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나눈 아름다운 우정 한상환·이학근

생명을 나눈 아름다운 우정 한상환·이학근

댓글 공유하기
“받은 사랑만큼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요”

사형선고를 받은 간암 환자가 친구의 도움으로 새 생명을 얻었다. 20년 전 청량리에서 가전제품을 수리하면서 친해진 두 사람은 형제보다도 더 진한 우정을 간직하고 있다. 죽음을 앞둔 친구를 위해 기꺼이 간을 기증한 한상환, 이제는 친구의 이름만 들어도 눈물이 나온다는 이학근씨를 만났다.

힘든 병마를 이기고 살아준 친구가 고맙다

병원을 찾았을 때 한상환(46)씨는 퇴원 수속을 밟고 있었다. 지난 1일 전화 통화했을 때만 해도 수술이 막 끝난 뒤여서 말하는 것조차 힘들어했는데 그 사이 빠르게 회복하고 있었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12시간이 걸린 대수술 동안 가족들은 속을 까맣게 태워야 했다.

간을 이식받은 이학근씨(46)는 중환자실에서 무균실로 옮겨졌다. 보호자조차 면회가 일체 금지됐다. 세상과의 유일한 통로는 인터폰 통화가 전부다. 천만 다행으로 병원측과 환자측의 동의를 얻고 밀폐된 그곳, 무균실로 들어갔다. 아직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환하게 미소 짓고 때로는 농담도 건네는 모습에 안심이 됐다.

학근씨는 상환씨로부터 60%의 간을 이식받았다. 더이상 재생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절반 이상을 받은 것이다. 나머지 40%를 가지고 있는 상환씨도 음식물 조절과 안정을 취한다면 최고 80%까지 재생이 가능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수술은 끝났지만 간이식을 받은 학근씨가 건강을 되찾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아주 사소한 병균의 침입도 환자에게는 치명적이기 때문에 절대 안정이 요구됐다. 전자파 때문에 TV도 가까이 하지 않는다.

큰 수술이었지만 천성이 낙천적이라 지금의 상황을 잘 극복하고 있다. 오지랖 넓은 상환씨는 이미 병원에서 사람 좋기로 소문이났다. 지나가는 환자들에게 일일이 건강 상태를 묻고 심지어 그 가족들과도 인사를 나눈다. 3주 입원했는데 같은 병동 환자들을 거의 알고 있었다.

수술실에 들어가기 2주 전 20년 지기들은 짧게 이야기를 나눴다. 말이 뭐 필요할까. 굳이 말하지 않아도 속 깊은 얘기는 서로 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평소 강한 모습을 보였던 상환씨도 학근씨를 보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자고 손을 굳게 잡았을 때는 학근씨의 눈에도 눈물이 흘렀다.

청량리 토박이인 상환씨와 괴산 출신인 학근씨. 두 사람은 85년 청량리에서 가전제품을 수리하면서 만났다. 한 동네에서 그것도 아래 윗집으로 같은 일을 하다 보면 경쟁자가 될 법도 한데 그들은 처음부터 사이가 좋았다. 3개월 늦게 문을 연 상환씨는 친구인 학근씨에게 고사떡을 돌리며 같은 업종이니 헐뜯지 말고 서로 잘 지내보자고 말했단다. 그때부터 둘은 부품이 모자라면 서로 빌려주고 살뜰히 챙겨주면서 마음을 나누는 사이가 됐다. 힘들 때마다 서로를 찾아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가게 문을 닫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벌어진 술판은 새벽 1시를 넘기기 일쑤였는데, 서로의 일이라면 밖에서는 100점짜리 남자라도 집에서는 0점짜리 남편이기를 자처했다. 친한 만큼 격이 없다 보니 언뜻 보면 그들이 싸우는 것으로 오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는 애정 어린 덕담뿐이다. 하루는 상환씨가 학근씨의 가게에 놀러갔다. 때마침 제품을 수리하고 있는데 그 방식을 놓고 언쟁이 붙었다. 상환씨가 “이렇게 하는 거 아니야”라고 하면 학근씨는 “아니야. 이게 맞아. 네가 자꾸 옳다고 우기면 어디 한번 해봐”라고 받아쳤다. 그렇게 다투다 물건 주인이 찾아올 때까지 고치지 못했다. 한없이 퍼주는 사이임에도 일에서만큼은 양보하지 않는 것이다.

두 사람을 보고 있노라면 초록은 동색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두 사람은 신기하게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닮은꼴이다. 나이도 같고, 가전제품을 수리하는 직업도 똑같다. 키, 몸무게, 신발 사이즈, 식성, 성격, 머리가 하얀 것까지. 심지어는 주민등록증 뒷자리 3개도 똑같다. 

3년 정도 같은 동네에서 가전제품을 수리하다가 제 살 깎아 먹기인 것 같아서 상환씨는 전기설비로 업종을 전환했다. 당시 건축 경기가 호황을 누렸던 때라 돈도 제법 벌었다. 지방을 돌아다니며 공사를 하다 보니 길게는 몇 년씩 공사 현장에서 머물기도 했다. 하지만 ○○씨 안부는 거르지 않았다.

학근씨는 10년 전부터 몸이 안 좋았다. 둘은 만나면 술잔을 기울이기 일쑤인데 어느 순간부터는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몸이 받아들이지 않으니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10년 전 유전성 B형 간염이 지난 2000년에는 간경화로 전이됐고 작년에는 최종 간암 선고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제 남은 방법은 간이식 수술밖에 없었다. 가족들은 간질환이 있어 줄 수 없고 친척들도 맞는 사람이 없었다. 친한 친구들에게 부탁도 했지만 쉽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학근씨에게 털어놓았다.

“어느 날 전화가 왔어요. 오래 못 살 거라고 말하더라고요. 갑자기 성질이 나서 호통을 쳤죠. 말이 씨앗이 된다는데 할 말 못 할 말 따로 있잖아요. 그리고 왜 그런지 물었죠. 작년부터 몸이 안 좋아서 가게를 그만두고 등산을 한다는 사실은 알았는데, 간암이라니 믿어지지 않더라구요. 다른 친구들에게도 부탁을 해본 모양인데 마지막으로 저에게까지 왔나봐요. 생각해보고 전화한다고 했는데… 앞뒤 따질 상황이 아니었어요. 너무 걱정하는 것 같아 맞으면 내 거 떼어준다고 했어요.”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너무 성급하게 결정한 게 아닌가 싶어 덜컥 겁이 났다. 2∼3일은 밤잠을 설쳤다.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학근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너 살려줄게.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나는 것 아니잖아. 내 친구니까 내가 도와줄게”라고 말했다.

3월 말 1차 검사를 받았다. 5개 검사 중에 이미 2개가 적합하다고 판정이 내려졌다. 4월 초에 받은 2차 검진에서도 결과가 좋다고 흡족해했다.

“아내에게 말을 꺼낸 건 처음 검사를 받으러 가던 날이었어요. 식구들은 안중에도 없냐고 난리를 치더라고요. 미안하지만 뜻을 굽힐 수는 없었어요. 친구를 어떻게든 살려야겠다는 마음뿐이었죠.”

결국 아내도 이런 그의 심정을 이해해줬다. 처음에 병원에서는 장기 밀매 거래가 아닌가 의심하는 눈치였다. 그래서 어렵게 친구라는 증명을 한 후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청량리에서 독거노인이나 불우한 이웃을 돕는 단체 ‘사랑마을’의 회원인 상환씨는 나중에 학근씨가 쾌차하면 같이 봉사하러 다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우정의 힘으로 조속하게 회복하길 기원한다.

글 / 강승훈(객원기자)  사진 / 박남식

화제의 추천 정보

    Ladies' Exclusive

    Ladies' Exclusive
    TOP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