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 모하비 사막에서 10년째 절을 짓고 있는 무량스님. 종교적인 색채를 논외로 하더라도
물 한 방울 없고 전깃줄 하나 없는 사막에서 10년째 절을 짓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왜?”라는 질문이 불쑥 튀어나왔다.

열세살 때 겪은 어머니의 자살
무량스님(45)에게 그날의 기억은 ‘충격’으로 남아 있다. 주위 사람들은 어머니의 자살을 정신이상으로 인한 우발적인 사고로 생각하지만 그는 달랐다. 예술적 감수성이 뛰어나고 항상 고민이 많던 어머니는 변호사인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무척 힘들어했던 것 같다.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는 결정적인 사건은 없지만 분위기가 그랬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아버지와 사이가 나빠진 그는 심리 치료를 받기도 했다.
그가 보다 넓은 세계로 나간 계기는 고교 시절 기숙사 생활이다. 학창 시절 그는 성실한 학생이었다. 문학, 철학, 스포츠에 골고루 관심과 열정을 가졌으며, 캠핑과 산에서 지내는 생활에 큰 매력을 느꼈다.
“죽음에 대해 얼마만큼 진지하게 생각하고 살까요? 인간에게 가족의 죽음은 큰 충격으로 다가오죠. 세상에 남겨진 자녀는 어리면 어릴수록 참을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을 받습니다. 어머니가 자살한 이후 제게 많은 변화가 생겼어요. 충격으로 인해 혼자서 고민하고 생각하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고 할까요.”
그가 불교 윤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한 건 이 시기로 기억한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예일대학에 입학했다. 의욕적으로 시작한 대학 생활이지만 곧 모든 것에 싫증을 느끼며 혼란에 빠져들었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무의미해졌다. ‘왜?’라는 질문은 끊임없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생각이 많다는 것이 충격으로 다가왔어요. 도대체 이 많은 생각들이 어디서 오는 걸까. 지금까지 받았던 비싼 교육은 대체 내게 무슨 도움을 준 것일까. 침대 정리를 하고 먹을 것을 만드는 사소한 일 하나에도 보탬이 못 되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자 허무주의에 빠지고 말았어요.”
술에 취해 며칠을 방황하던 어느 날 더이상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강한 의욕이 생겼다. 의지가 약해질 때마다 불쑥 튀어나와 삶을 뒤흔드는 질문의 답을 찾아 떠나야겠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자신이 절 생활에 맞는 사람임을 깨달은 건 우연히 거리에 붙은 포스터를 보고 참가한 법회에서다. 장소는 뉴헤븐 젠 센터다. 법문 중에 “인간은 아무런 의미도, 이유도, 선택도 없다. 그러나 나는, 나의, 나를, 이것들을 버리면 엄청난 의미와 이유와 선택을 만날 수 있다.”는 진리를 들었다. 방법이 궁금했다.
“그날 법회 내용은 지금도 정확히 기억합니다. 살아가는 방법이며 진리고 대답이었으니까요. 생각을 끊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무엇이든 할 때 오직 그것만 하십시오. 쉴 때 쉴 뿐, 일할 때 일할 뿐, 먹을 때 먹을 뿐, ‘오직 할 뿐’이라는 마음가짐으로 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한국말이 서툰 건 아니다. 능수능란하게 잘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라며 천천히 명확한 발음으로 법문을 읊조리듯 말을 이었다.
그는 짐을 싸서 아예 뉴헤븐 젠 센터로 이사했다. 뉴헤븐 젠 센터는 예일대와 가까워 학교 다니기에도 좋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학교를 졸업한 후에 원하는 공부에 집중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젠 센터에 살면서 모든 잡념을 놓고 학업에 열중한 결과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조기 졸업할 수 있었다. 졸업식을 기다리는 동안 프라비던스 젠 센터에서 석 달 동안 진행하는 수행에 참여했다. 수행에 들어가기 며칠 전, 비장한 마음으로 삭발을 했다. 한결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2년에 한번 씩 수십 명의 미국인 스님들이 한국을 방문한다. 각자 참가비를 내고 화계사, 불국사, 석굴암 등을 둘러보는 프로그램으로, 한 달 동안 절에서 절로 옮겨 다니는 일정이다. 1982년 그도 동참했다. 첫 한국행이었다.
“절에서 보내는 하루하루는 그야말로 아름다웠습니다. 매일 새벽 3시에 종소리와 목어를 치는 소리를 들으면서 일어나면 하루 종일 가슴에 그 소리의 여운이 남았습니다. 화계사에서 지내던 며칠간은 누군가 멀리서 새벽마다 목탁을 두드리며 혼자 기도하는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소리가 너무도 청아하고 인상적이어서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습니다.”

스님이 된 후 3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3천 배를 했다. 새벽 예불 때 108배, 아침 공양 전에 108배를 아홉 번, 점심 공양 전에 다시 열 번, 저녁 공양 전에 마지막으로 열 번을 했다. 무릎이 너무 아팠지만 의식은 갈수록 명료하고 단순해져갔다.
한국에서의 생활, 전국을 수행하다
“서양에서는 정신 세계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아서인지 정신 질환을 앓는 사람들을 품어줄 만한 곳이 거의 없습니다. 카운슬러의 상담을 받다가 힘들어지면 정신병원으로 보내져 가족과 사회에서 격리되는 식이죠. 반면 한국은 초자연적인 세계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 확연히 구분되는 점입니다. 삶에 대한 의심을 품었을 때 갈 곳이 있다는 것, 가서 기대고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전통이 있다는 것, 깊은 산속에서 일하고 참선하며 자기 안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부러운 문화입니다.”
무량은 한국을 다시 찾았다. 한국어를 배우며 선방에서 수행 생활을 시작했다. 1986년엔 ‘걷기 수행’으로 유명한 원공스님을 따라 전국을 수차례 걸으며 수행하기 시작했다. 원공스님의 말에 따르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날씨나 계절과 상관없이 계속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수행중의 기억이란 대체로 몸이 피곤하다는 것뿐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가는 길에 절에서 밥을 얻어먹고 계획한 만큼 걸은 뒤 자기 전에 다시 내일 갈 곳을 정하고 아침 일찍 떠나는 일정의 연속인 것이다. 이런 식으로 무량은 자신에게 맞는 수행 방식을 찾았다. 1986년 봄에는 충청도 일대를 혼자서 걸으며 수행했다.
이때 대둔산 깊은 골짜기에서 ‘태고사’를 방문했을 때 하루만 머물 계획이었지만 발목을 삐어 석 달간 머물렀다. 이곳에서 나무를 지게로 지고 옮기는 일, 흙을 져 나르는 일, 산속으로 들어가 나무 하는 일 등을 하며 노동의 귀중함을 몸소 실천했다. 같은 해 가을이 시작될 무렵에는 44일간 경기도와 강원도, 1987년 봄에는 석 달간 서해안과 남해안 일대를 걸었다. 시작도, 끝도 언제나 혼자였다.
“정선의 정암사에 도착했을 때의 일입니다. 춥고 배고프고 피곤해서 몰골이 말이 아니었죠. 저를 본 보살님은 얼른 점심을 차려준 뒤 온돌방을 내주셨어요. 나그네에게 이렇게 후한 인심을 베풀 수 있는 나라는 지구상에 딱 한 곳, 한국밖에 없을 겁니다. 그런 한국인들의 인심 덕분에 아무런 연고도 없이 전국을 44일씩이나 떠돌 수 있었습니다.”
걷기 수행을 하는 동안 자신이 자연과 땅에 대한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예일대에서 지질학을 전공했을 때보다 절실히 다가왔다. 풍수지리에 관한 정확한 지식이 궁금했다. 지난 6년간 쌓은 지식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풍수지리에 관한 정확한 지식을 위해 좀더 많은 지역을 찾아 걸어 다녔다. 파란 눈을 가진 외국이 스님을 신기한 듯 바라보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또 다른 의구심이 들었다.
“한국에서는 내가 외국인 스님이라는 이유로 구경거리가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제는 제가 직접 나서서 뭔가를 해야 할 때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더군요. 그러기 위해서는 할 일이 많고 사람이 부족한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수행중 습득한 풍수지리를 바탕으로 절을 지을 지역을 찾아다녔다. 풍수지리책과 지도를 공부하고 1년여 동안 땅을 보러 다녔다. 1993년 9월 17일, 자신의 생일날 드디어 지금의 태고사 터를 발견하고 ‘태고사’라고 이름 지었다. 영문으로는 ‘마운틴 스피리트 센터(Mountain Spirit Center)’다. 그는 어떤 건물부터 시작해서 어떤 건물로 끝내야 할지, 비용과 공사 기간은 어느 정도 잡을지 등의 계획도 없이 그저 ‘수행할 수 있는 한국식 절을 짓는다’는 목표 아래 절을 짓기 시작했다. 텐트를 치고 생활하다가 우물을 파고, 트레일러와 이동식 주택인 ‘모빌홈’을 구입하고 가재도구를 마련했다.

비용을 아끼기 위해 포클레인 등 중장비를 구입해 스스로 작동법을 익혔다. 태양열 발전과 바람개비를 이용한 풍력 발전을 시도하고 바깥과의 통신을 위해 전화와 인터넷도 설치했다. 사막의 우기에 일어나는 홍수를 대비해 다리와 댐도 만들었다. 청소 등의 문제 때문에 바닥을 타일로 마감하고 난방 시스템을 위해 온돌도 만들었다. 잘못된 것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서 천천히 꼼꼼하게 집을 지었다. 그에게 집을 짓는 건 ‘공부하는 과정’이었다.
2000년부터 태고사에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일요법회를 열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태고사 공사를 도와주었고 대웅전 건립 기금 모금 행사를 무사히 치러냈다.
9·11 테러 이후 그는 ‘평화의 종’이란 이름을 생각해냈다. ‘평화의 종’은 평화를 염원하는 그의 기도다. 종의 표면엔 ‘평화’에 해당하는 2백여 개국어가 수집돼 있다. 아래쪽엔 각 나라 아이들 50여 명이 민속의상을 입고 손을 잡고 둘러선 그림을 넣었다. 각 인종, 각 나라, 각 민족 아이들이 고루 도안에 포함돼 있다. 종각은 2005년 초에 정식으로 타종을 하게 된다.
“제가 절을 짓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이유는 참다운 자신과 삶의 깊은 의미를 탐구하면서 마음을 닦고자 하는 사람들이 국적과 민족을 초월해 함께 모여 수행에 전념할 수 있는 공동체의 터전을 만드는 것입니다. 우수한 한국 불교가 세계와 연결되는 계기가 태고사에서 만들어져 수행하는 마음, 열린 마음을 같이 나누는 공간을 이루어갔으면 좋겠습니다. 둘째 이유는 환경 친화적인 삶의 양식을 실험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태고사에서는 태양열과 풍력으로 발전하여 전기를 자급자족하고 모든 물자를 최대한 아끼며 쓰레기를 최소화하고 있습니다. 이곳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중에 멀리서 볼 때 이곳에 사람 사는 집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인간과 자연이 하나되어 쉴 수 있는 조경을 만들고 싶습니다.”
지금 그는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법을 배우고 있다. 태고사를 짓는 일은 뭔가를 뽐내기 위한 기념비를 짓는 과정이 아니라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함께 공부하고 수행할 수 있는 ‘과정’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모두 그가 실패할 것을 걱정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현명한 길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이다. 최선을 다하고 나면 과정 속에서 배울 점이 생기고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
길고 긴 인생 이야기가 끝나고 긴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먼 하늘을 보며 떠가는 구름을 향해 미소 짓는다. “내일이면 미국으로 돌아간다”며 “밤하늘에 총총히 새겨진 별로 두드려 맞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알고 싶어하는 진리를 몸소 실천하기 위해 지금도 사막 한가운데서 절을 지으며 수행하고 있다.
글 / 강수정 기자 사진 / 김석영 열림원(「왜 사는가 무량스님 수행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