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당하고 냉철하며 때론 차가운 카리스마가 돋보이는 이수영 대표(39). 그녀는 ‘전투적으로’ 사는 여성 CEO의 단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몇 달 전 잊고 싶었던 과거의 일들이 언론에 드러나면서 홍역을 치렀다.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신념을 잃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온 그녀다. 묵묵히 의지가 돼준 정범진 검사(37)가 곁에 있었기에 지혜롭게 넘길 수 있었다. 예정된 날짜에 결혼식을 올리는 순간 수많은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참고 기다리면 행복한 날이 올 거라는 믿음을 잃지 않았기에 오늘을 맞이할 수 있었다.
신혼여행지에서 막 귀국한 그녀의 모습은 앳된 소녀 같았다. 쏟아지는 질문에 미소만 지을 뿐 쑥스러워 말을 잇지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산다는 건 어쩌면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한 일임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스무 명 정도 모여 치른 조촐한 가족 행사였어요. 두 가족이 만나 하나의 울타리를 만드는 일이기 때문에, 정범진 검사의 주변을 누구보다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양측 가족이 함께 하는 신혼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하와이 해변을 거닐며 아름다운 일들만 생기게 해달라고 기도했죠.”
올 3월경, 양가 상견례를 했기 때문에 혼자서는 한 걸음도 뗄 수 없는 정 검사의 상황을 가족들도 안다. 가족이면 누구나 그에게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결정한 ‘가족 신혼여행’이다.
결혼식 장소를 하와이로 선택한 것도 단순히 허니문으로 유명한 곳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뉴욕에서 9시간, 한국에서 8시간 걸리는 중간 지점이 하와이였다. 게다가 정범진 검사가 몸이 불편하기 때문에 편안하고 안락한 시설이 구비된 곳을 찾아야 했다.
결혼식이 끝나면 단둘이 떠나는 신혼여행지. 하지만 이들에겐 단둘이라는 평범한 일도 선뜻 결정하기 힘들다.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위해 가족들은 층이 다른 방에서 묵었지만 조금이라도 불편한 기색이 보이면 시부모를 먼저 찾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녀가 교통사고 이후 10년이 넘도록 정 검사의 손발이 돼준 부모님처럼 하기엔 아직은 역부족이다.
얼마 전 ‘슈퍼맨’으로 유명한 크리스토퍼 리브가 욕창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사건을 보며 시부모에게 또 한번 감사의 마음을 가졌다. 단 한 번도 욕창 때문에 고생한 적 없는 정 검사를 바라보며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가족의 사랑을 절감했다.
“정 검사는 사고 이후 병석에 누워 지내면서 단 한 번도 욕창에 걸린 적이 없습니다. 돈이 많아 필요한 만큼 사람을 부릴 수 있는 크리스토퍼 리브도 걸리는 욕창이 정 검사에 대한 부모님의 지극한 사랑에는 비켜갈 수밖에 없었던 거죠.”

호텔에서 보내는 열흘 동안 가슴 아픈 일도 있었다. 전망 좋은 방으로 예약한 것까진 좋았는데 결정적으로 그곳엔 장애인을 위한 시설이 마련되지 않았던 것이다. 장애 시설이 완벽하게 구비돼 있다는 말과 달라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호텔측에 사실을 확인한 결과, 대부분 장애 시설은 전망 좋은 방과는 동떨어진 곳에 있다고 했다.
그동안 장애인이 머문 경우가 없었다는 답변에 더욱 화가 났다. 장애인이라면 대부분 금전적으로 넉넉하지 않을 거라는 편견을 깨주고 싶었다. 항의를 했다. 그래서 결국 방 하나를 추가로 받았다. 잊지 못할 날이었다. 세상과의 싸움은 어쩌면 지금부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밤 정 검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삶을 포기하지 않았으므로 이제 두 사람에겐 행복할 자격이 있다고 입을 모았다. 정 검사의 사고와 그녀의 아픈 과거는 지금의 행복을 꾸리기 위해 하늘이 준 선물이라고.
“정 검사가 우린 앞으로 잘할 수 있을 거라고 했어요. 물론 2세도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제 나이와 상황 때문에 걱정하는 분들이 많은 걸로 알고 있어요. 그래도 포기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입양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부부는 지금 인간 배아 줄기세포 연구의 권위자인 황우석 교수를 만나 상의를 하고 있다. 황 교수는 연구에 대한 응용으로 사고로 인한 척추 마비에 우선을 두고 싶다고 했다. 국내 박사가 개발했다는 것이 이처럼 기쁘게 다가온 적도 처음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이에게 또 하나의 기회를 제공할지도 모른다.
아직 신혼집을 구하진 못했다. 하루에 수십 번 전화를 통해 여느 부부처럼 많은 대화를 나누지만 당분간은 뉴욕과 서울을 오가며 지내야 한다. 11월중에 오픈할 예정인 엔터테인먼트 포털 사이트의 막바지 작업에 몰두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향한 속내를 살짝 내비치기도 했다.
“같이 살았다면 이런 즐거운 자리를 함께 나눌 수 있을 텐데, 그렇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고 원망스럽죠. 하지만 아이에게 좋은 아빠가 생겼잖아요. 세월이 흐르면 상황이 나아질 거라 믿습니다.”
글 / 강수정 기자 사진 / 이건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