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공무원이 탄생했다. 16대 1이라는 경쟁률을 뚫고 1년 계약직으로 서울시에서 발행하는 홍보물과 문서업무를 담당하게 될 미국인 레슬리 벤필드. 전문화된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무원이 되겠다는 그녀의 야심찬 포부.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서울시청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외국인을 채용해 화제가 되고 있다. 한국인 5명과 외국인 11명이 지원한 국제협력과에 미국인 레슬리 벤필드(34)가 당당히 합격했다. 시험은 주로 영문 서류, 간행물의 영어 표기, 그리고 외국의 공공기관에 보낼 문서를 작성하는 방법등을 묻는 실무와 면접으로 진행됐다. 다소 딱딱한 업무에 외국인이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의문이 생긴다. 아직은 어려움이 없단다.
만 34세. 왜 우리 나이로 대답하는지 물었더니 “한 살이라도 어려 보이고 싶어서요”라고 말한다. 생김새만 다를 뿐, 그녀는 이미 한국인으로 살고 있었다.
지난 3월 9일 첫 출근 일주일에 22시간 근무하는 계약직. 남보다 일하는 시간이 적어 보수는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자부심만은 남달르다. 물론 처음부터 자부심이 생겼던 것은 아니다. 직장을 구하다가 우연히 서울시에서 직원을 채용하는 공고를 보고 응시 했지만 영어강사 이외에는 특별한 경력이 없어서 합격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또 제출해야 될 서류가 많고 복잡해 서 중간에 포기할까 여러 번 마음이 흔들렸다.
“월급도 적어요. 일반 회사에 다니는 게 낫겠다 싶어 고민을 털어놓았더니 친구들이 난리예요. 지금이 어떤 시기인데 딴 생각하냐, 꾹 눌러 있으라, 신신당부하더라고요. 부서의 선배도 비록 보수는 적지만 이런 기회는 흔치 않은 일이니까 신중하게 생각하라고 했어요. 지금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배우고 있어요”
남미 출신인 그녀는 부모님을 따라 미국에서 자랐다. 미국 문화에 적응할 무렵 보이지 않는 민족, 문화간의 갈등을 알게 됐다. 그때부터 갈등이 빚어진 원인을 찾았고 고민하게 됐다. 그러면서 호기심도 생겼다.그녀의 아버지가 “뭐든 관심을 갖는 것은 좋은데 넌 너무 지나치다”고 말할 정도로 유난히 호기심이 많았던 그녀. “호기심을 억제하라”고 이야기 할 정도였다.
미국의 민족·문화적인 갈등이 다른 나라에서도 벌어지는지 궁금했다.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외국에서 경험을 쌓고 싶던 차에 교회에서 떠나는 단기 선교에 우연히 참여, 필리핀에 갔다. 무더위와 식중독으로 일주일을 고생한 후 일자리를 쉽게 구할 수 있는 아시아의 다른 나라로 가기로 결심했다.
“한국과 중국에 이력서를 1백 통 보냈어요. 중국에서는 연락이 없었고 한국에서는 어느 영어 학원에서 영어강사가 필요하다고 연락이 왔죠. 알고 지내는 한국인 친구들도 괜찮은 자리 같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어머니는 결사반대셨어요. 그렇지만 제 인생은 제가 개척하는 거잖아요. 1년만 살고 오겠다고 설득했더니 이해해주시더라구요. 그리고 1년 뒤 미국으로 돌아갔지만 너무 그리워서 다시 왔어요.”

그녀의 장래 희망은 동시 통역사. 전철이나 버스를 타고 이동할 때면 손에 반드시 신문이 들려 있다. 기사를 읽으면서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표시해둔다. 중요한 표현이나 외워야 할 문장이 나오면 밑줄도 긋는다. 그래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사전 찾기다. 모르는 건 반드시 확인하고 넘어가야 직성이 풀리는 그녀의 성격이 엿보인다. 귀찮을 법도 한데 전혀 그렇지 않은 눈치다. 한국에서 8년을 살다 보니 언어소통에는 무리가 없지만 여전히 한국말은 어렵다.
“무엇보다 작문이 가장 어려워요. 특히 논문이나 전문적인 글을 쓸 때는 쩔쩔매죠. 돈이 있었을 때는 과외 선생님을 구해 도움을 받았지만 지금은 여유가 없어서 친구들에게 ‘빌붙는’ 형편이죠. 애교도 부리고 맛있는 것 사준다며 부탁하는데, 아무 이유 없이 도움을 주는 친구도 많아 너무 행복하죠.”
친구들을 만나면 어느새 수다스러운 아가씨가 되는 그녀. 노래를 부르는 것을 좋아해 설날이나 추석 때 방송하는 외국인 가요제에 나가 세 번이나 입상했다. 99년에는 엄정화의 ‘페스티벌’을 불러 대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SBS-TV 시트콤 드라마 ‘LA 아리랑’을 비롯해, MBC-TV ‘생방송 퀴즈가 좋다’에도 출연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방송 일도 하고 싶단다. 에너지와 끼가 철철 넘치는 그녀. 그녀의 말대로 올해에는 그녀를 아껴주고 앞날의 비전이 같은 남자가 나타나길 바란다.
글/ 강승훈(객원기자) 사진/ 지호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