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길을 지켜보는 이 참으로 많다. 가시는 길 안타까이 마음 졸이는 이 역시 부지기수. 가진 것 없이 홀로 가는 그 길, 묵도로 추념하는 정은 모두 그가 뿌린 씨일 터. 시인으로, 선생으로, 후원자로 멈출 줄 모르는 열정을 태우던 시인을 앙망한다.
예고된 길, 하지만 안타까움은 더 할 뿐!

지난해 10월, 딸 자명씨(47)는 레이디경향과의 인터뷰에서 “가래를 뽑아내기 위해 목에 관을 꽂고 계시다”고 설명하면서 “나와 마주하면 눈으로 얘기하고 필설로 얘기한다. 간혹 베개에 손가락을 눌러쓴 단어의 잔상으로 얘기를 나누기도 하는데, 소리가 공기 중에 부서지듯 아버지의 필설이 베개의 복원력에 묻혀지는 느낌을 받는다”고 당시 간병 상황을 설명하기도 했다.
지난해 「문학사상」 7월호에 ‘저승의 문턱에서’라는 시를 발표했고, 격월간 문예지 「한국문인」(2003년 10·11월호)에는 유언과 함께 남긴 시 ‘오늘서부터 영원을 살자’를 발표하며 오래 전부터 오늘을 준비했던 그이기에 주변은 차분히 추모로 회귀하는 듯하다. 수많은 지인이 명동성당에서 있은 영결미사를 찾았다. 하지만 돌아보면 노 시인의 노년은 그리 소담스럽진 않았다는 인상이다.
부인 서영옥씨는 1993년 작고했고, 장남 홍씨는 1997년 폐렴으로, 차남 성씨는 1987년 폐결핵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유일하게 남은 가족 딸 자명씨는 결혼해서 나가 살고 있었다. 결코 병든 시인의 노년에는 먼저 세상을 등진 아들의 자제 즉, 손자 하나와 구상 선생의 처제 하나가 전부였다. 그렇다고 집 안을 지키고 있을 분이 아니라 그리 괘념치는 않았다고.
따지고 보면 시인의 삶 역시 그랬다. 문천 태생(혹자는 1919년 서울 이화동에서 태어났다고 한다)으로 네 살 되던 해 베네딕도 수도원의 교육사업을 위촉받은 아버지 구종진씨를 따라 함경남도 원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열다섯 살에 가톨릭 사제가 되려고 수도원 부설 신학교에 들어갔으나 3년 만에 환속했다. 딜레마는 언제나 종교와 예술 사이의 갈등이었다. 어찌 보면 그의 삶은 그 둘의 화해를 위한 고행이었고 구도였는지도 모른다.
시인 구상이 남긴 일화 역시 매머드급

그의 약력을 들추면 나오는 도쿄 니혼(日本)대학 종교학과 입학은 고향을 떠나 노동판 인부, 야학당 지도 등으로 전전하다가 도쿄(東京)로 밀항한 전력의 ‘중간 생략’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고국에서도 그러했는데, 다른 나라라고 뾰족한 수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곳에서도 일급 노동자와 연필공장 직공일로 연명했다. 물론 대학을 가면서도 종교학과와 문예창작학과 사이에서 무수히 갈등했다. 다행히 그가 택한 종교학은 그의 문학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된다. 특이한 것은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자란 그가 불교를 전공했다는 것이고, 이것이 범종교적 시야를 갖춘 계기가 되었다.
해방 후 고향 원산으로 돌아와 동인시집 「응향(凝香)」에 ‘밤‘ ‘여명도’ ‘길’ 등을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그러나 이중섭이 표지화를 그린 이 동인지의 수록 작품이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으로부터 반사회주의적이라는 이유로 비판을 받자 월남했다. 이후 경력(박스 참조)은 언론사와 대학 강단에서 보낸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시인은 효성여대, 서강대, 서울대 등에서 강의하다 1970~1974년 미국 하와이 대에서 초빙교수를 지내는 등 오랫동안 교육자의 길을 걸었다. 그가 전임교수가 되지 않았던 것은 두 차례에 결친 폐수술로 정규 강의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일찍 두 아들을 여읜 것도 폐질환에 기인한 바 크다.
유명한 만큼 그 일화 또한 수도 없이 많다. 그중 하나가 걸레스님 중광을 세상에 처음 알린 분이 바로 구상 시인이라는 사실이다. ‘겉도 안도 너덜너덜 / 그 걸레로 이 세상 오예(汚穢)를 / 모조리 훔치겠다니 기가 차다…’로 시작되는 ‘걸레 스님’이란 시도 썼다. 중광 또한 자신을 알아본 시인에게 성심을 다했던 듯. 시인의 둘째아들이 결핵을 앓고 있을 때 중광은,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전시회를 열고 그 수입금 모두를 희사해 요양원에 입원시켜주기도 했다.
또한 교분이 두터운 박삼중 스님이 벌이는 사형수 돕기에도 적극적이었다. 그중 하나를 양아들로 삼고 옥바라지를 하며 구명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결국 그 사형수는 7년 만에 무기로 감형됐고 그 은덕을 갚고자 어미와 함께 시인을 찾았으나 만나주지 않았다. 물론 본심이 아니었다. 돌아서는 어미와 양아들 뒤로 박삼중 스님을 통해 인삼꾸러미를 챙겨 보내며 양아들의 어머니를 걱정했다고 한다. 결국 양아들은 수형생활 15년 만에 석방되었다. 이는 우리나라 행형 사상 유례가 흔치 않은 일이라고 한다.
또 병실에서 투병중이던 지난해 10월 장애인 문학지 「솟대문학」에 2억원을 쾌척하는 등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는 데 적극적이었다.

문학계에 중요한 자리에 있으면서도 숱한 정계 진출 요구를 뿌리쳤고, 정권마다 대학총장 등의 ‘당근’같은 영입 시도에 휘말리지 않았다. 이런 고인의 올곧은 성품과 아름다운 선행 때문에 그의 별세 소식은 더욱 안타깝게 만든다.
시인은 갔다. 하지만 그가 남긴 시어와 언행일치의 삶은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표석처럼 든든히 세워져 있다.
줄이고 줄인 대시인의 약사
시인 구상은 1948~1950년 연합신문 문화부장을 지냈고 6·25 전쟁 종군작가단 부단장, 승리일보, 영남일보, 경향신문, 가톨릭신문 등의 편집국장 및 논설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효성여대, 서강대, 서울대 등에서 강의하다 1970~1974년 미국 하와이 대학에서 초빙교수를 지내는 등 오랫동안 교육자의 길을 걸었다. 대표작으로 1956년에 발표한 연작시 ‘초토의 시’를 들 수 있다. 6·25 전쟁을 다룬 이 시는 전쟁의 고통을 초월해 구원의 세계에 이르는 과정을 견고한 시어로 잘 표현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작품으로 1957년 서울특별시문화상을, 1980년 대한민국문학상을 수상했다. 이 시집은 영어, 프랑스어, 독어, 일어, 이탈리아어 등 외국어로도 다수 번역됐다.
이렇듯 시인의 작품은 일찍부터 프랑스어와 영어, 독어, 스웨덴어 등으로 번역되어 세계 문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이런 덕에 문화적인 자존심이 강하기로 유명한 프랑스에서 뽑은 세계 200대 문인의 한 사람으로 뽑히기도 했다. 우리나라 문인으로서는 유일한 것이다. 저서에 시집 「구상시집」(1951), 「말씀의 실상」(1980), 「까마귀」(1981), 「드레퓌스의 벤치에서」(1984), 「구상연작시집」(1985), 「개똥밭」(1987), 「유치찬란」(1989), 「조화 속에서」(1991), 「오늘 속의 영원, 영원 속의 오늘」(1996), 「인류의 맹점에서」(1998), 「두 이레 강아지만큼이라도 마음의 눈을 뜨게 하소서」(2001) 등이 있다. 수상집으로는 「침언부어(沈言浮語)」(1960), 「영원 속의 오늘」(1976), 「실존적 확신을 위하여」(1982), 「삶의 보람과 기쁨」(1986), 「시와 삶의 노트」(1988) 등이 있다.
그밖에 사회평론집 「민주고발」(1953), 묵상집 「나자렛 예수」(1979), 시론집 「현대시창작입문」(1988), 희곡 시나리오집 「황진이」(1994) 등을 남겼다. 시인은 말년에 「구상문학총서」(전10권. 홍성사 刊)를 기획, 제1권으로 자전 시문집 「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를 이어 제2권으로 시집 「오늘 속의 영원, 영원 속의 오늘」, 제3권으로 연작시집 「개똥밭」을 출간했으나 완간을 보지 못했다. 시인은 생전의 업적으로 금성화랑무공훈장, 국민훈장동백장, 대한민국문학상, 대한민국예술원상 등을 수상했다. 유족으로는 소설가인 딸 자명씨(47)와 사위 김의규(47) 성공회대 교수, 손녀 향나씨(19)가 있다.
글 / 강석봉 기자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