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코와 트로트로 찬불가 만든 백운사 능인스님

디스코와 트로트로 찬불가 만든 백운사 능인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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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으로 찬불가 만들어보면 어떨까요?”

서울 둔촌동의 작은 사찰 백운사엔 도심 속 사찰의 단청만큼이나 ‘튀는’ 스님이 있다. 노래로 포교 활동을 하는 능인스님. 미루어 짐작해 찬불가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생경하게도 디스코와 트로트다. 혹자는 불경한 짓이라 호통을 치지만, 스님은 사람들에게 친숙한 노래로 포교를 할 뿐이라며 너털웃음을 짓는다.

음악 공부한 적 없어도 작사, 작곡 능해

찬불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무탈의 심연으로 이끈다. 세속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라고 속삭이는 것 같다. 찬불가의 매력은 ‘도레미파솔라시도’의 서양 7계명과는 다른 독특한 음과 음색에 있다.

이런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디스코와 트로트로 ‘불국정토’를 노래한다면? 어떤 이는 ‘후딱 깬다’고 할 것이고, 어떤 이는 신선한 발상에 호기심이 동할 수도 있겠다. 이런 재미있는(?) 상상을 직접 실천에 옮긴 스님이 있다. 서울 둔촌동에 있는 백운사의 능인스님(51·속명 노신배)이 그 주인공. 능인스님은 「마음의 향기」(1, 2)라는 찬불가 음반을 만들었다.

어떤 이는 “위엄 있는 찬불가에 왜 그런 장난을 쳤냐?”고 호통을 칠 게다. 특히 흥겨운 디스코 리듬의 자유로운 비트에 교훈적인 가사가 접목되었을 때 당혹스럽기도 했을 것이다. 스님은 이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빙그레 웃는다.

“다음 음반에서는 젊은 사람을 겨냥해서 랩으로 찬불가를 만들려고 합니다.(웃음) 사람들이 흔히 아는 찬불가의 분위기를 깨보려고요. 찬불가를 판소리로 만들면 어떨까요? 그렇게 만들고 싶기도 하고….(웃음)”

‘사랑은’ ‘구름처럼 강물처럼 흘러가는 우리 인생’ ‘방생을 합시다’ 등이 들어 있는 1집은 모두 트로트 발라드다. 스님은 앞만 보고 바쁘게 살아가는 도시인들에게 뒤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주고 싶어서 익숙한 리듬에 찬불의 가사를 붙여 만들었다.

“가난하지만 마음만은 부유하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너무 각박한 세상이거든요. 그때의 기억을 되살렸으면 좋겠어요.”

2집은 몸이 저절로 요동 치는(?) 활기찬 디스코 음악으로 가득 찼다. IMF 이후 경제난으로 울상을 짓고 있는 사오정, 오륙도들을 달래주기 위해서다. 백운사에 오는 신도들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지워주고 싶었다고 한다. 효와 후회 없는 삶에 대한 이야기도 흥겨운 리듬에 담았다. 능인스님은 자신의 노래가 사람들의 마음속에 흥겨움을 주길 바란단다.

1집과 2집에 실린 노래는 대부분 능인스님이 직접 작사, 작곡했다. ‘그럴수도 있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스님의 약력을 알려주면 놀랄 수밖에 없다.

한국전쟁의 상흔이 그대로 남아 있던 1953년 경북 김천의 원골에서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자유당 시절 초대 시의원으로 스님은 7남매 중 넷째 아들이다. 행복도 잠시. 아버지가 시의원이 된 지 6개월 만에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고, 모든 것을 잃었다. 모아둔 재산은 아버지가 주위 사람들에게 보증을 선 게 잘못되어 날려버렸다. 설상가상으로 마음을 잡지 못하던 아버지가 열두 살 가을에 화병으로 돌아가셨다. 그때부터 일곱 남매는 굶기 시작했고,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능인스님은 초등학교 6학년 1학기가 끝나고 더는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정규 교육을 받은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그때부터 식당 웨이터, 막노동, 도로공사 잡역부, 자동차 정비공 등 먹고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하기 시작했다. 삶이 팍팍하고 고단해질수록 그를 지탱하게 한 것은 불교 경전이었다. 스무 살 어느 날, 꿈에서 중생을 계도할 팔자라는 어느 노인의 이야기를 듣게 됐다. 그때부터 불교에 귀의할 뜻을 마음속에 품었다.

하지만 먹고사는 것이 중요한 일. 스물여섯 살에 결혼을 하고, 이듬해에 첫딸을 낳았다. 정비공으로 일하던 어느 날 꿈속에서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다. 꿈인지 생시인지, 잠에서 깨면 꿈에서 부르던 노래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꿈속에서 부르던 노래를 녹음해서 부르기 시작했다. 음악 교육이라고는 전혀 받지 못했지만 그 흥얼거림은 노래가 되었고, 음악이 되었다. 작곡이라는 작업을 그는 입으로 하고 있었던 것.

“불교에 귀의하려는 생각을 마흔여섯 살에 실천하게 됐어요. 초등학교 중퇴의 학력과 나이 때문에 출가가 어려웠어요. 그런데 (사)한국불교금강선원에서 저를 받아줬죠. 어릴 때부터 불교 경전을 외우고 다녀서인지 출가한 지 2개월 만에 머리를 깎고, 3개월 만에 백운사로 오게 됐어요. 남들보다는 과정을 빨리 이수한 거죠. 백운사 신도 중에 레코드사에 다니는 사람이 있어서 음반을 내게 됐어요.”

가족들의 반대는 전혀 없었다. 불교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사)한국불교 금강선원 스님이기 때문에, 결혼 경력이 출가에 큰 결점이 되지 않았다. 노래 부르는 스님이라는 소문이 나서 얼마 전에는 영주 경북불교대 이 부분부터에서 단독 콘서트도 열었다. 그리고 음악 법문도 했다.

능인 스님의 이런 활동은 ‘복지사찰’을 만들고 싶은 계획에 한걸음 다가가는 노력이다. 복지시설을 가지고 있는 사찰을 만들어서 의탁할 곳 없는 노인을 보살피고 싶다. 그리고 노래자선공연을 펼쳐 소년소녀가장이나 백혈병, 심장병 어린이 돕기도 실천하고 싶다. 하지만 혼자의 힘으로는 어렵기에 도움을 줄 사람을 찾는다며 웃는다. 능인 스님에게 트로트와 디스코 노래는 포교를 위한 하나의 활동일 뿐이다.

글 / 최영진 기자  사진 / 박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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