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필 24년 만에 첫 산문집 발표한 ‘무진기행’의 작가 김승옥

절필 24년 만에 첫 산문집 발표한 ‘무진기행’의 작가 김승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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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단의 ‘살아 있는 역사’로 독자 곁에 다시 돌아오다!”

‘무진기행’ ‘서울, 1964년 겨울’ 등 한국 문학사에 빛나는 역사를 일군 작가 김승옥이 오랜 절필과 투병기를 거쳐 독자 곁으로 돌아왔다. 24년 만에 첫 산문집 「내가 만난 하나님」을 발표한 그를 만나 문학 활동을 재개하는 소회를 들어봤다.

감수성의 혁명 일으키며 단명한 귀재

비틀스가 위대한 건 유통기한이 따로 없는 그 신선도 때문이다. 60년대 산(産) 비틀스는 90년에도, 2000년에도 여전히 싱싱하다. 한국 문학사에서 ‘감수성의 혁명’으로 평가받는 작가 김승옥(64). ‘무진기행’ ‘서울, 1964년 겨울’ ‘건’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환상수첩’ 등 대부분 60년대에 쓰인 그의 작품들에는 비틀스 못지않은 섬세한 감각이 시대를 뛰어넘은 채 살아 숨쉰다. 신선하고 매혹적인 그의 작품들은 그 시절의 감성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감각적인 문체 속에 철저히 ‘개인’에 집중하고 있다. 90년대 한국 사회의 가장 큰 생산품은 반도체나 LCD가 아닌 ‘개인’이라고들 하지만, 김승옥은 이미 60년대 당시 자신의 소설 속에서 ‘개인의 발견’을 구현하고 있다. 그를 두고 ‘한국 문학의 살아 있는 역사’라 일컫는 것은 결코 과한 말이 아니다.

그런 그가 독자 곁으로 돌아왔다. 1980년 동아일보에 ‘먼지의 방’을 연재하다 중단한 이후 무려 24년 만이다. 당시 그는 광주항쟁을 겪으며 느낀 좌절감으로 힘들어하다가 신군부의 검열에 항의하며 절필을 선언했다. 24년이란 시간은 김승옥 소설에 매료돼 그를 잊지 못했던 수많은 ‘팬’들에게 너무나 오랜 기다림이었고, 그런 만큼 지금 독자들이 느끼는 반가움도 크다. 더구나 지난해 2월 말 뇌졸중으로 쓰러져 힘든 투병기를 거친 후 얻은 성과여서 더욱 감동적이다.

서울 북아현동 ‘작가 출판사’에서 만난 김승옥 선생은 꾸준한 운동과 통원 치료로 건강을 많이 되찾은 모습이었다. 겉모습으로는 전혀 환자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안색도 좋고 걸음걸이나 몸짓도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손상된 언어 능력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언어 소통은 쉽지 않았다. 미리 가지고 간 노트를 이용해 필담을 섞어가며 대화를 나눴다. 글자를 쓰는 것 역시 아직은 적잖이 힘들어 보였다. 처음에는 말씀을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어느 정도 친숙하게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건강은 좀 어떠시냐”고 물었더니 선생은 노트 위에 ‘월, 화, 수, 목, 금’을 한자로 적은 뒤 월요일에 동그라미를 치며 “병원에 간다”고 설명했다. 요즘은 일주일에 한 번씩 통원 치료를 받으며 집과 출판사를 오가는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번에 세상 빛을 보게 된 「내가 만난 하나님」은 그가 처음으로 낸 산문집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책 속에는 기독교에 귀의하게 된 그의 신앙 간증이 여러 페이지에 걸쳐 쓰여 있다. 작가 출판사의 손정순 사장은 “제목이 너무 종교적 색채를 띠면 판매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선생님의 단호한 의지에 따라 그렇게 제목을 정했다”고 말했다. 책 속에서 그는 1981년 하나님의 손이 자신의 명치끝을 어루만졌던 최초의 체험을 비롯해서 하나님의 모습과 음성을 직접 보고 들은 기적적인 체험들을 털어놓고 있다.

책의 전반부가 신앙 간증에 할애됐다면, 책의 후반은 ‘하나님을 만나기 전’이라는 부제를 달고 그의 성장 과정과 대학 시절 「산문시대」 동인으로 활동하며 활발히 소설을 쓰던 이야기들이 흥미롭게 술회돼 있다. 여기에는 어린 시절 ‘거짓부렁’에 가깝던 최초의 창작, 특유의 감수성의 모태가 된 가족사, 젊은 시절의 방황기 등이 담겨 있다. 특히 마지막 4부는 김현, 최하림, 김치수, 서정인, 염무웅 등 쟁쟁한 문필가를 배출한 60년대 초반 서울대 문리대생 중심의 「산문시대」 동인 이야기다.

「산문시대」는 62년 6월부터 64년 9월까지 5호를 내는 데 그쳤지만 4·19혁명으로 동질 의식을 갖게 된 청년들은 김동리, 조연현 등 이전 세대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새로운 세대의 문학을 탄생시켰다. 훗날 평론가로 대성한 김현은 이 동인지에 ‘잃어버린 처용’이라는 소설을 실었고, 시인 최하림도 소설 ‘여름시집’과 희곡 ‘성’을 발표했다.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중인 평론가 김치수는 이오네스코의 희곡 ‘대머리 여가수’를 초역해 소개했고, 염무웅이 독일의 시론·음악론·미술론에서 현대예술의 성립과정을 연구한 ‘현대성논고’를 연재하는 등 「산문시대」는 동인들의 높은 지적 수준을 엿볼 수 있는 일대 파격의 장이었다.

4부의 내용은 발병 후에 쓴 것은 아니고 73년 서울대 학보인 ‘대학신문’의 요청에 따라 작성된 글을 다듬어 실은 것이다. 여기에는 「산문시대」 외에도 문리대 학생 신문인 ‘새세대’에 얽힌 추억담과 그 시절 동고동락했던 문우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대학에 다니던 서울대 문리대 ‘거지’들의 행각과 청춘의 오만함이 가감 없이 펼쳐지면서 마치 한 편의 휴먼드라마처럼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처음부터 끝까지 책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병마로 인해 언어는 어눌해졌을지언정 여전히 녹슬지 않고 빛을 발하는 그의 ‘글 맛’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책 내용의 절반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그의 신앙 체험에 관해 묻자 김승옥 선생의 눈빛은 더욱 생기를 띠었다. 문학 천재로 꼽히며 우리 문학사에 ‘낭중지추’로 기록된 그는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무신론자였다. 불문학도이던 대학 시절엔 프랑스의 허무한 실존주의에 경도되기도 했다.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 중에는 그런 그의 ‘변화’를 두고 광신도 보듯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겪은 체험을 통해 또다른 삶을 살게 됐음을 용기 있게 고백한다. 자신의 체험을 소개할 때는 어눌한 손놀림으로 직접 그림까지 그려가며 설명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로 한국일보에 컷 만화를 게재했을 정도로 그림에도 일가견이 있다. 자신이 만난 하나님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온유함과 겸손’ ‘지긋한 눈빛’ ‘황홀’ 등의 단어를 적어 설명하기도 했다. 

작가로서 그가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갓 스물을 넘겼을 무렵부터다. 서울대학교 불문과 3학년에 재학중이던 1962년, ‘독자 투고하는 기분’으로 마감 직전 제출했던 작품 ‘생명연습’이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일찌감치 등단했다. 겨우 스물다섯이던 1965년, ‘서울, 1964년 겨울’로 제10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했고, 1976년에는 창작집 「서울의 달빛 0장」으로 제1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단명한 천재로서 화려한 경력을 남겼다.

미완 소설 완성하고 ‘글 빛’갚을 계획

김승옥을 이야기 할 때 ‘천재성’이라는 말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많은 문학 지망생들이 그의 작품을 베껴 쓰며 습작했고, 그의 작품  ‘무진기행’을 읽고서 기가 질려 아예 소설가의 꿈을 접은 사람도 적지 않다. 실제로 그의 문우인 시인 최하림씨는 지난달 있었던 출판기념회에서 “대학 시절 김승옥이 쓴 소설 ‘건’을 보는 순간 번쩍이는 감성에 너무 놀랐고, 처음으로 내가 글을 못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문장 공부를 다시 했다”며 “김승옥이 소설을 안 쓰는 것은 죄악”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문학평론가인 연세대 정과리 교수는 ‘에나멜 구두 콧등으로 저녁 햇살이 시시덕거리며 빠져나갔다’(등단작 ‘생명연습’)와 같은 문장을 예로 들면서 “그가 절필 이후 신앙에 몰두할 때 내게로 오지 않고 하나님에게 갔다는 사실을 질투했다”며 농담 섞인 진심을 털어놓기도 했다.

‘천재성’ 이외에도 작가 김승옥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몇 가지 더 있다. 그중에 하나는 ‘강직함’과 ‘의리’다. 유신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70년대, 김승옥 선생은 김지하 시인의 석방을 위해 누구보다 앞장섰다. 당시 ‘오적’이란 시로 정권의 표적이 된 김지하를 위해 매번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덩달아 정권의 감시를 받기도 했다. 그때의 일을 아직도 못 잊지 못하는 김지하 시인은 이번 산문집에 기꺼이 우정의 글을 선물했다. 김지하 시인은 “한국 문학에서 김승옥은 그야말로 반짝이는 별이었다. 감수성의 일대 혁신이었고 문장의 일대 파격이었다. 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꾼들도 그 앞에서는 설설 기었고 그럼에도 본인 스스로는 한없이 겸손하매 나에게 그는 하나의 기적처럼 보였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공인된 필력은 물론이고 그림이면 그림, 노래면 노래, 많은 재능을 한꺼번에 타고난 김승옥은 젊은 시절 영화계에 몸담기도 했다. 김동인의 ‘감자’를 직접 감독해 스위스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주목받았고, ‘영자의 전성시대’ ‘겨울여자’ 등의 시나리오도 썼다. 영화에 대한 미련은 컸으나 ‘바람 피울 것이 뻔해 보이는’ 영화판에 들어가는 것을 아내가 극구 반대해 그 뜻을 접었다고 한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 수록된 연보를 보며 필담을 섞어 진행했던 인터뷰를 마치고 선생과 점심을 함께 했다. 이런 저런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다가 요즘 즐겨 보는 드라마로까지 화제가 흘러갔다. “선생님은 드라마 같은 건 잘 안보시지요?” 했더니 웃옷 속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보인다. 수첩 속에는 드라마 ‘대장금’을 인터넷으로 다시 보는 방법이 선생의 필체로 적혀 있었다. ‘대장금’의 애청자였다는 것이다. “어떤 땐 인터넷 다시보기로 하루에 세 번까지 봤다”면서 혹시 탤런트 이영애를 인터뷰하면 자신이 팬이라는 사실을 전해달라고 농담 아닌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겨울잠과도 같았던 절필의 오랜 침묵과 투병 생활을 딛고 독자 곁으로 돌아온 작가 김승옥. 선생은 이번 산문집 출간을 계기로 그동안 미뤄왔던 ‘먼지의 방’을 완성할 작정이라고 밝혔다. 또 몇몇 출판사에 진 ‘글 빚’도 갚아야겠다고 한다. 그러나 “소설을 못 쓰면 어떠냐”며 “부디 부디 오래 살아서 또 만나자”는 김지하 시인의 따뜻한 헌사처럼 욕심 없는 마음으로 그를 환영하고 싶다. 우리문단의 ‘반짝이는 별’이자 ‘살아 있는 역사’로서 그는 이미 충분한 존재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김승옥 선생을 만나기 하루 전날 밤새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고백하건대 그는 말하자면 내 소녀 시절의 첫사랑과도 같은 존재다. 감수성으로 충만하던 여고 시절 ‘무진기행’을 처음 접한 뒤 다른 작품들을 차례로 탐독하며 그에게 매료됐고, 더이상 그의 작품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에 더없이 안타까웠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무렵에 감화받았던 소설들은 보통 나이를 먹고 머리가 좀 큰 뒤엔 시큰둥해지는 일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5년, 10년이 지난 뒤에도 같은 크기의 감동으로 다가오는 김승옥 선생의 작품과는 매번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 만나는 것이 직업이다 보니 난다 긴다 하는 명사들도 적잖이 만나왔지만, 이번 인터뷰만큼 긴장됐던 적도 없는 듯하다. 다행히 선생을 직접 만난 뒤에는 금세 긴장이 풀려 예의 친밀감을 회복했다. 훌륭한 문학가를 하나님께 빼앗긴 듯한 아쉬움을 지울 수 없었던 건 아무래도 내 부족한 신앙 탓으로 돌려야 할 것 같다. 겨울잠 같았던 투병 생활을 딛고 일어나 그만큼 건강을 되찾으신 것을 보면 역시 의지가 대단한 분이란 생각이다. 마음의 평화를 얻은 선생의 얼굴은 수십 년 더 젊은 나보다도 환해 보였다. 부디 어서 완쾌하시기를 진심 어린 마음으로 빌어본다.

프로필

       1941년               일본 오사카 출생

       1960년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불문과 입학

       196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생명연습’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

       1965년               ‘서울, 1964년 겨울’로 제10회 동인문학상 수상

       1967년               김동인의 ‘감자’를 각색, 감독하여 영화로 만듦.

       1970년               ‘오적’사건으로 김지하가 투옥되자 구명운동 전개

       1971년               월간지 「샘터」 편집주간

       1976년               창작집 「서울의 달빛 0장」 으로 제1회 이상문학상 수상

       1980년               장편 ‘먼지의 방’을 동아일보에 연재하다 절필 선언

       1999년               세종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2004년               세종대학교 퇴직

글 / 박연정 기자  사진 / 황정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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