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때 드라마에서 본 ‘측천무후’가 너무 매력적이었어요.”
고난을 이겨내는 영웅들의 대하 서사(?) ‘무협소설’을 한 여고생이 써서 화제를 모으고 있다.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 ‘측천무후’와 당나라의 역사가 배경인 「월랑 바람의 전설」이 바로 그것. 그림 수업을 받기 위해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온 무협소녀를 만나봤다.
무협시대
폐관수련 중 무협비기 펴낸 당찬 사제
비바람 몰아치는 인적 드문 곳. 무언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 속에서 고독하게 걸어오는 슬픈 그림자. 손에는 비바람도 피해가는 붓 하나가 들려 있다. 붓이 그 사람인지, 그 사람이 붓인지 모르는 합일체의 기운. ‘무형지기’(無形之氣), 붓이 내뿜는 기운에는 형체도 중량도 없어 보인다. 일필휘지로 이 붓을 휘둘러 강호의 강자들을 제압했다는 무명의 강자가 나타났다.
온갖 필력의 강자들이 모여 있다는 무협소설의 강호. 누구의 입을 통해서인지 모르지만, 이제는 누구나 알고 있는 사제 신진혜(18). 그녀가 강호를 놀라게 하는 무협소설 「월랑 바람의 전설 1·2·3」(중명출판사)을 펴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녀가 누구나 한 번은 거쳐야 한다는 ‘마의 고3’에서 폐관 수련중인 사제라는 것.
마의 고3은 강호에 나가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꼭 도전하는 관문이다. 배우고 외워야만 하는 것이 너무나 많아, 그곳을 헤쳐나오려면 1갑자의 내공(60년을 수련한 내공)이 필요하다고 알려질 정도다. 이곳에 들어가면 다른 데는 한눈을 절대 못 팔 정도로 맘과 몸이 고생한다. 강호에 진출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래서 마의 고3에는 절대 다시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소녀는 대구 성서고등학교 문파에서 폐관 수련중인 사제 중 실력 면에서 전체 10걸에 들고 있다. 붓 하나로 무협소설도 쓰고, 강호에 나가고자 흙과 철사 그리고 도화지로 요술을 부리는 ‘미술’ 수련도 하고 있다. 그리고 외우고 익히기만 하면 최강자가 된다는 신비의 ‘교과서’와 ‘참고서’를 가지고 초롱불이 일렁거리는 새벽까지 수련을 한다. 그래서 많은 사제들이 그녀의 내공이 대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해한다. 다른 사제들은 교과서와 참고서만으로도 마의 고3을 성공적으로 빠져나오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 책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구상을 했어요. 책을 펴낼 생각은 하지 못했구요.(웃음) 당시에 TV에서 ‘측천무후’에 관한 40부작 드라마를 했어요. 그것을 보고 측천무후의 매력을 느꼈나봐요. 그후에 속편으로 ‘태평공주’를 했는데, 나중에 40개짜리 비디오 테이프를 모두 샀어요.”
신진혜 사제가 그토록 매력적으로 생각하는 강호의 최절정고수 ‘측천무후’는 중국의 유일한 여제다. 빼어난 미모로 열네 살에 당나라 제2대 태종의 후궁이 됐고, 태종이 죽자 고종의 후궁이 됐다. 그후 간계를 써서 황후를 쫓아내고 스스로 황후가 되어 황태자 충을 폐위시켰다. 그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 온갖 초절정 비기와 미인계를 써서 많은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강호인들 중에는 측천무후를 닮고 싶은 여걸로 뽑기도 한다.
신진혜 사제는 당나라의 역사와 인물을 재구성해 무협소설을 완성시켰다. 이 무협소설에 나오는 강호의 인물만도 50여 명이 넘을 정도로 방대(?)하다. 당나라의 전설 같은 소녀영웅 ‘문방연’, 수려한 외모와 빼어난 무예로 인정을 받았던 ‘유성현’, 측천무후의 맏아들로 곧은 성품을 자랑하는 ‘이홍’의 삼각관계가 큰 줄기를 이루고 있다. 그밖에도 빼어난 검무로 유명한 차가운 월화루의 기녀 ‘설소청’, 유성현과 함께 은우선사에게 무예를 전수받은 ‘조비각’, 훌륭한 문장력의 소유자 ‘상관 완아’ 등의 주요 인물이 긴장감을 더한다.
“인물이 많아서 나중에는 가계도를 책상 앞에 붙여놓고 썼어요.(웃음) 그리고 인물들 나이가 틀릴까봐 큰 도화지에 연도별로 사건을 일일이 적어놨구요. 고구려 원정을 쓸 때는 지도를 보고 진격 방향을 찾아냈어요. 역사와 허구가 함께 들어 있지만, 역사적인 사건은 사실대로 그렸어요.”
흔히 무협소설에는 황당한 비기와 무술이 들어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고난을 이겨내는 영웅과 영웅을 좋아하는 여자들의 로맨스도 하나의 공식처럼 되어 있다. 하지만 신 사제가 써놓은 무협소설은 실제 역사가 밑바탕이 되어 있고, 상식적인 무술만이 들어 있다. 검도 1단의 ‘검강’을 소유한 내공 덕분이다.
“물론 야하지 않아요.(웃음) 책에 나온 사건들이 거의 실화니까, 이것을 읽으면 나중에 국사 공부할 때 도움이 될 거예요. 이 책을 쓰기 위해 수많은 사료들을 참고했거든요. 그리고 허무맹랑한 무술은 뺐어요. 검도를 하면서 배웠던 것들을 책에 넣었죠. 무협지에 나오는 단어보다는 검도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사용했어요.”
2004년 서울
대학 입시 위해 매주 토요일 서울에 올라와
진혜양은 미국에서 공부했던 아버지 때문에 오하이오 주에서 출생했다. 태어날 때부터 심장이 약해 밖에서 뛰어놀지 못했다. 다섯 살 때 수술을 받은 후 몸은 좋아졌지만, 동적인 활동보다는 그림과 책 읽는 것을 즐기게 됐다.
“미술을 전공하고 싶어요. 노래방 가서 노래 부르는 것처럼 글쓰기는 제 취미예요. 그렇다고 제가 글을 잘 쓰는 건 아니에요. 이번에 나온 책도 처음에는 약간 지루한 면이 있어요. 다음에 또 책을 내게 되면 좀더 나아지겠죠.(웃음)”
다음에는 신라를 배경으로 ‘낭도’들의 우정에 관한 이야기를 책으로 펴내고 싶단다. 낭도는 화랑들을 보좌했던 사람들이다.
진혜양은 매주 토요일 서울에 올라온다. 미술 학원에서 수업을 받기 위해서다. 그림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리기 시작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고, 학원에 가서 배운 것도 아니다. 그냥 그림이 좋았다. 소설책에 들어간 삽화도 직접 그렸다고 자랑한다. 지금은 책 속의 주인공들을 조각하는 것이 취미다. 대학교수인 아버지도 딸이 원하는 것이기에 반대하지 않고 도와주고 있다. 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후에 디자인 사업을 하고 싶단다.
진혜양은 꿈 많은 소녀다. 새벽까지 이어지는 공부와 매주 서울을 오가는 일정이 피곤할 텐데, 꿈을 이루기 위해 견뎌내고 있다.
글 / 최영진 기자 사진 / 황정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