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우 방송인 선발대회 출신 연기짱 예비 연기자 장현진

장애우 방송인 선발대회 출신 연기짱 예비 연기자 장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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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하고 싶은 일은 드라마 출연, 노력하면 꿈이 이뤄지겠죠!”

장현진씨는 ‘소연’이라는 예명을 지었다. 뜻은 ‘소망의 연기자’라고. 시각장애 1급 장애우인 그녀는 2년 전부터 KBS 제 3라디오에서 리포터 활동을 한 경험이 있다. 장애우 방송인 선발대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한 후 CBS에서 고정 프로그램을 맡은 그녀는 요즘 한발한발 자신의 꿈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다. 행복한 요즘, 그녀와의 데이트.

아홉 살 때 실명, 이유는 ‘가난’

“눈이 안 보이니까 사람들 마음이 먼저 보여요!”

“인터뷰 때문에 옷 한 벌 장만했어요. 옷 색깔 예쁘죠? 저희 작은언니가 눈썰미가 있거든요. 옷 사러 갈 때는 꼭 같이 가요. 사진이 예쁘게 나와야 할 텐데….”

장현진씨(28)는 보기보다 수다쟁이다. 한번 터진 말문은 수도꼭지에서 물 흐르듯 줄줄줄 흐른다. 웃음도 많다. 얘기를 할 때면 상대방의 눈을 쳐다보며 생글생글 웃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착각하기도 한다.

그녀의 눈에 모든 것이 보이는 것으로…. 하지만 장현진씨는 시각장애 1급 장애우다. 그녀는 얼마 전 KBS 장애우 방송인 선발대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했다. 이 선발대회의 예선에는 무려 1백여 명의 출연자가 모였다. 이중 본선에 진출한 이들은 11명. 때문에 그녀는 1등의 꿈은 꾸지도 못하고 ‘장려상이라도 받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며 가슴을 졸였다. 그런데 우수상. 꿈이지 생신지 구별하지 못할 만큼 행복했던 그날의 기쁨을 그녀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장현진씨가 방송 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시각장애 특수학교인 인천 혜광학교 재학 시절 그녀는 선생님의 권유로 연극을 시작했다. 열정적으로 연기에 대한 꿈을 키우던 현진씨는 혜광학교를 졸업한 후 KBS 아카데미의 성우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이곳에서 비장애우들과 함께 6개월 동안 ‘예비 성우의 길(?)’을 걸은 그녀는 ‘그들이 하는 것이라면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아카데미에 다닐 때, 집이 있는 인천에서 학원이 있는 여의도까지는 지하철을 타고 다녔죠. 특별한 날이 아니면 혼자 다녔어요. 지하철 1호선에서 5호선으로 갈아타는 것도 잘하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도 잘해요. 몸이 아프다거나 강의시간에 늦을 것 같은 날은 봉사단체에 차량 봉사를 요청했어요. 요즘도 일주일에 다섯 번 정도 강남에 있는 연기학원에 나오는데 대부분 혼자 움직여요. 연기학원에서 강의받을 때, 저는 제가 장애인이라는 걸 잊곤 해요. 다른 친구들과 똑같이 발표하고 발성·연기 연습을 하거든요.”

장현진씨는 장애인들을 불쌍하게 보는 일반인들의 시선이 가장 견디기 힘들다고 한다. 장애가 있는 사람은 몸이 불편한 것일 뿐, 동정을 받을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불편함을 가진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좋지만 ‘안됐다. 어쩌니… 이제 세상을 어떻게 사니…’ 식의 동정은 장애인들에게 그다지 도움이 되는 일은 아니라는 것. 그래서일까? 인터뷰하는 내내 그녀는 평범한 스물여덟 살의 모습이었다.

“저는 김희애씨의 연기가 제일 좋아요. 딱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까 만나봤으면 좋겠어요. 종영된 드라마 ‘완전한 사랑’은 너무 열심히 시청했어요. 또 전광렬씨도 좋아해요. 목소리가 너무 멋지잖아요. 제 스타일이 너무 올드하다구요? 저는 안 보이잖아요. 연기를 느낄 뿐이죠. 그래서인지 신세대 연기자들 중에는 느낌이 강하게 오는 사람이 없어요. 가수도 이문세, 김건모, 유리상자 스타일을 좋아해요. 콘서트에는 자주 가요. 여행도 자주 가는 걸요. 여름이 오면 래프팅 하러 갈거예요. 래프팅의 진짜 맛을 느끼려면 차가운 물에 빠져봐야 해요. 그게 얼마나 시원하고 짜릿한대요. 올 여름에 저랑 래프팅 가실래요?”

너무도 씩씩하고 당당한 현진씨. 그러나 그녀에게도 아픔은 있었다. 그녀는 선천적 장애인이 아닌 후천적 장애인이다. 1남 4녀의 막내인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몸집이 작았다고 한다. 그리고 아홉 살이 될 때까지 두 눈이 잘 보이지 않아 모든 것을 아주 가까이에서 봐야 했다. 그러나 부모님은 그녀를 병원에 데려갈 수 없었다. 너무도 가난했기 때문. 현진씨가 아홉 살이 되던 해, 가톨릭 재단의 병원에서 무료로 진단을 받을 수 있었다.

“그때 의사 선생님이 어머니를 막 야단쳤대요. 아이를 이제 데려오면 어떡하냐구. 어머니가 저를 임신했을 때 영양실조에 걸렸대요. 그 때문에 제 눈이 심한 약시였는데, 제가 병원을 찾았을 때는 치료 가능성이 희박한 상태였죠. 그래도 혹시 하는 마음에 수술을 받았는데 결과가 좋지 않았어요. 그후 전혀 볼 수 없게 된 거죠. 그때 어머니가 많이 우셨어요. 어렸을 때는 부모님을 원망하기도 했는데 이제는 그런 생각 안 해요. 어머니도 너무 마음이 아팠을 거라는 걸 이해하니까요.”

현진씨의 어머니는 20여 년째 버스 회사에 근무하는 성실한 주부 사원이다. 다 자란 후에야 어머니의 사랑과 가족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깨달았다는 그녀는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꿈을 이루는 장애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글 / 경영오 기자  사진 / 전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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