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를 넘나드는 만화계의 대모 황미나

장르를 넘나드는 만화계의 대모 황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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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만화도 애장본으로 간직할 수 있게 만들었어요”

만화계의 ‘짱’이라 불리는 황미나. 20여년 동안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발표하며 국내 만화계를 선두해온 그녀가 또 하나의 팬 서비스를 준비했다. 그녀의 대표작이며 스스로 가장 애정이 가는 작품으로 꼽는 ‘레드문’ 소장본을 출간한 것이다. 그녀의 작품세계로 들어가 보았다.

루나레나의 비밀 이야기 1

지구와 우주를 넘나드는 ‘레드문’ 소장본 탄생하다

자신의 작품 공간을 선뜻 내보이려하는 작가는 드물다. 작업실은 말 그대로 작업을 위해 흩어져 있는 재료와 이미지들의 흔적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사진 한 컷에도 배경을 의식했고 소품 하나에도 의미를 전달하고 싶어했다. 서점이나 따뜻한 봄내음 물씬 풍겨나는 공원이 아닌 자신의 작업실로 취재진을 초대했다. 그녀가 살고 있는 분당으로 가는 길은 무척 가깝게 느껴졌다. 초행길인 그 누군가를 위해 미리 익혀놓은 듯 자그마한 도로 하나도 빠지지 않고 알려주고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활짝 문이 열리며 네 마리의 애완견이 취재진을 맞이했다. 그녀의 만화속 주인공처럼 맑은 눈을 가진 애완견들은 낯선 이들에게 무척 호의적이었다. 그동안 수많은 만화 관계자들과 문하생들, 팬들이 방문했음을 입증이라도 하는 듯 꼬리를 흔들며 반기고 있었다. 하늘과 거의 맞닿아 있는 아파트 맨 꼭대기 층. 복층으로 돼 있어 아래층은 작업실로 윗층은 개인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거실을 지나 빼곡이 만화책이 쌓여 있는 작은 방으로 인도했다. 천장까지 사방이 꽉찬 책꽂이는 세겹으로 돼 있었다. 책꽂이 겹겹이 위아래에 도르레가 달려있어 수많은 책들이 정갈하게 정리돼 있었다. 가운데 놓여진 탁자에 모여 앉자마자 이야기는 시작됐다. 미처 취재수첩을 꺼내기도 전에 그녀의 인생 이야기는 하나둘 실타래처럼 풀리고 있었다.

“흔히 하는 말로 ‘맛있겠다’는 느낌을 주는 책이 있어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그런 느낌있거든요. 오랜 세월 작업을 하다보니 재미있을 것 같은 책은 빛이 번쩍 나는 것 같아요”

그건 제목에서만 받는 느낌이 아니었다. 촌스럽고 우스꽝스러운 타이틀이지만 손이 가는 작품이 있다. 그녀가 낸 책 중에 기가 막히게 잘 만들어낸 제목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길 잃은 작은 새를 보았다’입니다. 항상 제목은 작품을 다 끝내놓은 다음에 정하게 되거든요. 그 작품은 제목 때문에 고민하던 중이었어요. 때마침 하늘 위로 나는 작은 새를 보게 됐어요. 그 순간 제목이 떠올랐죠”

무척 진한 블랙 커피를 요구했다. 처음엔 연한 커피를 좋아했겠지만 어느새 세월이 흘러 무뎌졌을 것이다. “너무 독해서 약같다”는 농담을 들을 정도로 진한 커피는 그녀에겐 이미 일상이 됐다. 그녀의 작품활동도 약과 같이 쓰고 되새기기 힘든 작업의 연속일 것이다. 일에 대한 욕심이 많은 그녀의 작업 공간은 예상대로 같은 장소에서 이뤄지고 있었다.

“작업실을 따로 운영한 적도 있었는데 마감때마다 거의 집에 들어가지 못하니까 이중 살림을 해야 하더라구요. 그래서 합쳤죠. 처음엔 작업실과 개인공간을 같이 두었어요. 잠에서 깨어나 방문을 열고 나오면 바로 작업실이 있다보니 일에 대한 강박관념이 생기더라구요. 시작과 끝이 없는 느낌있잖아요”

‘일벌레’로 소문난 그녀는 어쩌면 환경에서 만들어졌는지 모른다. 눈만 뜨면 문하생들이 득시글거리는 공간에서 눈코 뜰새없이 바쁜 그들을 바라보며 자신을 채찍질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결정한 복층 아파트. 계단을 사이에 두고 철저히 구분된 생활속에서 조금씩 여유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한 계단씩 밟고 올라가다보면 한낮에 벌어졌던 모든 일들이 머리를 스쳐지나가요. 짧은 순간이지만 머릿속이 맑아지는 느낌이 들어요. 그리고 작품속 주인공에서 벗어나 독자의 시선으로 변하게 되죠”

‘레드문’ 소장본을 출간하게 된 것도 이때 즈음이다. 작가의 욕심이 앞서기도 했지만 후배 작가들에게 희망을 안겨주고 팬들에겐 추억을 되살릴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싶었다. 자신의 대표적인 작품이며 가장 애정이 가는 작품으로 꼽는 ‘레드문’. 레드문은 그녀에게 의미가 남다른 작품이다. SF 판타지 계열의 작품으로서 외계 생명체와 지구인 간의 전쟁과 사랑을 바탕에 깔고, 거기에 풍부한 상상력을 덧붙여 장대한 휴머니즘을 선보였다는 평을 받은 이 작품은 1999년 문화관광부가 주최하는 제 1회 ‘오늘의 우리만화’에서 그 작품성을 인정받아 1회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국립도서관 정식 소장 도서로 지정되기도 했다.

SF 판타지 만화가 봇물처럼 쏟아지던 당시의 상황에서 ‘레드문’이 수상의 영예를 안을 수 있었던 것은 5년이란 긴 시간동안 호흡이 흐트러지지 않고 주제를 전달할 수 있었던 작가의 역량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미진했던 부분을 추가했고 전권 주요 장면을 컬러화했다. 레드문의 줄거리는 매우 독특하다. 평범한 고교생 윤태영에게 어느 날부터 기이한 사건이 닥친다. 꿈속에서 본 것이 실제로 재현되고 기억이 오락가락하는가 하면 순간적으로 초능력에 가까운 괴력이 발휘돼 고교 주먹계의 맹주로 떠오르기도 한다.

이 모든 일들은 태영의 출생 비밀 때문이다. 지구가 아닌 우주의 다른 별에서 태어난 태영은 우주를 이끌고 통치할 신탁을 받고 태어난 자다. 그러나 이 ‘태양’의 자리를 노린 동생 아즐라와 그 패거리의 음모로 쫓기는 몸이 되어 지구인 태영의 몸을 빌려 인간의 생활을 하게 됐던 것이다. 태영의 잃어버린 기억과 능력을 찾아주려는 루나레나와 사다드, 태영을 표적으로 쫓으며 애증을 불태우는 아즐라, 태영과 자신의 운명이 하나의 실처럼 연결돼 있다고 믿는 무당소녀 지화 등이 함께 얽혀 삶과 죽음,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우주의 신탁을 설명한다는 내용이다. 황미나는 미진했던 전편에 새로운 부분을 추가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그 유명한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주어 문명을 가르친 죄로 코카서스의 바위에 쇠사슬로 묶여 날마다 독수리에게 간을 쪼여 먹히고 밤이 되면 간은 다시 회복되어 영원한 고통을 겪는 형벌을 받는다.

루나레나의 비밀 이야기 2

‘마감빨’로 76시간 잠 안자고 일하다



잡지든 신문이든 연재를 하는 작가들은 프로메테우스의 고통 속에서 산다. 레드문 연재를 하면서 그녀는 5년 동안이나 프로메테우스의 고통속에서 살았다. 하지만 완간을 하고 나서도 마냥 홀가분하고 즐거울 수만은 없었다. 대작을 끝냈다는 만족감보다는 연재에 치여 제대로 그려내지 못한 사소한 부분들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그래서 수많은 작품 중에서 첫 소장본 작품으로 주저없이 ‘레드문’을 선택했다. 작품을 단순히 재편집하던 지금까지의 소장본과는 달리 이번 복간 작업에 작가는 처음부터 같이 참여했다.

내용 전개가 매끄럽지 못했던 부분들은 원고를 새로 그렸고 주요한 장면이나 새롭게 표현하고 싶었던 부분들은 컬러화했다. 표지도 요즘 감각과 소장본에 어울리게 심혈을 기울였다. 복간 과정에서 작가가 들였던 노력은 연재 당시의 그것과도 견줄만했다. 기존의 ‘레드문’ 팬들이라도 전혀 새로운 레드문을 만나보게 될 것이다.

“한창 성장하는 청소년기에 기를 모으는 운동을 해야한다고 생각해요. 어린시절 운동을 무척 좋아해서 즐겨했었는데 그래서인지 긴 시간 잠을 자지 않고 일해도 거뜬한 것 같아요”

초등학교 시절부터 무협지, 소설 등에 빠져 지내던 그녀는 항상 중국 무술을 꿈꿔왔다. 직접 해보고 싶은 심정이 간절했지만 기회는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러던 고등학교 3학년 어느 날, 우연히 텔레비전을 통해 ‘우슈’를 접하게 됐다. 그 날의 흥분은 지금도 생생하다.

“쿵후를 보는 것 같았어요. 우슈를 하는 사범의 손끝에서 미세하게 떨리는 기를 본 듯 했어요. 필이 꽂히더라구요”

그 날로 우슈 도장을 찾았다. 당시 우슈를 하는 여성이 드문 상황이었다. 어린시절부터 유난히 관심이 많았던 운동이었기 때문에 진도는 남들보다 빠르게 나아가고 있었다. 두서너달이 되자 수준급이 됐다. 최초의 여사범을 키워내겠다는 사범의 욕심도 대단했다. 하지만 상대방을 내쳐야하는 우슈를 하면서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사범님은 제 손 끝에 동정이 남아있다고 하더라구요. 권법을 하기 위해선 마음속에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동정을 거둬내어야 한다는거예요. 상대방을 있는 힘껏 내려친다는 건 쉽지 않았어요”

혼자만의 운동으로 멈춰야 했다. 사범과 대련하면서 수도없이 맞기도 했지만 손끝에 걸려있는 동정심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꾸준히 연습에 전념하면 최초의 여성 사범이 될 수 있다는 주위의 격려에도 불구하고 우슈를 접어야 했다.

하지만 운동으로 ‘깡다구’는 생겨났다. 지금도 마감때가 되면 사나흘 거뜬히 밤을 새고 작업에 몰두할 수 있는 힘이 길러진 것이다. 예전엔 76시간 잠 안자고 마감을 한 뒤 거의 스무시간을 잠만 잔 적도 있었다. 몸을 옥죄던 긴장감은 ‘잠’이라는 명약을 통해 서서히 사그라들게 마련이다. 그녀에게 하루 밤을 지새우는 건 기본이다. 하지만 몇 년 사이에 걱정이 하나 생겼다.

“며칠을 꼬박 지새워도 8시간 이상을 못 잘때가 있더라구요. 예전에 작가 선배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거든요. 그게 나이가 들었다는 신호라고 했었거든요. 어느 날부턴가 제게도 그런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한거예요. 나이는 못 속이나봐요(하하)”

어찌됐건 체력이 좋은 건 분명했다. 몇날 며칠을 똑같은 자세로 그림을 그린다는 건 대단한 집중력을 요구한다. 그 집중력을 버티기 위해선 튼튼한 체력은 기본이다.

얼마 전에는 뉴욕에서 전시회를 열어보자는 제안을 받기도 했다. 작가에게 있어 전시회는 커다란 의미로 다가선다. 하지만 그녀는 여기서도 달랐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원고를 분실하면 어떡하냐”며 대뜸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전 그림을 보면서 감동을 받은 적이 없거든요. 상황이 그렇다보니까 주인공이 돼서 전시회를 연다는 게 내키지 않더라구요. 그저 만화를 그리면서 독자와 만나는 게 최고라고 생각해요”

그녀는 독자를 만나는 행사장이라면 시간을 내서 참여한다. 길게 줄을 늘어선 아줌마, 아저씨 팬들을 만날 때마다 새로운 기운을 받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손에 이끌고 사인회에 와서는 당당히 앞에 나서서 사인을 받지 못하고 아이들을 시켜서 받아오게 하는 경우도 있다.

만화와 떨어져서는 생각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그녀에게 또 다른 재능이 숨어있을 것 같았다. 그녀에겐 음악적 재능이 놀라울 만큼 감춰져 있었다.

루나레나의 비밀 이야기 3

10여 년에 걸친 역사 대작 추진하다

“초등학교 1학년 음악수업시간이었어요. 선생님께서 실로폰으로 ‘도레미파솔라시도’를 쳐주더라구요. 그런 다음 다양한 음을 칠때마다 음표가 머릿속에 그려졌어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저만 그렇더라구요. 전 지금도 음악을 들을 때면 멜로디가 머릿속에 그려진답니다”

그녀의 초등학교 친구는 그런 그녀를 위해 바이올린을 선물하기도 했다. 따로 시간을 내서 배우지 않아도 한 두시간의 연습을 통해 쉽게 음을 터득하곤 했다. 친구들이 신기한 듯 비결을 물어보면 난감했다.

“음이 들리는 것을 어찌 그 음이 들리냐고 하면 뭐라 할 말이 없더라구요. 제가 아무리 설명을 해주어도 이해 못하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요”

작업실에 놓여진 낡은 통기타. 중학교 시절, 내성적인 그녀가 홀로 기타를 팅기며 시간을 보내던 날들이 그려졌다.

인터넷에 만화관련 사이트는 엄청나다. 하지만 체계적인 마케팅 전략으로 팬들을 공략하는 전문가의 거의 없는 실정이다. 만화계의 발전을 위해 해결되어야 할 시급한 문제가 뭐냐는 질문에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그녀도 황당한 경험을 한 일이 생각이 났다.

“당장 내일 연재물이 출판되기로 돼 있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친구한테 연락이 온거예요. 제 연재물이 인터넷에서 떠돈다는거죠. 출판사에서 인터넷 업체와 계약을 한거예요. 일단 인터넷에 깔리면 돈은 벌 수 있으니까 그런 방법을 선택한 건 이해하지만 시기상의 문제지요. 그런 일들이 반복적으로 벌어지면서 만화업계가 더 힘들어지는 겁니다. 법적인 규제가 필요하지만 전무인 상태죠”

그녀는 10여 년에 걸친 대작과 함께 5월 중순경에 매일 발간되는 만화 무가지를 위해 또 한번 정열을 쏟아 붓고 있는 중이다.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 만화계의 발전을 위해서, 신인 작가들의 큰 울타리가 되기 위해 오늘도 변함없이 작품 활동에 전념하고 있을 것이다.

글 / 강수정(객원기자)  사진 / 박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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