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후 6개월 만에 미국 백인 가정에 입양돼 삼십 평생을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 속에 살아왔다는 정경아씨.

# 입양인 출신 작가로 성공적인 등단
여자 연예인들이 입양아의 위탁모로 봉사하며 2주간 아기를 돌보는 프로그램이 화제가 됐었다. 천진난만한 아기와 헌신적인 연예인 위탁모의 모습, 그들의 만남과 헤어짐이 보는 이의 가슴에 잔잔한 감동을 전해주는 프로그램이었다. 그 프로그램이 방송된 후 국내 입양 상담이 크게 늘었다는 소식도 반갑다. 국내 입양이 늘어나면 그만큼 해외로 입양되는 아이들의 수가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입양 문제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이 얼마만큼 진지하고 현실적인지에 대해서는 한번쯤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단지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기의 재롱을 더이상 보지 못하고 떠나보내야 한다는 상황에 가슴 아픈 것은 아닌지, 부모에게서 버림받은 아이에 대한 피상적 연민에 그쳤던 것은 아닌지, 이후에 펼쳐질 그 아이의 삶을 무조건적 낙관론으로 편리하게 한했던 것은 아닌지…. 정작 중요한 문제는 그 아이들이 극복하고 견뎌야 할 미래의 시련에 있다는 것, 특히 인종이 다른 가정에 입양된 아이의 경우 자신의 존재감과 정체성에 엄청난 혼란을 겪는 것, 겪어보지 않고는 그 엄청난 고통을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그런 문제들을 진지하게 고민했는가 스스로 물어볼 일이다. 또한 우리의 아이들을 데려가는 모든 외국인 양부모가 TV에 소개되는 몇몇 헌신적인 양부모들처럼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고 열린 맘으로 아이의 ‘뿌리’에 대해 관대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어쩌면 우리는 너무나 의심 없이 간과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이름은 정경아. 그녀의 주민등록등본은 1972년 음력 1월 24일을 그녀의 출생일로 밝히고 있다. 그녀는 한국인 아버지의 다섯째 딸이고, 그의 두번째 부인인 어머니의 셋째 딸이자 넷째 아이다. 그러나 세상을 반쯤 돌아오면 그녀는 또다른 누군가가 된다. 비행기를 타고 미국 땅을 밟았던 1972년 9월 26일, 그녀는 제인 마리 브로어로 다시 태어났다. 그녀가 도착한 미네소타 주 출생 증명서는 그녀의 출생일을 3월 8일로 적고 있다.
그곳에서 그녀는 프레데릭과 마가렛 브로어의 둘째 딸이다. 생후 6개월 만에 친언니와 함께 미국의 한 백인 가정으로 입양돼 ‘미국인’으로 교육받고 자란 그녀는 대학에서 음악과 영문학을 전공하고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다가 2003년, 그녀의 아주 특별한 회고록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작가로 데뷔했다. 그녀의 데뷔작 「피의 언어」(원제 The Language of Blood : A Memoir)는 개인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깊은 성찰이 담긴 작품으로, 독창적인 작법과 대담한 표현력을 인정받아 2004년 미네소타 북 어워드의 ‘자서전 및 회고록’ 부문에서 수상했다.
# 자신을 찾는 대신 잃은 것과 얻은 것
‘이 책의 결말은 예측 불가능하고 쉽지 않지만, 씁쓸하면서도 달콤하다.
그것은 아마도 유랑의 세월에서 얻어질 수 있는 유일한 것이리라.’ - LA 타임스.
‘광범위한 독자층을 확보할 만한 대담한 회고록이다’ - 반디 앤 노블즈
‘놀랄 만한 강렬함과 숨막히는 문장의 서정성. 독자들은 이 책을 내려놓을 수가 없을 것이다’- 아시안 위크
‘미국의 정체성 문학사에 강력히 오를 책이다’ - 미네소타 먼슬리

“작가가 될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못 해봤어요. 지금 제가 이렇게 한 사람의 작가로 불리고 있다는 건 제게도 아주 놀랄 만한 일이죠.(웃음) 96년에 처음 만난 한국 어머니가 5년 만에 돌아가신 뒤 슬픔과 상실감으로 나의 지나온 삶을 글로 끄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내 맘속에 응어리진 아픈 상처가 서서히 치유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죠. ‘나’라는 존재에 대해 어떤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했구요. 어느 순간부터는 도저히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 안에 담긴 ‘한’을 풀어내는 과정이었다고 할까요.”
‘한(恨)’. 영어로는 그 어떤 단어로도 환원할 수 없는 의미. 그녀는 ‘한’을 이해한다고 했다. 자신의 삶을 통해 그 의미를 체화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지난 1990년 한국 어머니와의 첫 통화, 1996년 한국 어머니와의 첫 만남의 순간에 느꼈던 그 특별한 감동을 잊을 수 없다. 그것은 그녀에게 난생처음 느껴보는 깊고 진한 혈육의 ‘정’이었다. 우리말을 못하는 그녀와 영어를 못하는 어머니는 수화기 너머로 의미를 알 수 없는 서로의 언어를 말했지만 그 목소리만으로도 가슴은 절절히 젖어왔다. 어머니가 자신이 아는 유일한 영어로 “아이 러브 유”라고 말했을 때 그녀는 비로소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 듯했다. 머리를 쓰다듬고 손을 만지며 자신을 바라보는 어머니에게서 부모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어떤 느낌인지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원망 같은 것은 처음부터 없었다. 참회하는 어머니의 지난 세월을 전해 들으며 그녀는 당시의 어머니에게 ‘입양’만이 유일한 선택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가난한 가정의 폭력적인 남편은 태어난 지 몇 개월 되지 않은 자신의 아기를 죽이려고까지 했고, 힘 없는 어머니는 그 위험으로부터 자신의 딸을 지켜내기 위해 결국 그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뿌리를 찾고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된 대가로 양부모로부터 외면당해야 했다. 양부모는 두 개의 가족이란 있을 수 없다며 그녀에게 선택을 강요했다. 그러나 그녀에게 가족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결국 그녀는 양부모로부터 가족에서 제명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 친어머니로부터 느낀 무조건적인 사랑의 힘
“제가 자란 곳은 미국 북부 미네소타의 보수적인 기독교 집안이에요. 어려서부터 저는 ‘올 아메리칸’(미국을 대표할 만한, 미국적 사고를 대변하는 인간)이자 ‘올 미네소탄’(미네소타를 대표할 만한 인간)이 되려고 엄청나게 노력했죠. 양부모님께는 이상적인 딸이 되고 싶었구요. 늘 예의 바르고 우수한 학창 시절을 보냈고, 뛰어난 피아니스트가 되는 꿈을 꾸었죠. 하지만 그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녀가 다섯 살 때, 한복을 학교에 가지고 갔다. 그녀와 그녀의 언니가 미국에 도착한 지 몇 개월 되지 않았을 즈음 한국 어머니가 우편으로 보내주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날 학교에서 아주 특별한 존재로 느껴졌고, 집에 돌아와서 미국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 왜 한국 어머니가 자신을 버렸는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미국 어머니는 그 즉시 일어서더니 방을 나가버렸다. 그녀의 어린 기억 속에 이 장면은 아주 인상 깊이 남아 있다. 왜냐하면 미국 가족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그녀에게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지 최초로 이해하기 시작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미국 가족에게서 받는 사랑은 조건적이라는 것, 그리고 한국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절대 꺼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 게다가 미국 어머니는 그녀가 언니와 우애있게 지내는 것을 원치 않았다. 언니와 그녀에게 각기 거짓말을 했으며 서로 나쁜 사람으로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한국 어머니를 만났을 때 느낀 무조건적인 사랑은 저에게 놀라운 힘을 발휘하게 해주었어요. 한국 가족들은 내가 이제껏 만나본 가장 사심 없고 사랑이 넘치는 사람들이죠. 남편도 저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정말로 그들은 훌륭한 사람들이에요. 생애 처음으로 이런 종류의 사랑을 가져본다는 것은 사막에서 시원한 물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한국 가족이 나를 치유했습니다.”
미국의 양부모는 그녀가 쓴 책이나 그녀가 받은 상들에 대해 전혀 알고 싶지 않다고 말했지만, 미국의 친척들은 책을 읽고 그녀의 지난 삶과 입양인의 고통을 이해하게 되었다며 격려해주었다고 한다. 그들은 양부모에게도 책을 읽어보라고 끊임없이 권유하고 있다. 비록 의사 소통은 되지 않지만 한국 가족들은 그녀에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응원을 보내고 있단다.
# 작가로 살아갈 제2의 삶
“책을 출간한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말할 기회가 생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대단한 책임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현명하게 이런 기회들을 사용하고 싶습니다. 미국 독자들은 지금까지 낳아준 어머니(birthmothers)라는 개념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나의 한국 어머니에 대해 읽는 것이 즐거웠다고 말합니다. 이 책이 사람들의 가슴속에 어떤 연민을 전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저는 무척 행복해요. 만일 한국인들도 내 어머니에게 연민의 정을 느낀다면, 그들이 이런 가슴 아픈 사연들이 다시는 생겨나지 않도록 노력하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을 가져봅니다.”
그녀는 요즘 김해 인제대학교 부속 국제인력지원연구소에서 주관하는 한국 입양아들을 위한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한국에 머물고 있다. 가을 학기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9월부터 12월 중순까지 체류할 예정이다.
그녀는 매사에 진지하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균형 감각을 가진 사람 같았다.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우리말 실력은 아직 갈 길이 먼 수준이지만 배우려는 열의만큼은 그 누구보다 커 보였다. 이제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남아 있는 한국 가족들과 우리말로 돌아가신 어머니를 추억하며 대화하는 것이 그녀의 간절한 소망이란다.
“올해 말 학기가 끝나면 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겠죠. 글을 쓰고, 피아노를 가르치고, 집안을 청소하는 일상으로… 미국에 있는 남편은 뉴욕에서 나고 자란 백인 남자예요. 작곡을 전공한 그가 박사학위를 따기 위해 미네소타에 왔을 때 만나서 결혼했죠. 지금은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고 저에게 전폭적인 이해와 지지를 보내주고 있어요. 한국에 와서 살고 싶지 않냐고 물으시는 분들도 있는데, 그럴 수 있는 입양인들은 아주 소수에 불과합니다. 저야 돌아오고 싶지만, 저 역시 한국에서는 문화적으로 이방인이고, 더구나 미국에 있는 남편의 일상도 존중해주어야 하니까요. 만일 우리가 이사한다면, 남편은 자신의 가족을 잃게 되고, 우리는 또 나와 함께 입양된 언니와 그 가족을 잃는 셈이 되죠. 어디에 가든지, 그저 우리 곁에 우리 가족의 일부만을 둘 수 있을 뿐이에요. 그것이 저와 같은 입양인들이 갖는 태생적 한계니까요. 저의 소임을 다할 수 있는 문화 속에서 작가로서 사회에 기여하며 살고 싶습니다.”
글 / 박연정 기자 사진 / 최병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