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을 타는 일은 외롭다. 어느 누구도 도움을 줄 수 없는 혼자만의 고독한 싸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보는 사람들에게는 손에 땀을 쥐며 재밌어한다. 우리나라에서 줄을 탈줄 아는 사람은 고작 5~6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중 권원태씨는 얼마 전 미국에서 열린 세계 줄타기 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줘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남사당패’라는 민중놀이 집단이 있었다. 우두머리인 ‘꼭두쇠’ 밑으로 연희자 4~5명이 있는 유랑예인집단으로 일정한 거처가 없는 독신 남자들로만 구성됐다. 이들은 풍물, 버나놀이(접시돌리기), 덧뵈기(탈춤), 어름(줄타기), 살판(땅재주), 덜미(인형놀이) 등 6가지 놀이를 가지고 보수도 없이 숙식만 제공해주면 마을의 큰 마당에서 밤새워 놀이판을 벌이곤 했다. 연희와 웃음을 사람들에게 선보이고 대신 밥과 잠자리를 제공받았던 예인들이다.
1900년대 이전에 남사당패는 그렇게 명맥을 이어갔다. 지금으로 말하면 가수이며 개그맨인 연예인들이었다. 놀이가 부족했던 시절, 그들은 삶이 고달픈 민초들에게 웃음과 놀이를 선사했다. 정작 자신들은 천민이라고 천대와 설움을 받았지만.
요즘 남사당패가 다시 집중 조명되고 있다. 특히 지난 4월 9일 미국 플로리다 탬파베이에서 열린 ‘세계의 최고 기록줄타기’ 부문에서 경기도 안성시립 남사당 ‘바우덕이 풍물단’ 권원태씨(38)가 우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그 관심이 증폭됐다. 아무도 관심 가져주는 이 없는 한국의 줄타기를 세계에서 인정했기 때문이다. 높이 8m, 길이 50m 줄을 빠른 시간에 통과하는 경기에서 권원태씨는 19초 33이라는 최고 기록으로 1위를 차지했다. 경기를 주관한 니혼 TV에서는 기네스북에 기록이 올라갈 수 있도록 절차를 밟을 예정이라고 한다. 그의 뒤를 이어 2등을 한 미국인 티노는 23초의 기록을 세웠다. 특히 2등에 그친 티노는 7대째 줄타기를 하는 가문에서 출전해 이번 대회의 강력한 우승 후보였다.
“아는 사람이 줄타기대회가 열린다는데 출전할 거냐고 섭외를 해왔어요. 자신이 있었죠. 열댓 명이 토너먼트로 경기를 치러 마지막에 4명이 남았어요. 그중에 2위를 한 미국인 티노는 7대째 줄타기를 하는 가문에서 나왔어요. 제가 19초 33이었고, 티노가 23초. 외국에는 줄타기 하는 사람이 적어도 수백 명은 되는데, 기껏 5~6명밖에 안 되는 우리나라에서 우승을 해서 너무 좋았어요.”
몇십 년을 타온 줄이건만, 막상 경기를 하자니 떨렸다. 줄타기 대회에서 우승한 후에 주관사는 도전자들과 다시 한번 겨뤄보는 게임을 제의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모든 일정은 우승자 권원태씨에게 맞출 것이라고 한다. 어쩌면 한국에서 경기가 열릴 수도 있다고 귀뜸한다.
줄 타는 모습을 보면 입이 저절로 벌어진다. 보기에도 아찔한 3m 높이에 걸린 외줄이 그가 서야 할 곳이다. 부채 하나 들고 줄에 올라선다. 흔들리는 줄 위에서 기우뚱기우뚱 균형을 잡으며 관객의 눈을 본다. 처음에는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는 간단한(?) 묘기만을 선보인다. 심드렁한 관객들의 눈을 의식한 듯 점차 난이도를 높인다.
그의 몸이 풀리기 시작한 듯 더욱 아슬아슬해진다. 외줄의 장력을 이용해 2~3m 높이까지 점프를 한다. 한쪽 무릎을 꿇고 줄을 탄다, 점프 후 한 바퀴를 돈다, 양발을 점프해 코를 차는 진기명기도 보여준다. 사람들 입에서 ‘오메오메’라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현란한 묘기가 이어지는 동안 관객석은 숨을 죽인다. 혹여 작은 소리에도 놀라서 그가 실수할까 봐, 혹여 작은 소리가 외줄 타는 것을 방해할까 봐. “줄타기가 저렇게 재미있고 스릴 넘치는 줄 몰랐다”는 젊은 관객의 말처럼, 그의 줄타기는 화려한 외국 서커스단의 묘기에 절대 뒤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생동감 있고, 매력적이다.
열 살 때 줄타기에 입문, 그만두고 싶은 적 많았지만…
권원태씨가 줄타기에 입문한 것은 열 살 때였다. 농악대에서 활동하던 어머니의 권유(?)로 줄을 타기 시작한 것. 무엇보다 한창 또래들과 어울려 뛰어놀 시절에 줄을 타야 한다는 것에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권원태씨의 고향은 부산이다. 하지만 열 살 때부터 전국을 돌아다니는 유랑극단 생활을 했던 탓에 고향에 대한 기억은 그리 많지 않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 때문에 줄을 타고 유랑극단 생활을 했지만, 학교 다니는 또래들을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지금이야 남사당패에서 연희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때는 ‘딴따라’라는 싸늘한 시선만이 있었다.

“줄타기에도 수십 가지 기술이 있어요. 줄을 타면서 바보 흉내, 애기걸음 흉내, 아줌마 흉내 등 무궁무진하지요. 그래서 줄타기 기술은 몇 가지라고 말을 못 해요. 선생님들이 제 줄타기는 ‘시원’해서 좋다고 말씀하세요. 굉장히 높이 점프하거든요.(웃음)”
악극단을 이끌고 다니며 여러 축제 현장에서 줄을 탔다.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줄을 타고, 줄 위에서 사람을 웃기는 재주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는 전국을 누비고 다녔다.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았지만, 그는 계속 외롭게 줄을 탔다.
그러다 친구의 소개로 한 여자를 만났다.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은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과는 사뭇 달랐다. 1995년 기억조차 하기 싫은 어려움을 헤치고 결혼을 했다. 남들이 놀 때 줄을 타야만 했고, 남들이 일할 때 집에서 쉬는 그는 가정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혹여 줄을 타다 다칠까봐 아내는 항상 집에서 가슴 앓이를 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항상 아내와 두 딸에게 미안하다.
“혹시 아이들 중에 이런 일을 한다면 절대로 말려야죠. 저는 너무 힘들고 외롭게 배웠거든요. 아내도 마찬가지로 반대할 거예요.”
이제는 전국 각지에서 남사당 바우덕이 풍물단을 찾는다. 그리고 그는 서울부터 태백까지, 남사당패를 찾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 줄을 탄다. 그것이 남사당패의 운명이고 줄을 타는 사람의 숙명이니까. 매주 토요일 안성 남사당전수관에서 열리는 토요상설공연에서도 권원태씨의 줄 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저는 앞으로 기껏해야 10년 정도 줄을 탔을 있을 거예요. 그 전에 세계에 내놓아도 뒤떨어지지 않는 제자 두 명 정도 키우고 싶어요. 줄타기도 우리가 보호해야 할 문화유산이거든요.”
글 / 최영진 기자 사진 / 백성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