못했다. 발길을 돌려 남산 팔각정으로 갔다. 새벽이 깊어진 시간, 상심에 또다른 빠진 사람을 만나 인생을 논하다가 힘을 얻었단다.
“대기업 간부로 있다가 명퇴를 당한 분이더라고요. 가족이 남으로 여길 정도로, 평생을 회사에 바쳤는데 회사에서 내쫓긴 거죠. 가족들의 눈치도 이상하고, 인생에 회의도 느껴지고 그랬나 봐요. 그 얘기를 듣고 있다 보니 머리가 뜨끈해지더라고요. 저는 저를 사랑하는 가족이 있었으니까요. 그 사람처럼 돌아갈 곳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요.”
어릴 적, 집을 나와 구 고속버스터미널(현재 서울역 대우빌딩 뒤)에서 바라보던 서울의 불빛은 희망이었단다. 그날 남산 팔각정에서 절망하던 그의 눈에 바라보인 서울의 불빛 역시 희망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났다.
절망과 희망의 희비쌍곡선에서 도전적 열망은 성공이란 열매를 거두게 했다. 아직 성공을 예단하기엔 부족함이 있지만, 성공의 씨앗은 튼튼히 자라고 있다. 뭉크코리아 전병덕 사장의 인생 역전에서 알 수 있듯 절대 포기하지 않으면 성공은 멀리 있지 않다.
글 / 강석봉 기자 사진 / 지호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