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 기증으로 말기암 환자 살린 전과 16범 시인 김용수 속죄의 詩

간 기증으로 말기암 환자 살린 전과 16범 시인 김용수 속죄의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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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두웠던 과거 용서받기 위해 장기 기증을 했습니다”

박복한 인생이다. 누군들 어렵고 힘들지 않겠냐마는 지금까지 살아온 54년의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만 흘러갔다. 행복하다 싶으면 불행은 여지없이 찾아왔고, 원죄처럼 20년 이상을 교도소와 보호소에서 보냈다. 그리하여 전과 16범. 그러나 그는 보호소에 있을 때 시를 썼고, 시집을 펴냈다. 만성신부전 환자에게 신장을 떼어줬고, 말기암 환자를 위해 간의 40%를 떼어줬다. 회환의 인생을 용서받기 위한 그의 참회록.

아버지의 학대를 피한 가출이 징역살이로

어렸을 때 부모님은 이혼했다. 나는 어머니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아버지는 5남매를 데리고 고향을 떠나 논산으로 이사를 했다. 홀로 된 고통이 컸을까. 아버지는 행상을 나가 집에 돌아올 즈음에는 나에게 화풀이를 했다. 누나 다음으로 큰 아들이라지만 폭력은 불행의 시작이었다. 불안정한 가정사는 아이를 더이상 어리게 놔두지 않았다. 초등학교 3학년이 마지막이었다. 집안을 위해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눈이 많이 와 땔감을 구하러 나가지 못한 적이 있었다. 술을 먹고 온 아버지에게는 가당찮은 핑계일 뿐이었다. 그 추운 날에 옷을 모두 발가벗기고 철사로 두 손을 묶어 나를 집 밖으로 쫓아냈다. 그때 살을 에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동네 헛간에서 새우잠을 자다 아버지가 나간 후에야 방에 들어갔다. 하루가 멀다 하고 맞는 아버지의 매질이 무서워서 열두 살에 가출을 했다. 거리를 배회하면서 내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배가 고프면 훔쳐 먹고, 아이들의 돈을 빼앗으면서 살아갔다.

열여덟 살, 처음 폭력 행위로 구속됐다. 그때부터 나의 인생은 삐뚤어지기 시작했다. 교도소에서 나온 후 폭력배 생활을 했다. 돈이 생기면 집을 찾았다. 아버지는 미워도 안쓰런 누이를 챙겨야 하기 때문이다. 아버지 몰래 먹을 것 챙겨 가지고 가면 누나는 동생을 붙잡고 울면서 함께 살자고 애원했다. 막살기 시작한 ‘부랑아’에게 가정은 굴레였다. 폭력과 공갈 등으로 ‘별’을 다는 것이 유일한 치적. 그렇게 지긋지긋하던 아버지였건만 지난 75년 옥중에 있을 때 세상을 뜨셨다는 말을 듣고 상념에 젖기도 했다. 남은 5남매는 뿔뿔이 헤어졌다. 불행은 끊이지 않았다. 여동생과 막내는 함께 살아보지도 못한 채 병을 얻어 저세상으로 떠나버렸다. 가족간의 ‘사랑’은 평생 느끼기 힘든 딴 세상의 단어였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교도소를 제집 드나들듯하면서 30대 후반이 되자 ‘철’이 들었다.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됐다. 1982년 교도소를 나와 나의 살 길을 찾은 것이 포장마차였다. 폭행과 공갈이 아닌 내 몸뚱아리를 움직여 번 돈이라는 생각에 보람도 컸다.

포장마차에 들른 손님으로 만난 여자와 마음이 맞아 일주 일만에 동거를 시작했다.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면서 행복한 신혼생활을 꾸려나갔다. 내 분신과도 같은 첫딸이 태어난 후 한 달 만에 잊혀졌던 불행이 찾아왔다.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갔다는 아내의 소식을 듣고 택시를 잡았지만 내 얼굴을 보고 승차 거부를 하는 택시기사. 참아야 했는데, 울컥 폭발하는 화를 다스리지 못했다. 어느새 택시기사는 도로 한복판에 패대기쳐져 있었다.

계속된 징역살이 때문에 처음으로 청송감호소에 들어가게 됐다. 1988년, 징역 8개월과 감호소 4년을 살고 출소했다. 1년 쯤 옥바라지를하던 아내는 견디다 못해 딸과 함께 집을 나가버렸다. 감호소에서 배웠던 전기기능사 2급을 가지고 전기일을 시작했다. 타고난 손재주 덕분인지 6개월만에 ‘백용전기공사’라는 자그마한 사무실을 내고 일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나는 어릴 때 불렸던 ‘김백용’이란 이름으로 새 삶을 살았다. 나에게 또 다른 여인이 찾아왔다.

아내는 야식집을 하고 나는 전기사무실을 하면서 ‘행복’이라는 끈을 놓지 않으려 노력했다. 두 번째 결혼이었고 둘 사이에 예쁜 딸도 태어났다. 하지만 불행은 굴레와도 같았다. 대전으로 일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저녁에 길가에서 일어난 싸움을 말리다 싸움에 말려들어 구속까지 이르렀다. 단지 싸움만 말리려 했는데 폭력 전과 때문인지 경찰서에서는 모든 잘못을 나에게 뒤집어씌웠다.

돈이 없었기에 합의도 못했고, 나를 변호해줄 변호사도 구하지 못했다. 무전유죄, 유전무죄, 7년 6개월을 청송감호소에서 살면서 뼈저리게 느꼈던 단어였다. 아내는 딸과 함께 나를 떠나버렸다. 두 번이나 자살을 기도했지만 내 마음대로 죽지도 못했다.

종교 집회에 참여하면서 파스칼리야 수녀님을 만나 새로운 인생에 눈을 뜨게 됐다. 내 마음속에 앙금처럼 남아있던 증오와 불신들이 하나 둘씩 사라져갔다. 수녀님은 내 편지를 받아보면서 “안드레아씨의 편지를 하나 둘씩 모아서 시집으로 만들면 좋겠어요”라고 용기를 줬다.

수녀님은 나를 변화시켰다. “안드레아씨는 나가서 하고 싶은 일이 뭐예요?”라는 질문에 “나쁜 짓만 했으니 좋은 일만 하고 싶어요. 부모님 정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살았으니 갈 곳 없고 돈 없는 어른들 모시고 살고 싶어요”라는 약속을 했다. 이때 장기기증을 생각하게 됐고, 사후 장기기증을 하기로 서약했다. 남들은 특별하게 생각하겠지만 장기기증은 회한의 인생을 참회하기 위한 내 몸부림에 불과했다.

성이 다른 딸, 아내와 행복한 가정 꾸며

98년 다시는 돌아가기 싫은 곳, 감호소를 나왔다. 가방 하나 달랑 메고 마중나와주는 이 없는 그곳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주머니에는 감호소 공장에서 일하면서 받은 1백40만원이 전부였다. 내 몸을 누일 집과 가족은 어디에도 없었다.

인연이 닿아 톱밥공장에서 일하게 됐다. 톱밥공장 운영에 대한 노하우가 쌓이자 겁도 없이 5천만원의 융자를 얻어서 부여에 공장을 세웠다. 그때 시집 「잃어버린 세월」을 준비 중이었고, 보호소에서 계획했던 장기기증을 결심했다. 사랑의 장기기증 본부를 찾았다. 나의 신장을 받은 남자의 아내는 고맙다면서 자신의 신장을 기증해 ‘릴레이 신장기증’이 일어나기도 했다. 수술도 성공적이었고, 오랜 꿈이었던 시집도 나왔다. 내 잘못된 과거가 용서받는 듯했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공을 들인 톱밥공장은 실패를 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좌절감으로 술에 빠져들었다. 자살도 시도했지만 죽는 것도 쉽지 않았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공장터에서 트럭 하나만을 가지고 새 삶을 시작했다.

지금 함께 살고 있는 아내도 이때 만났다. 아내를 식당에서 처음 봤을 때 죽지 못해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아내는 자식이 달린 이혼녀였다. 아내는 나와 성이 다른 딸 하나를 데리고 들어왔고 우리 가족 셋은 이렇게 함께 살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교통사고로 다시 한번 징역을 살게 됐다. 하지만 아내와 딸은 부족한 가장을 잘 기다려줬다. 2002년에는 우리 가족을 위해 「목마른 영혼」이라는 시집을 펴냈다. 그리고 얼마 전 아내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내 간의 40%를 말기암 환자에게 기증했다. 아직도 배가 아파서 걸어다니려면 힘이 들지만 마음은 전에 없이 편하다. 아내가 식당에서 일해서 번 돈과 동사무소에서 나오는 복지금으로 부족하나마 가정을 꾸려가고 있다. 가족의 정도 전에 없이 느끼며 행복의 씨앗을 키워가고 있다.

전과 16범이라는 꼬리표가 훈장일 수 없다. 전과자로 산 과거의 모든 것에 회환과 눈물의 참회를 하며 오늘의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평생을 속죄양 하며 살아가야 한다면 그렇게 하련다. 내 가족을 위해서, 그리고 나를 아껴주는 사람들을 위해서.

잃어버린 세월

문득 허공을 응시하다 지난날을 본다

과거 속 도태된 내 자신을

세월의 이름으로 잃어버리고

인성마저 잃어버린 나.

오늘도 후회로 서성이며

고뇌에 부르짖는

나는 누구이며 어디에 서 있는가?

자조의 웃음으로 지나치려는 나.

안타까운 몸부림

흐린 시야엔 물기 배어

가치 없는 세월 생을 버리고

저주의 욕설로 일관하는

끝없는 세월의 허상

어둠에 묻힌 자아

빛 앞에 선 나상을 보며

잃어버린 세월을 찾아

하나하나 추스려본다

글 / 최영진 기자  사진 / 임재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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