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을 일군 우리 음악계의 살아있는 신화…박범훈 중앙대 부총장

40년을 일군 우리 음악계의 살아있는 신화…박범훈 중앙대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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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의 여울은 한 사람을 집어삼켜 그로 하여금 세상의 울림이 되게 했다. 중앙대 부총장인 박범훈 교수의 소리 인생은 세상 사람들을 엮고 펼쳐 보이면서 우리의 소리를 더욱 공고히 하였으니. 이제 그 인연 40년을 넘어가는 마당에 울림과 박자처럼 들고 났던 사람들을 엮어 「소리연」(경향신문사)이란 자전적 전기를 펼쳐 보인다. 범상치 않은 음악인의 오늘과 그 범상치 않음을 채웠던 에피소드 속으로.

남사당과의 만남중학 밴드부 단원, 소리를 만나다

경기도 양평의 여울은 갈림을 이어 합수된 양수가 합쳐 큰 강을 이룬다. 그리고 그 물은 한강을 이어달려 바다로 향한다. 강은 강을 버려야 비로소 바다가 되는 것. 국악으로 일가를 이룬 중앙대 부총장 박범훈 교수 역시 그 세상 이치와 다를 바 없다.

그의 고향 강상면은 양평 시내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야 닿는 곳. 이 맘때면 물안개 자욱한 여명이 더없이 운치를 더하는 곳으로 맑은 한강 물이 그림같이 흘러든다. 당시에는 하얀 모래사장엔 반들반들 길이 든 검은 자갈들이 굴러다녔고, 땅콩밭이 푸른 띠를 두른 강가에는 긴 그늘을 드리운 미루나무와 단오 날 동네 처녀들을 끌어내 바람 나게 만든다는 늙은 느티나무가 동네를 지키고 선  동네였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니며 봄이면 버들피리 소리를 들었고, 가을이면 농악 소리를 들었다. 학교에서는 풍금 소리를 들었고, 느티나무 밑에서는 총각이 이웃집 처녀 꼬여내려고 불던 하모니카 소리도 들었다.

역시 그의 기억은 소리를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스스로도 “소리에 대한 신기를 타고난 모양”이라며 “어디서든 소리만 나면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그 소리를 찾아다녔다”고 말한다. 결국 중학교에 들어가선 밴드부에 들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중학교 밴드부의 트럼펫 연주자는 인연과 화학적 반응을 거쳐 국악계의 큰 인물로 거듭났다. 그 출발의 미약함에 연연하지 않고 그 끝의 창대함을 일궈낸 곳엔 천재성 못지않은 노력과 눈물이 숨어 있을 터. 그 소리 따라 100년 후의 한국 위인전을 미리 써본다.

어디나 그랬다. 먹거리 풍성한 계절, 벼 타작을 끝낸 논바닥엔 질펀한 무대가 마을을 도는 재주꾼들에 의해 펼쳐졌다. 간소하게 둘러쳐진 검은 천의 경계 안에서 남사당 패거리의 흥겨운 가락은 쥐불놀이처럼 가을밤을 활활 태웠다. 버나가 돌아가고, 사발을 휘돌리고, 땅재주를 넘고, 무동도 태우고, 12발이나 되는 상모가 돌아가다 하늘로 솟구쳐 원을 그리며 땅바닥에 내리꽂기도 했다. 그럴 때면 탄성과 환호가 횃불처럼 피어올랐다. 그 소리와 재밋거리을 보며 까까머리 어린 시절의 소년 박범훈도 무리의 하나로 환호를 질렀을 게다. 더구나 넓은 사랑채를 가진 그의 집에는 흥에 넘치는 부친의 배려로 남사당패가 들어와 있었으니.

학교에서는 트럼펫을 불고 집에 와선 장구를 쳐대며 날나리(태평소)를 울려댔다. 음악적 재주가 있었기에 그 자신도 그 소리에 흥을 내었고, 곧잘 불어대는 주인집 아들의 신통방통함에 남사당 어르신들도 재주를 칭찬했다. 고단한 삶을 사는 마을 사람들 눈에야 이들의 노는 짓이 농짓거리쯤으로 여겨졌겠지만 그것이 박범훈 교수에게는 40년 소리 인생의 출발이요, 우리 국악의 체계화와 세계화의 밀알이었던 셈.

“당시 최고의 실력을 갖춘 남사당의 꼭두쇠는 남운용 선생이었는데, 나팔을 부는 나를 보고 ‘그것 백날 해봤자 딴따라밖에 안 되니 국악학교에 가서 국악을 공부하라’고 하시더라고요. 말뿐이 아니라 서울에 다녀올 때마다 국악예고의 소개 책자를 보여주며 막무가내로 밀어붙였어요.”

당시 양평에는 용문산에서 나는 고사리나물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었단다. 더구나 강 건너 박범훈 교수의 동네는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은 오지였다. 아버지 역시 국군 포로로 북한에서 6년간 투옥 생활을 하다가 귀환한 터라 세상만사를 포기한 듯 술만 들이부었고, 어머니는 조그만 부녀회 가게를 운영하면서 겨우 학비를 대주는 형편이어서 서울로 음악 공부 하러 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남운용 선생은 “범훈이의 재주가 아까우니 서울로 보내자”고 우겨댔고 “자고 먹을 때가 없으면 서울에 있는 남사당 건립패와 함께 있으면 된다”는 방법론까지 제시했다.

결국 소년 박범훈은 괴나리봇짐 싸들고 나룻배를 탔다. 남사당 꼭두쇠에게 손목이 잡혀 서울로 온 것. “서울로 올라올 때를 회상하면 소리 인연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어요. 해마다 10월이면 안성시가 주최하는 남사당 바우덕이 축제가 열리는데, 노래 중에 남사당의 애환을 그린 음악극 ‘남사당의 하늘’에 ‘덕아덕아 바우덕아 바람에 손목 잡혀 이 세상에 왔느냐’란 말이 나와요. 꼭 내 모습이 그랬어요. 꼭두쇠 남운용 선생에게 손목 잡혀 서울로 올라왔으니….”

스승들과의 만남현실 속의 배고픔을 음악으로 채우다

한국국악예술학교(현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는 남산 공원 안에 있었다. 고단한 생활이 시작됐다. 박헌봉 교장 선생님의 특별 배려로 악기 창고(현악실 : 가야금, 거문고 등의 현악기가 보관된 곳)를 지키면서 자취를 할 수 있었는데, 사는 꼴은 말이 아니었다. 수렁에서도 화려한 연꽃은 피어난다고 했던가. 외롭게 현악실을 지키며 1년째 되던 해 겨울, 키가 작고 얼굴이 동그란 중학교 1학년 학생이 현악실에 새 식구로 들어왔다. 사물놀이로 유명한 소년 김덕수였다. 당시 교장 선생님은 음악에 재주 있는 학생을 전국적으로 수소문해서 국악예고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김덕수 역시 남운용 선생과 함께 양평에서 남사당 공연을 했다고 하니 박범훈 교수와의 인연은 이미 양평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김덕수의 인기는 실로 대단했다. 학교 내에서뿐만 아니라 국악계 전체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장구를 치면서 상모를 팽이처럼 돌리는 그의 재주는 보는 이의 얼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그렇다고 먹고사는 게 다를 것은 없었다. 한창 먹을 나이, 언제나 배가 고팠다. 한번은 아침밥을 해놓고 보니 반찬이 다 떨어져 없었다. 김덕수가 나서서 소금이라도 구해올 요량으로 교무실에 숨어들었다. 그런데 일이 크게 벌어졌다. 마침 시험 때여서 부정 행위를 위해 들어온 것으로 오해한 숙직 선생님으로부터 치도곤을 당했던 것. 차마 “소금 좀 얻으러 들어왔다”고 말하지 못한 것이다. 있는 야단 없는 곤혹을 다 치르고 돌아온 김덕수의 손엔 소금이 박혀 있었다. 벌을 서면서도 소금만은 끝까지 손에 쥐고 있었던 것. 그들은 그 소금에 밥을 먹고 학교에 갔다. 눈물의 우동 한그릇 뺨치는 소금 한주먹 사건이다.

“학교 악기창고를 지키면서 말 못할 고생을 겪었지만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는 건 그 시절에 만난 소리 덕분인 것 같아요. 수많은 선생님 밑에서 그 분들의 음악 정신을 배울 수 있었죠. 어쩌면 내가 지금 만들고 있는 소리는 내 것이 아니라 국악예고 시절 훌륭한 선생님들로부터 배운 그 소리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에 불과한지도 모르죠.”

당시 국악예고 예술부장인 지영희 선생으로부터 국악 관현악 지휘와 피리, 해금을 배웠고, 당시 최고의 작곡가인 김동진 선생을 만나기도 했다. 작곡가의 길로 들어선 계기가 된 김희조 선생을 만난 것도 그곳이었다. 음귀가 밝아 틀린 음을 귀신같이 잡아내던 이병우 선생이 음 좀 틀리지 말라고 학생들에게 ‘살려달라’ 애원하던 목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생생하다. 국어를 가르치던 조동일(서울대학교 교수) 선생에게는 판소리 등의 가사를 알기 쉽게 배웠고, 영어의 허천택(동국대학교 부총장) 선생에게는 음악 그만두고 영어 공부 하라는 칭찬을 들었고, 국사를 가르친 홍윤식(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장) 선생님에게는 전국에 있는 사찰과 불교 예술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1968년 서울국악예고를 졸업한 청년 박범훈은 물 만난 물고기였다. 그해 가을 멕시코 올림픽에 파견되는 민속예술단 음악을 담당하게 되었다. 단복을 입고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양평 고향을 방문했을 때, 동네 사람들이 “이제 박씨네 집 고생도 끝났다”면서 나룻배 타는 곳까지 배웅해주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저 비행기 떨어질까 걱정되어 몇 번이고 꽉 붙들고 타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어린 나이에 많은 사람을 만났고, 넓은 세상을 보았다. 멕시코를 비롯해 미국의 전 주를 순회하며 고생도 많았지만 좋은 경험을 했다. 하지만 대학에서는 국악과를 선택하지 않았다. 대학에 들어가봤자 자신보다 피리를 더 잘 부는 교수가 없기도 하였거니와 음악대학에 들어가 서양음악 작곡을 전공하자는 욕심 때문이었다. 

‘자장가’를 작곡한 김대현 교수와 작곡 담당 이교숙 선생도 오늘을 있게 한 스승들이다. 그의 책꽂이에는 이교숙 선생이 쓴 「알기 쉬운 편곡법」이 손때 묻은 그대로 꽂혀 있다.

“이교숙 선생님은 내 곡에서 돈 냄새가 난다는 말을 곧잘 했어요. 중앙대 재학 시절 국립극장 개관 공연 ‘별의 전설’을 비롯하여 많은 작품을 작곡했죠. 그 분 말씀대로 돈도 벌었어요. 주로 무용곡을 작곡했고 레코드사와 계약해 편곡 아르바이트도 했어요. 가수 바니걸스의 곡도 작곡했어요. 그들이 부른 신민요 ‘님아’가 내 곡이죠.”

더 큰 것을 알기 위해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 그러나 일본 무사시노 음대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음악과(작곡) 졸업, 국립극장 개관 작품 작곡 등, 나름대로 화려한 그의 이력서를 들여다보더니 대학원 입학은 불가능하다고 한마디로 거절했다. 솔직히 말해 한국에서 온 유학생에 관심이 없었다. 더군다나 작곡과가 아니라 예술대학 음악과에서 작곡 전공을 했기 때문에 무사시노 대학원 작곡과에 들어올 자격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1학년부터 학부 과정을 다녔다. 다행히 그가 어머니로 모시던 국악인 안비취 선생의 후원으로 조그만 방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건방진’ 무사시노 음대는 갈수록 그를 괴롭혔다. 그러나 자그보다는 1학년 수준도 못되는 자신으 ㅣ실력이 그를 더 괴롭혔다.

일본어가 부족한데다가 교양과목까지 수업을 받아야 했으니 그야말로 죽을 지경이었다. 더 큰 걱정은 학비와 생활비였다. 할 수 없이 저녁이면 아르바이트를 했다. 지겨운 남산 현악실 생활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불고기집 석쇠도 닦아보고,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이것저것 가릴 것이 없었다. 여기저기 불려가 연주도 했다. 일본에 공연 온 한국 연예인들의 편곡도 했다. 정신없이 일을 한 탓에 생활은 그런 대로 괜찮아졌다. 학비도 그럭저럭 벌 수 있었다. 일본 대사관에서도 가끔 불러줬고, 나라에서 큰 공연이 있을 때도 찾아주었다.

그렇게 안정이 됐지만 한 가지, 무사시노 음대에서 실력을 인정받는 일이 남았다. 아무리 숙제를 잘해 가 도 칭찬을 받지 못했고, 작곡 레슨 시간에 나름대로 곡을 잘 써 가도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기회는 우연찮게 왔다.

당시 후쿠이(福井) 학장은 그를 불러  “우리 대학에 이런 유학생이 있었다니 영광이구먼”이라는 말과 함께 봉투를 건넸다. 그 속에는 한국행 비행기표와 함께 ‘대통령 취임식에 연주할 작곡을 부탁한다’는 내용의 공문이 일본에 있는 한국대사관을 통해 문공부에서 날아온 것이다.

이후 그를 보는 눈이 달라졌고 편안한 마음으로 현대음악 작곡을 본격적으로 공부할 수 있었다. 다행인 것은 그곳에서 세계적인 연주자를 만났다는 것이다. 외국의 유명 연주자가 일본에 오면 먼저 무사시노 음대에서 초청을 해 학생들을 위한 연주회를 개최했기 때문이다. 어렵게 공부한 만큼 더 많은 것을 얻으려 노력했다. 무사시노 음대 유학 시절은 그의 소리 인생에서 중요한 획을 그은 시기였다.

세계와 만나다 진정한 우리 소리를 찾아나서다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올림픽에서도 그의 음악은 세계인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어딘지 부족한 듯한 갈증은 불교 음악의 대한 호기심으로 이어졌다.

당시 도올 김용옥 교수 등이 이끄는 철학 모임에 참여하면서 찾은 쌍계사의 말사 국사암에서 불교 음악에 첫발을 담그게 되었다. 국사암이 소속된 쌍계사는 진감국사가 830년 중국 당나라에서 범패를 배워와 최초로 범패를 가르친 불교 음악의 본사다. 불교 음악에 관한 내용이 기록된 ‘진감선사대공탑비문’도 쌍계사에 있다. 절을 자주 찾지 않던 그가 새벽녘에 들었던 국사암의 석상훈(현재 불락사 회주) 스님의 도량석(사찰에서 새벽 예불을 하기 전에 도량을 깨끗이 하기 위해 치르는 의식으로, 목탁을 두드리며 경내를 돌면서 찬가나 계를 읊는 것) 소리에 빠져버렸다. 불교 음악에 조회가 깊은 상훈스님과 의기투합해 불교 음악의 체계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10여 년이 넘도록 ‘보현행원송’ ‘부모은중송’ 등 불교 음악을 작곡했다.

여전히 그는 소리에 빠져 있다. 정신없이 달려온 40년이었다. 오는 11월11일 하얏트호텔에서 그의 소리 인생 40년을 정리하는 「소리연」 출판 기념회와 함께 그의 손때가 묻은 곡을 모아 음반으로 묶어낸다. 정리를 하다 보면 “그간 해온 일이 너무 많아 줄이는 것이 일”이란다. 세상이 그를 가만 놔두지도 않는다.

현재 중앙대학교 부총장으로 지내는 일도 무시할 수 없는 업무다. 하루하루 스케줄표에 빈틈이 없다. 양평의 밴드부 중학생이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 40년이 지난 오늘 그렇게 공든 탑으로 쌓여 있는 것이다.

봉황은 오동나무에서 산다. 벽계수(푸른 오동나무)는 대죽 속에서만 자란다. 그 벽계수 위에 앉아 죽실(竹實)을 먹고 산다는 봉황은 허튼소리다. 죽실은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과실이기에. 하지만 상상할 수 있기에 그 꿈도 꿀 수 있는 법.

박범훈 교수는 소리에 묻혀 산다. 일가를 이룬 국악계의 거목은 여전히 우리 음악 속에 빠져 있다. 우리 음악으로 세계인을 놀라게 할 소리를 만드는 것은 아마 허튼소리일지 모른다. 어느 누구도 우리 음악의 열매를 수확한 적이 없기에. 하지만 박범훈으로 인해 상상할 수 있고, 꿈꿀 수 있게 되었다. 예측 불가능의 미래를 위해 그가 창조해낼 소리들을 기대한다.

글 / 강석봉 기자  사진 / 전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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