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만남, 순수한 동행 신경림 시인&오현스님

아름다운 만남, 순수한 동행 신경림 시인&오현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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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얘기를 하다 보니 새삼 얼굴이 뜨거워지는군요. 허허…”

승속을 초탈한 스님과 시인은 삼라만상 속에 있되 그 경계를 휘저으며 얘기를 나눈다. 세상 이치쯤은 능히 깨쳤을 두 어른은 그저 귀에 익은 단어로 알기 쉽게 세계관을 풀어간다. 조계종에 속한 출판사 ‘아름다운 인연’에서 내놓은 책 '신경림 시인과 오현스님과의 열흘간의 만남'은 이 두 분의 만남을 통해 불교가 일반인에게 좀더 쉽게 다가가기를 바라며 만들어졌단다. 하지만 그것을 추린 이번 기사는 좀더 세속적인 대화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행간에 흐르는 함의에는 여전히 깊은 울림 주는 ‘깨달음’이 있다.

시인이 스님을 찾는다. 오현스님이 계신 백담사는 절 입구에서 족히 7km는 걸어가야 닿는다. 시인은 스님을 보기 위해 찾아오는 내내 그 길을 꼬박 걸었다. 등산이나 해볼까하는 생각이었다지만, 풍광이 아름다워 그 피곤함을 감내했다고. 여행 전문가라고 해도 잘못된 표현이 아닌 시인은 여행 얘기로 입을 연다.

여행, 길에서 돌아본 인생의 뒷모습

시인 여행이란 좀 느릿느릿 다니면서 이 생각 저 생각도 하고, 풍경도 감상하고, 그러면서 새로운 것도 보고, 느끼고 해야 제맛이지요. 그런데 자동차를 타고 빨리만 이동하다 보니 그런 맛과 멋이 사라지는 것 같아 아쉬움이 없지 않습니다. 너무 빨리 달리기만 하면 금방 지쳐서 쓰러지기 쉽지요. 밭에 씨를 뿌리면 싹이 트고 열매를 맺기까지 시간이 필요합니다. 수염도 나지 않은 옥수수를 따면 먹을 것이 없습니다. 밥을 지으려면 뜸이 들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성급하게 솥뚜껑을 열면 밥이 설게 됩니다. 여행도 그런 것이지요. 기다리는 것을 배우고, 천천히 가는 미덕을 가르쳐주는 것이 여행입니다. 스님들이 걸어가는 출가의 길은 그 자체가 하나의 여행으로 보입니다. 여행이란 일상적인 안일에서 떠나는 것인데 스님들이야말로 집을 떠나 긴 구도 여행을 하는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스님들의 출가는 그 자체가 하나의 드라마가 될 것 같은데, 스님은 어떤 여행을 하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그게 궁금합니다.

스님 저는 그 대목에서 종교의 역할과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사회의 제도가 인간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나 제도가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인간 속성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종교적 수양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오늘의 종교가 그런 역할을 하느냐 하는 문제가 남아 있지만, 어쨌든 인간의 본성 자체를 탐욕과 무명에서 자비와 지혜로 바꾸지 못하면 세상은 어둠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기적이고 외향적으로 치닫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성찰하는 명상을 할 것을 권합니다. 인간 존재의 근원을 살피다 보면 탐욕이나 이기주의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이제는 무엇이 잘 사는 것인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물론 문명이란 편리한 것이기는 합니다. 추우면 난방, 더우면 냉방, 조금만 멀어도 자동차를 타야 움직이는 것이 현대인의 생활 방법입니다. 그러나 더 잘 먹고 더 편하게 살기 위해 욕심을 자꾸 키우는 것이 과연 옳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현대는 속도를 중시하고 무엇이든 빨리빨리 하는 능률지상주의가 미덕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빨리 달려서 우리가 도달하는 데가 어디입니까. 결국 빨리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르게 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시인 제가 오늘 스님과 말씀을 나누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인과 스님은 걸어가는 길은 다르지만 추구하는 바는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시도 좀 느릿느릿 걸어야 써지는 것이지 육상선수처럼 달리면서 쓰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불교의 참선도 조용히 앉아서 하는 것이지 뛰면서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에 아주 동감합니다. 또 문학도 종교처럼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려고 한다는 점에서 비슷한 부분이 많다는 생각이 들어요.

또 한 가지 절감하게 되는 것은 모든 인생이란 어떻게 보면 긴 여행을 하는 나그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태어나서 ‘응애’ 소리를 지르는 순간이 여행의 시작이라면 목숨이 끝나는 그 순간이 여행의 종착역일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여행은 항상 우리에게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와 흥분을 안겨 주지만 한편으로는 생소한 것에 대한 불안과 불편함을 안겨줍니다. 또한 그 여행은 어떤 사람에게는 편안하고 즐거운 여정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괴롭고 쓸쓸한 시간이기도 하지요. 많은 사람이 이 여행을 즐겁고 편안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수만 가지 노력을 하지만 성공적인 여행을 한 사람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어요.

저도 가끔 죽고 나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보곤 하는데 죽음은 죽음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일부는 꽃이 될 것이고, 일부는 나무가 될 것 같아요. 그리고 물도 되고 바람도 될 것 같아요. 그렇게 되면 죽음이 마냥 두려운 것만은 아니고 즐거운 것이 될 수도 있겠지요.

시나 불교, 다 느릿느릿 깨우치는 구도

스님 너무 교리적으로 설명한 저보다 훨씬 쉽고 아름답게 윤회를 말씀해 주신 것 습니다. 인생을 여행이라고 볼 때 그 여행의 끝은 죽음일 것입니다. 죽음이 우리에게 찾아온다면, 그리하여 다시 긴 여행을 떠난다면 우리는 꽃이 되고 물이 되고, 또 봄이 되면 꾀꼬리 울음도 될 것입니다. 나중에 우리는 같은 물이 되어 흐르기도 하고, 같은 구름이 되어 날아다닐지도 모릅니다.

시인 다시 현실로 돌아가 말하면 우리는 여행을 하면서 인간이 얼마나 좁은 울타리에 갇혀 살고 있는가를 깨닫게 되는 것 같아요. 사실 우리가 지구라는 울타리에 갇혀 있으니깐 이렇게 지지고 볶으며 사는 것이지 우주라는 테두리에서 보면 얼마나 작고 초라합니까.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보면 인간이란 개미보다 작아서 흔적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 속에서 내가 크네, 네가 작네 하는 것은 '장자'에 나오는 비유대로 달팽이 뿔 위에서 서로 다투는 와각지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어리석은 집착을 깎아내고 버리는 데는 역시 여행이 제일이지요.

스님 그런 경우 불교에서는 뗏목의 비유를 들어 말합니다. 강을 건너면 뗏목을 버려야지 그것을 지고 갈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우리는 돈이면 최고인 줄 알고 돈 모으는 일에 목숨을 겁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그것에 예속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불교는 그 예속에서 벗어나야 깨달음이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그런 깨달음을 얻기 위해 참으로 먼 길을 오랜 시간 걸어온 셈입니다. 이제 그 길을 돌아보니 허망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고….

하여튼 우리가 오늘 이야기하면서 얻은 결론은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에 대해서 반성이 있어야 한다, 또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이라도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였다고 봅니다. 인생의 길을 걷다 보면 이렇게 뜻밖의 스승을 만나 깨우침도 받고 깨우침을 주기도 하고 그러나 봅니다.

스님 도를 깨닫기가 ‘세수하다가 코 만지기보다 쉽다’고 하더니 선생님이 그런 것 같습니다. 하룻밤 새에 도를 통하셨습니다. 결국 부처님이 그런 비유를 말씀하신 것도 우리가 너무 행복과 사랑에만 집착하는 것이 허망하다는 것을 깨우쳐주기 위해서일 겁니다. 우리는 언제까지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살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사랑을 하게 되면 반드시 미움도 생기고, 고통과 불행도 따라오게 마련이지요. 그래서 부처님은 '법구경'에서 이렇게 말씁하십니다.

‘사랑하는 사람도 갖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은 헤어져서 괴롭다. 미워하는 사람도 갖지 말라.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서 괴롭다.’



대승불교에서는 자비희사(慈悲喜捨)의 4가지 마음으로 사랑을 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항상 남에게 즐거움을 주는 자, 괴로움과 고통을 덜어주는 비, 즐거움을 함께 기뻐해주는 희, 분별심을 버리고 평등하게 대하는 사가 그것입니다. 이를 가르켜 사무량심(四無量心)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일상에서 이런 사랑을 실천해간다면 사랑으로 인해 행복해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대승불교의 이런 가르침을 보다 쉽게 설명하면 ‘받는 사랑’이 아니라 ‘주는 사랑’이 인간을 행복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사랑이란 받는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주는 것이란 생각에는 매우 인색했습니다. 자기는 남에게 사랑을 주지 않으면서 상대방이 조금만 덜 주어도 섭섭하게 생각해왔습니다. 받으려고만 하는 것은 이기이고 탐욕입니다. 탐욕은 아무리 채워도 부족합니다. 갈증이 가시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조건 없이 주는 미소요, 조건 없는 용서요, 조건 없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기보다 받으려고만 합니다. 여기서 목마름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이것을 갈애라고 합니다. 목마른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바닷물을 아무리 마셔도 오히려 목이 타듯이 받기만 하고 주지 않는 사랑은 갈증이 가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마치 사랑 결핍증에 걸린 환자처럼 주지 않고 받기만 바랍니다. 사랑이 우리를 괴롭게 만드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사랑, 그 행복과 고통의 이중주

시인 그러나 사랑을 주고 싶은데 받지 않으면 괴로워하는 것이 또한 인간 아닌가요. 이런 얘기를 하기는 좀 쑥스럽지만 저는 어려서 몇 차례 짝사랑을 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18, 19세 때인데 우리 동네에 사는 저보다 서너 살 아래의 소녀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얼굴이 곱상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내가 그 소녀를 얼마나 좋아했는가 하면 그 아이를 만나기 위해 학교 가는 것도 잊을 정도였습니다. 일종의 짝사랑이었는데 그때로서는 목숨이 왔다갔다했습니다. 내가 그 소녀에게 왜 그렇게 끌렸던가는 지금 생각해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소녀는 결국 나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 소녀가 다른 사람을 선택하고 나는 퇴짜를 맞았어요.

그 다음에는 다시 연상의 여자를 좋아했는데, 그건 더 말도 못 하는 짝사랑으로 끝났습니다. 어떤 처녀였는가 하면 우리 동네에서 지방 대학을 다니는 여대생이었는데 제가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저는 그 처녀에게 편지도 보내고 그랬는데 그녀는 나를 어린아이로만 취급했습니다. 내가 보낸 편지는 다시 돌려보내고, 내가 뭐라고 말을 걸면 “야, 까불지 마라. 너는 어린애야. 네 친구들하고나 놀아라” 이런 식으로 내치는 것이었습니다. 내 짝사랑은 이렇게 해서 무참하게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때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지요.

스님 저의 경우에는 이것도 굳이 실연이라고 한다면, 실연의 아픔이라고 해도 좋겠는데요.

그러니까 열다섯 살이었나. 밀양 땅 종남산 은선암에서 소머슴으로 밥이나 얻어먹고 빈들거릴 때 일입니다. 그 첩첩산중 암자에는 칠순의 노스님과 천치 같은 공양주 보살, 그리고 저보다 한 살 위인 얼굴이 가무잡잡한 공양주의 딸, 이렇게 네 식구가 살았습니다. 당시 저의 소임이 쇠죽 끓이고 디딜방아 찧고 땔나무도 하고, 노스님이 어쩌다 출타하시면 조석 예불을 올리는 일이었는데 예나 지금이나 천부적으로 게을러빠진 저는 그 소임을 제대로 다 하지 못했습니다.

일하다가 꾸벅꾸벅 조는가 하면 예불을 올릴 때도 지성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랬으니 노스님의 꾸중을 듣지 않는 날이 없었는데, 그 얼굴이 가무잡잡한 공양주의 딸이 타고난 저의 게으름을 사랑했음인지 힘든 일은 언제나 대신해주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쇠죽을 끓일 때도, 나무를 할 때도, 디딜방아를 찧을 때도, 예불을 모시거나 마지를 올릴 때도 그녀는 언제나 제 곁에 있었는데 그 가무잡잡한 얼굴에는 땀방울이 송알송알 맺혀 있었지요. 제가 하는 일이 힘들어 보이면 그냥 잠자코 보지 못하고 그녀가 다 했어요.

그런데 말씀입니다. 그해 초겨울, 진눈깨비가 올 듯 말듯 잔뜩 찌푸린 어느 해질 무렵에 무심코 노스님 방에 들어가니 노스님은 당사주 책을 펴놓고 그 앞에 오종종 앉아 있는 공양주 보살에게 “천생배필이다. 서둘러 혼사를 치르는 것이 좋아” 하는 것이 아닙니까. 공양주의 딸을 어느 신도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는 홀아비에게 시집보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이상스럽게 저의 등허리에 식은땀이 주르르 흐르는가 했더니 세상이 캄캄칠야로 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날 저는 누구에게도 하직 인사하지 못하고 코가 만발이나 빠져서 어깻죽지를 축 늘어뜨리고 흐느적흐느적 하산을 했는데, 제가 하산할 것을 지레 짐작했는지 그녀가 거기 산모퉁이를 돌아가는 길목에 있는 구불텅한 소나무 등걸에 얼굴을 대고 가느다란 어깨를 들먹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의 눈에도 까닭 모를 눈물이 핑그르르 돌아 무슨 말을 하면 울고 말 것 같아 그동안 고마웠다는, 사랑했다는 말 한마디 못하고 만맥이 다 빠져 내려오고 말았지요.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저의 첫사랑이라는 것이 무슨 신기루 같은 것이었다고 할까요.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그날 그녀가 저를 따라왔더라면 저는 지금쯤 동해안 주문진 앞바다, 그 망망대해 어부가 되었거나 아니면 깊은 산속 초부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새삼 얼굴이 뜨거워지는군요. 허허….

시인과 스님이 말하는 행복의 조건

시인 스님은 사랑을 신기루라고 표현하시는데 문제는 왜 우리에게 신기루가 나타나느냐입니다. 그것은 아마 ‘관심’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 인생이 사랑으로 인해 불행해지지 않고 행복해질 수 있을까. 저도 나이가 들다 보니 가끔 주례를 부탁받는데 젊은 부부에게 ‘행복한 사랑’을 말하기에는 아직도 지혜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혹시 스님이 알고 계신 방법이 있으면 좀 가르쳐주시지요.

스님 저라고 뭐 특별한 방법이 있겠습니까. 다만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으로 말한다면 사랑은 ‘서로에게 잘 해주기’라고 할까 아니면 ‘비위 맞춰주기’라고 할까. 우리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생기면 그 사람에게 잘 해주기 위해 무척 애를 씁니다.

소설 같은 것을 읽어보면 남자는 여자를 위해 외투를 벗어주고, 여자는 남자를 위해 밤새도록 수를 놓습니다. 서로에게 잘 해주기 위해서입니다. 남녀 간의 사랑만이 아니라 모든 사랑과 인간관계가 다 그렇다고 봅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사랑이 있다면 서로에게 잘 해주려고 무진 애를 씁니다. 친구 사이에도 서로에게 마음의 상처를 남기지 않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면 말도 조심하고 행동도 조심해야 합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서로에게 아부하고 비위 맞추기에 다름아닙니다.

결국 모든 좋은 인간관계란 이렇게 서로 비위를 맞춰주는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로의 비위를 맞춰주되 세련되게 맞춰주는 것을 사회에서는 ‘교양’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잘 해주기를 하다 보면 세상에는 참 좋은 일이 많이 생깁니다. 남녀 간에는 사랑이 생기고 친구 간에는 우정이, 사제 간에는 믿음이 깊어집니다.

저는 이런 특별한 감정이 좀더 범위를 넓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내 가족이나 몇몇 사람에게만 국한할 것이 아니라 보다 많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잘 해주고 비위 맞추기를 한다면 세상은 그만큼 달라질 것으로 봅니다.

시인 참 좋은 법문을 들은 것 같습니다. 성개방 풍조가 지나쳐서 문제가 되는 사회에서 종교의 가르침은 여러 모로 유용한 것이라고 봅니다. 특히 어린 여자를 누이동생으로 보라는 말은 ‘영계’만 찾는 짐승 같은 사람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가르침이군요. 여기에 덧붙여 저는 남녀 간의 사랑은 사랑하는 상대에 대해서 최대한 성실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제 생각입니다만 최소한 사랑하는 동안에는 상대방을 속이고 거짓말을 하거나, 인간으로서 못할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혼외정사나 기혼남녀의 연애, 스와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상대에 대한 성실의 의무를 저버리는 행위입니다. 사랑하는 동안에는 상대방에게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동안에 최선을 다하라니까 어떤 바람둥이는 카사노바가 그런 사랑을 했다며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려고 합니다. 카사노바는 수많은 여인을 사랑했는데 매 순간 그 사람에게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헌신했다는 것입니다. 즉 바람둥이는 매 순간 진실한 사랑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정상적인 정신 상태를 가진 사람으로서 가능한 것인지는 다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적어도 인간의 감정으로 누군가를 진실로 사랑한다면 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위선이고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누구를 사랑한다면 그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 최선을 다해야 하는데 매번 사람을 바꾸어서 그렇게 한다는 것은 결국 아무도 진실하게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 되고 맙니다.

사랑의 감정을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며, 자기 편리대로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사랑은 어디까지나 상대가 있는 것입니다.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사랑은 차라리 폭력입니다.

스님 부처님 생존 당시 파세나디라는 왕이 있었는데 어느 날 왕비인 말리 부인과 산보를 하다가 ‘당신은 이 세상에서 누구를 가장 사랑하느냐?’고 물었답니다. 왕은 당연히 ‘당신을 가장 사랑한다’는 답이 나올 줄 알았지요. 그러나 왕비는 ‘나 자신을 가장 사랑한다’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왕은 처음에는 불쾌하고 섭섭했으나 곰곰이 생각하니 왕비의 솔직한 대답이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자기도 가장 사랑하는 것은 아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누구나 자기 자신을 남보다 사랑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정말로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인가 하는 것인데, 그것은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으려면 다른 이를 미워하지 말아야 해요. 모든 책임을 타인에게 돌리면 미움의 감정이 생겨 자신을 괴롭히게 되지요. 그러나 자신에게 돌리면 스스로 용서를 하고 맙니다. 그래서 정말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남을 원망하지 않고 끝까지 용서하고 사랑하려고 합니다. 남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은 결국 나를 편하게 하거든요. 이것이 바로 부처님이 가르친 ‘원망을 낳지 않는 사랑법’입니다.

스님과 시인의 대화는 여행을 시작으로 사랑을 타고 넘어 환경과 욕망, 통일, 전쟁, 문학으로까지 이어졌다. 그 심오한 대화는 할아버지의 동화구연과도 같은 편안한 어감으로 계속되었다. 적어도 우리 앞을 몇십 년 먼저 걸어온 두 어른의 대화처럼 우리도 우리 삶의 진정한 의미를 곱씹어볼 일이다.

정리 / 강석봉 기자  사진 제공 / 아름다운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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