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부재는 위기다. 대기업의 기업주 부재는 혼란이다. 이 폭풍 속을 어렵게, 그러나 당당하게 돌파한 사람이 있다. 현대그룹 고 정몽헌 회장의 맏딸 지이씨. 사건이 불거졌을 때,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그녀.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동선을 좇은 것일 뿐, 그녀의 마음을 헤아리지는 못했다. 잠행 또 잠행… 그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어둠에 터널을 넘어 밝은 광명에 서다

사설이 길었다. 그러나 현대그룹 고 정몽헌 회장의 딸 지이씨(26)에게는 그보다 더없이 긴 시간이었을 게다. 아버지가 그렇게 떠나버린 빈 자리에, 그 아픔을 뒤로하고 어쩔 수 없이 기업을 떠안아야 했던 어머니를 지켜보는 마음도 편치 않았을 것이다. 익히 알고 있듯, 그간 현대그룹에 너무나 많은 일들이 있었으니…. 지이씨의 어머니인 현정은 회장 역시 그 고통 어린 시간을 통해 진정한 기업가로 리미트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 모든 것이 고통이었고 낯설음이었고 또한 희망이었다.
지이씨 역시 그녀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걸었던 현대인의 길을 걷고 있다. 그런 그녀가 고 정몽헌 회장을 추모하는 인터넷 카페(cafe.daum.net/monghun)에 자신의 최근 심정을 고백해 화제다.
잘사는 사람의 넋두리쯤으로 폄하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오히려 문장 한줄 한줄에, 단어 한자 한자에 우리 주변의 맏딸이 그의 아비에게 느끼는 사랑이 묻어 있다. 안타까운 만큼 따뜻한 그녀의 공개된 고백을 전제한다.
안녕하세요, 정추모 회원님들!
고 정몽헌 회장 촛불추모제와 창우리 참배 행사에 동행했던 정지이입니다. 정추모 카페에 가끔 들어가긴 하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오랜만에 글을 올리는 것을 널리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정추모 회원 여러분,
아버지는 저에게 가장 커다란 힘이 되어준 분이었습니다. 굳이 많은 충고나 지침을 주시지는 않았지만 항상 행동으로써 저에게 인생의 모델이 되어준 분이셨구요. 항상 그렇게 묵묵하고 듬직하게 저를 챙겨주실 줄 알았던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가버리시고는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너무나 강하시던 분이 이렇게 우리 가족을 포기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고, 항상 삶의 긍정적인 측면을 찾고자 했던 분이 평소에 자신이 부정적으로 여기던 방식으로 세상을 버렸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 와중에 현대는 경영권 분쟁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저희 어머니를 비롯한 현대 임직원 모두 가장 어려운 시기를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분들이 현대를 지켜내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좌절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현대를 이루어냈고 이끌어가고 있는 수많은 분들이 안타까워하는 모습 속에서 현대가 이미 개인이 아닌 모든 분들의 기업임을 느낄 수 있었으며, 그분들의 수고로 이렇게 현대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할아버지(정주영 명예회장)와 아버지(정몽헌 회장)의 혼이 서려 있고 이토록 많은 분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현대그룹에 강한 자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정추모(정몽헌 추모 모임의 줄인 말)와 같이 현대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분들의 끊임없는 지지와 성원은 현대그룹을 지켜준 또다른 힘이었습니다. 자신과 아무 상관 없는 가족과 기업의 일인데도 자발적으로 나서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으며,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는 새로운 힘이 바로 정추모와 같은 순수 열정을 지닌 네티즌들에게서 나온다는 것도 느꼈습니다.
특히 정추모 회원 여러분은 저희 가족에게 든든한 힘이 되었습니다. 항상 아버지를 기억해주시고 아버지의 뜻을 이어가고자 노력하시는 모습을 보면 저와 뜻을 같이 하는 친구를 얻은 듯 든든해집니다. 뿐만 아니라 추운 겨울에도 서명 운동을 받느라 수고하시고, 경영권 분쟁에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주셔서 저뿐만 아니라 저의 어머니와 온 가족이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분들의 힘으로 지켜낸 현대인 만큼, 저와 저희 가족 그리고 현대 임직원은 현대가 국민 여러분의 것임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이제부터가 더욱 중요한 시기임을 느끼고 있으며, 앞으로 현대는 여러분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요즘 카페가 예전만큼 활성화되지는 못하는 것 같지만, 따뜻한 여러분의 마음이 느껴지는 카페라 기분이 좋습니다. 여러분의 그러한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이 저에게는 늘 고맙게 느껴지고, 그러한 마음 영원히 간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항상 지니고 있었지만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서 망설였는데, 이렇게 늦게나마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어머니와 상의해서 조만간 운영진들과 만남의 자리를 마련하도록 하겠습니다. 요즘 날씨도 너무너무 좋은데… 매일매일 행복하세요~. 그럼 그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정지이 올림

아이디 yuna님은 “일본에 사는 교포입니다. 우연히 이 카페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이방 저방 기웃거리다 보니 정 회장님이 어떤 분인지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일본인은 철저한 개인주의라, 이런 따뜻한 카페를 보고 있으니 가슴이 뭉클합니다. 애국심이라는 것도 무엇인지… 잊어버렸던 것들이 많이 생각나게 하네요”라고 올려 해외에서의 응원가도 볼 수 있었다. 아이디 꿈먹는이는 “역시나 훌륭한 집안입니다. 저는 현대그룹을 잘 알지 못하였습니다만, 지이님께서 쓰신 글을 보면 정확한 어법과 국어 구사 능력이 요즘 사람 같지 않다는…”라고 올려 읽고 있으면 절로 미소가 흐르는 덕담도 적지 않았다. 지이씨는 남겨진 꼬리말에 “다들 오랜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따뜻한 말씀 너무 감사해요~여러분들도 모두 행복하시길”라는 말로 감사함을 전했다
글 / 강석봉 기자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