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꼬치 노점상을 가맹점 30개 기업으로 키워낸 20대 CEO 장정윤

닭꼬치 노점상을 가맹점 30개 기업으로 키워낸 20대 CEO 장정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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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경쟁 상대는 맥도날드! 남들은 성공했다고 말하지만 전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청년 실업 90만, 신용불량자 3백만 시대! 생존만으로도 버거운 이때 남다른 성공으로 주목받는 이가 있다. 꼬지필(COF)의 장정윤 사장. 단돈 3백만원으로 시작한 노점상을 가맹점 30개의 기업으로 키워낸 그녀의 성공 신화는 놀랍기 그지없다. 올해 나이 스물여섯. 차별화된 아이디어와 젊음을 무기로 남들보다 한 발 앞서 성공의 열쇠를 거머쥔 20대 맹렬 여성, 장정윤 사장에게 듣는 성공 노하우.

대학 1학년 때, 단돈 3백만원으로 노점상 시작

1997년 5월 부산여고 앞. 작은 체구의 한 앳된 여자가 리어카 한 대를 끌고 나타났다. 그녀는 학교 앞에 리어카를 세우고는 닭꼬치를 만들기 시작했다. 리어카 좌판 위에는 1천원짜리 닭꼬치 몇 개가 놓여 있었다. 용감하게도 모교 앞에 터를 잡은 그녀. 노점상 앞을 지나던 고교 은사들이 “너 여기서 뭐 하냐”고 물어올 때마다 창피한 마음에 얼굴이 붉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7년 뒤인 2004년 현재. 리어카에서 닭꼬치를 만들어 팔던 그녀는 30여 개의 직영점과 가맹점을 거느린 어엿한 기업인이 되었다. 직영점 두 곳의 매출만 따져도 월 6천만원. 1천원짜리 닭꼬치로 부산 일대를 평정한 것으로도 모자라 지난 연말엔 서울에 입성, 사세 확장을 하며 성공적인 프랜차이즈 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이 성공 스토리의 주인공은 닭꼬치 전문점 ‘꼬지필(COF)’의 장정윤사장(26). 그녀가 사업을 시작한 계기는 다소 엉뚱하다.

“어학 연수가 몹시 가고 싶었어요. 하지만 경제적인 여건이 허락지 않았죠. 당시 아버지가 친구 보증을 섰다가 금전적으로 큰 손실을 봐 집안 사정이 최악이었거든요. 어학 연수를 가려면 직접 버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죠. 패스트푸드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벌이를 시작했는데 그걸로는 어학 연수비는커녕 학비도 못 만들겠더라구요. 단기간에 큰돈을 거머쥐려면 장사 밖에 없겠단 생각에 노점을 시작했죠.”

부산에서 대학(동주대 관광통역과)을 다니던 1997년, 그녀는 휴학계를 제출하고 노점상으로 나섰다. 1천원짜리 값싼 물건이나 음식을 파는 반짝 장사가 노점상들 사이에서 최고의 인기를 끌 때였다. 그녀는 사업 아이템으로 닭꼬치를 선택했다.

“당시 1천원짜리 피자도 인기였는데 아무리 봐도 오래가지 못할 것 같더라구요. 액세서리를 취급하자니 패션 감각이 떨어져 자신이 없었구요. 그러던 와중에 번뜩하며 떠오른 게 바로 닭꼬치예요. 닭꼬치는 과거에도 있었고, 미래에도 있을 것이고, 선진국으로 갈수록 더 많이 먹으니 이보다 좋을 순 없다 생각됐죠.” 

초기 비용으로 들어간 돈은 1백10만원짜리 수레와 50만원짜리 오븐 등 장비를 비롯, 재료 구입비까지 모두 합쳐 3백만원. 하지만 단순히 좌판만을 펼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철저히 손님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새로운 제품을 개발해나갔다. 그녀의 닭꼬치는 특별했다. 장정윤 사장이 생각해낸 첫번째 깜짝 아이디어는 닭뼈를 모두 발라내고 살코기만을 꿴 닭꼬치를 만드는 것. 당시만 해도 뼈 없는 닭꼬치는 요즘처럼 흔치 않았다. 그녀의 고객지상주의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또 하나 히트 아이디어는 살코기를 꿰넣는 꼬치를 빼고 은박지에 싸서 주는 방식. 꼬치에 꿴 닭꼬치는 손으로 잡기는 좋지만 막상 먹기엔 불편함이 있다.

앞부분을 먹고 나면 옆으로 먹어야 하기 때문에 특히 립스틱을 곱게 바른 여자 손님들에게는 기피 음식으로 통하기 일쑤. 철저히 고객 입장에서 생각하고, 그것을 사업에 반영시킨 그녀만의 닭꼬치는 당연히 폭발적인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1천원짜리 닭꼬치는 하루 1천개 씩 팔려 나갔다. 한 달 매출이 3천만원에 육박하고 순수익이 많을 때는 1천만원에 이르렀다. 그녀는 사업을 시작하고 6개월간 순수익 3천6백만원이란 거금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사업 시작 초기 목적이던 어학 연수의 꿈을 이루었음은 물론이다. 그녀 나이 스무 살 때의 일이다.

고객의 말에 귀 기울인 것이 내 성공의 비결

장정윤 사장이 말하는 사업 성공 비결은 의외로 단순 명료했다. 그녀는 “여자라서, 게을러서, 고객 말을 잘 들어서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제겐 사업만큼 쉬운 것도 없는 것 같아요. 제가 여자고, 또 게으르다 보니 깔끔하고, 손쉽게 먹을 수 있는 닭꼬치 요리를 개발한 거고, 맛에 있어서는 고객이 시키는 대로만 했더니 성공이 눈앞에 와 있더군요. 사실 저는 요리를 잘 못해요. 하지만 요리 솜씨 좋은 주부 손님들이 ‘양념에 마늘하고 양파를 조금 더 넣으면 맛있을 텐데’ ‘커피물을 부으면 닭고기 비린내가 없어지는데’ 등등 이런 저런 조언을 해주셨고, 또 저는 그것을 잊지 않고 기억해뒀다가 내 것으로 만들었죠. 고기 사이에 떡을 넣은 쫀득꼬치, 얼큰한 맛을 느낄 수 있는 화끈꼬치, 갈비 양념을 맵게 만들어 바른 맵싹코치 등과 같은 메뉴들은 모두 그렇게 탄생한 거예요.”

시련도 있었다. 노점상 시절엔 단속이 가장 무서웠다. 단속반이 들이닥치면 인근 대학교의 학생 손님들 손까지 빌려가며 수레를 끌고 골목길로 줄행랑을 쳐야 했다. ‘돈이 좀더 모이면 번듯한 내 가게를 열어 이 지긋지긋한 설움에서 벗어나리라’ 이를 악물고 버틴 세월이었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유학에서 돌아와보니 어머니와 남동생에게 맡긴 노점은 망한 상태였다. 어머니는 단속반을 피하기 역부족이었고, 남동생은 덩치 큰 친구들과 함께 장사를 해 손님들의 발길을 뚝 끊기게 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녀는 다시 직접 노점을 도맡아 챙겼다.

“장사가 본 궤도에 오를 즈음 뜻하지 않던 경쟁 상대를 만났어요. 인근에 30평짜리 치킨집이 생긴 거예요. 도저히 경쟁이 안 될 것 같아 ‘나도 가게를 내자’ 결심했죠. 그런데 노점에서 번 돈을 유학비용으로 다 써버린 상태라 수중에 돈이 없었어요. 사채 3천만원을 빌려 4평짜리 가게를 마련했어요. 사람들이 모두 ‘학생이 사채 끌어다 사업한다’며 ‘미쳤다’고 했지만 전 지금도 잘한 일이라 생각해요. 왜냐구요? 그만큼 제 사업에 자신이 있었거든요.”

4평짜리 가게를 시작하면서부터는 ‘이제 됐다’ 싶었단다. 그녀의 아이디어는 더욱 빛을 발했다. 장정윤 사장은 기다리는 손님들을 위해 콜라를 무료로, 무제한 제공하는가 하면 번데기를 이쑤시개로 찍어 먹게 하면서 손님들에게 일식삼미의 즐거움을 선사했다. 하루 매출 1백만원이 넘으면서 장사는 번창했다. 직영점을 2개로 늘리고, 같은 장사를 하고 싶다는 사람들도 생겨 가맹점도 5개나 늘었다. 하지만 그 즈음, 그녀에겐 크나큰 위기가 찾아온다. 사업이 순탄하게 성장하던 2001년, 프랜차이즈 사업을 하자는 사람들과 동업을 했다가 실패를 한 것.

동업자들이 지나치게 빠른 시간에 큰돈을 벌려는 욕심을 내면서 무리한 투자를 한 것이 화근이었다. 수억원의 손실을 보고 동업은 1년 만에 깨졌다. 작년 연말 서울로 진출, 사업 확장에 나섰을 때는 ‘조류독감’이란 큰 벽에 부딪히기도 했다. 동업으로 진 수억원의 빚을 간신히 갚고, 새 출발에 대한 꿈에 부풀어 있던 그녀에겐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장정윤 사장은 “시련은 성공을 향해가는 길에서 필연적으로 만나는 과정에 불과하다”며 또래답지 않은 의연함을 보였다.

“어느 유명한 산악인에게 기자가 물었대요. ‘목숨까지 걸어가며 산에 오를 필요가 있느냐’구요. 그가 뭐라고 답했는 줄 아세요? ‘나는 산에 오르는 게 목표다. 그 산에 오르는 중간에 내가 목숨을 잃거나 다친다면 그건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 그 산악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해요. 전 시련이 두렵지 않습니다. 힘든 일에 봉착했을 때 ‘내가 내 목표를 향해 한 발짝 더 다가갔구나’ 생각한다면 극복하지 못할 것도 없죠.”

장정윤 사장은 지난해 말 또다른 도전에 나섰다. 부산에 닭꼬치 제조 공장을 설립함과 동시에 서울 진출을 감행한 것. 꼬지필을 한국에서 성공시키고, 더 나아가 중국, 일본, 미국 등 해외로 뻗어나가 세계적 브랜드로 정착시키기 위해선 같은 크기, 같은 맛을 제공함과 동시에 서울 진입이 필수라는 판단 아래 내린 결단이었다. 지난해 12월 대학로점을 필두로, 현재 서울 목동점, 경기 일산점 등 3곳이 오픈 된 상태.

누가 봐도 성공한 인생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란다. 꼬지필을 맥도날드와 같은 세계적인 시스템 체인으로 키워 나가는 게 장정윤 사장의 꿈. 지금까지 그래 왔듯,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한 그녀의 야심찬 행보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글 / 최은영 기자  사진 / 전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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