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마 이겨낸 아들 위해 전시회 연 윤재순

병마 이겨낸 아들 위해 전시회 연 윤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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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귀병 이겨낸 아들에게 기쁨을 형용한 그림을 선사하고 싶었어요”

지난 3월 3일부터 9일까지 긴 투병 끝에 희귀병을 극복해낸 아들을 위해 윤재순씨는 미술 전시회를 열었다. 생물학을 전공한 그녀가 미술 전시회를 열기까지는 만만치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죽음의 문턱에서 엄마의 품으로 돌아온 아들을 위해 그녀는 붓을 들었다.

아들에게 보내는 애틋한 사랑의 선물

가슴속에 묻고 살아갈 기억과 되새기고 싶은 기억은 엄청난 차이가 있게 마련. 윤재순씨(50)는 지금 그 차이를 절감하고 있다. 희귀병에 걸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던 아들 김진한군(18)의 악몽 같던 그날과 끔찍한 병마를 극복하고 완쾌 소식을 접한 그날을 동시에 기억하고 있었다. 아들의 건강 상태를 묻는 질문에 환한 미소와 한줄기 눈물로 말문을 열었다.

“우리 아들 진한이가 앓았던 병은 모야모야병이라는 희귀병이에요. 발병 당시에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아 아무런 말도 못했어요. 두 차례의 긴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제겐 진한이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진한이가 이상 징후를 보이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 5학년 시절. 학교를 다녀온 아이는 녹초가 돼 있었다. 팔에 힘이 빠져 신발주머니조차 무겁게 느껴진다고 했다. 무심코 지나쳤던 이날의 사건. 가정에 불행이 닥칠 암시였음을 그녀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점차 마비 증세는 온몸으로 퍼지기 시작했고, 전신마비로 이어져 정신을 놓아버리는 일까지 발생했다. 그 순간 윤재순씨는 정신이 번뜩 들었다. 아들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길거리에서 픽픽 쓰러지는 아들을 보며 하늘을 향해 살려달라고 애원하기도 했다. 유명하다는 병원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병명은 쉽게 드러나지 않았다.

발병 만 3년째. 유난히 춥던 2001년, 겨울의 끝자락이 보일 때 즈음이었다. 매운 음식을 먹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마비 증세가 더욱 심해진다는 말이 끝나자마자 진단이 내려졌다. 뇌의 혈관이 막힌다는 모야모야병이었다. 그렇게도 알고 싶어하던 병명을 손에 쥔 순간, 오히려 두려움은 더 커졌다.

“병명을 듣고 나서 한참을 멍하게 앉아 있었어요. 의사의 말이 메아리처럼 귓가에 울리기만 했으니까요. 모야모야병에 걸린 어느 환자가 뇌 수술을 10여 차례 해도 별 차도가 없었다는 말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급하게 수술 날짜를 잡아야 했다. 하루라도 지체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전에 아들에게 병명을 알려줘야 했다. 수술 후 벌어질 수 있는 상황에 대해서도 말해줘야 했다. 한창 사춘기이던 진한에겐 알리지 말자던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용기를 냈다. 환자의 정신력도 효과를 볼 수 있다는 막연한 생각에서였다.

“나중에 진한이가 다른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를 들었는데 당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해요. 백과사전을 들고 병명에 대해 자세히 알아봤나 봐요. 그런데도 엄마인 제게 내색하지 않고 밝은 모습으로 수술실에 들어갔습니다. 그날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픕니다.”

‘똑똑’. 수술 당일 새벽 5시. 아들 진한은 노크 소리에 무척 놀랐다. ‘바리깡’을 들고 나타난 간호원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한 후 의자에 앉았다. 스타일도 없었다. 새까만 머리는 푸릇푸릇한 피부가 드러날 만큼 깨끗하게 깎였다. 바닥에 흩어지는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아들은 애써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울컥하고 눈물이 치솟았다. 아침 7시에 시작된 수술은 10시간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마취가 깨지 않은 아들의 눈가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수술대 위에 누워 수많은 생각을 했을 아들을 생각하니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오른쪽과 왼쪽 두개골을 번갈아가며 절개해 뇌혈관을 이식해야 했다. 2차, 3차에 걸쳐 똑같은 상황을 몇 번이고 반복해야 한다. 이식된 뇌혈관이 정상적으로 자라면 막힌 혈관을 대신하게 될 것이다. 곧이어 이어진 2차 수술. 첫번째 수술보다는 좀더 의연한 자세로 수술 날을 기다렸다. 두번째 수술도 어김없이 10시간을 훌쩍 넘겼다. 이젠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서너 달 지난 후에야 경과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2003년 8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뇌혈관 검사에서 희망을 만난 것이다. 아들의 증세가 호전돼 완치도 기대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6년 만에 처음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안심은 금물이다. 긴장의 고삐를 늦춰서는 안 된다고 했다.

“손끝에 찌릿찌릿한 느낌이 들면 무조건 누워 있으라고 했어요. 길을 걷다 어지러우면 일단 주저앉으라고 말하기도 하구요. 순간 마비 증세가 또다시 찾아올 수도 있거든요.”

그녀가 붓을 들기 시작한 건 이맘때다. 아들을 위해 밝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사춘기 시절을 병마와 맞바꿔야 했던 아들에게 열정을 보여주고 싶었다. 아들만을 바라보며 주저앉아 있는 엄마의 모습은 부담감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몰두할 수 있는 작업이 필요했다. 전시회를 목표로 미술 지도를 받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아들은 희망을 엿보고 있었다. 아픈 기억을 작품 속에 모두 다 쏟아내려는 듯 벽면을 가득 채울 그림을 그렸다.

“지난 2월 12일이 제 생일이었어요. 작품 준비 때문에 생일인지도 몰랐는데, 아침에 눈을 떠보니 진한이가 아침상을 차려놨더라구요. 미역국과 달걀말이를 예쁘게 준비해놨더군요. 6년이란 세월 동안 생일상 한 번 차려보지 못했거든요. 우리 가족의 행복이 다시 찾아온 거예요.”

처음엔 장발로 수술 흉터를 감추고 다니던 아들은 어느새 짧은 커트로 헤어젤까지 바르며 당당히 세상에 나서고 있다. 두 군데의 큰 흉터를 바라보며 “어쩌다 다쳤냐”고 무심코 묻는 사람에게 “제가 말썽꾸러기거든요. 놀다가 다쳤어요~”라며 환하게 대답하는 아들을 보며 그녀는 웃음 짓는다. 이들 모자는 인내와 사랑으로 긴 터널을 막 빠져나왔다. 그들은 어느새 따뜻한 봄날을 만나고 있었다.

글 / 강수정(객원기자)  사진 / 전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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