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동제약의 성공은 탄탄대로만은 아니었다. 66년 경쟁사가 가짜 경옥고를 만들어 팔다가 적발되는 바람에 광동제약까지 피해를 입었다. 98년에는 자금 위기로 1차 부도를 맞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정직과 신용으로 대응했고, 위기를 넘어섰다. 이젠 연매출 1천억대의 중견 기업! 타임머신 타고 최수부 회장의 성공 신화를 돌아본다.
#최수부 회장을 이야기 한다
굳은 의지
세상 어느 곳이나 그에게는 학교였다

성공의 묘약을 논하는 요즘, 성공에 이르기까지 그의 피나는 노력과 불굴의 의지를 돌아본다. 그러잖아도 살기 힘든 오늘, 그의 족적은 힘겨운 삶을 사는 우리에게 ‘우황청심원’이 될지 모를 일. 실제로 그의 성공 신화 뒤에 숨은 가슴 아픈 기억은 부지기수다.
어린 시절은 그야말로 고달픈 하루하루의 연속이었다. 1936년 일본 후쿠오카에서 태어난 그는 초등학생 시절 일본학생들과 섞여 공부를 해야 했다. 그러나 조선인이라고 ‘이지메’를 당해야 했고, 그런 차별에 대항해 싸우다 4학년 때 퇴학당했다. 해방 직후 일본에서 대구 달성군으로 돌아왔으나 기쁨도 잠시, 열두 살 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소년가장이 됐다. 아홉 식구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것. 초등학교 중퇴의 학력으로 편안하게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낙동강변의 모래밭에서 참외를 키워 팔았고 담배장사, 엿장수 등 안 해본 일이 없다. 더군다나 한국에서도 그는 이방인이었다. 조선말이 서툴다고 ‘왕따’를 당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산 넘어 산’이었다.
군에서 제대한 그는 고려인삼산업사의 경옥고(瓊玉膏, 피를 맑게 하는 보약의 일종) 외판사원으로 취직했다. 최씨 고집에 젊은 혈기까지 넘쳤으니 못할 게 없었다. 끈질긴 집념과 노력으로 최고 영업사원에 등극했다. 요즘 말로 판매왕이 된 것이다. 돈도 웬만큼 모은 그는 63년 광동제약사를 설립했다. 그리고 40성상이 지난 오늘 광동제약을 굴지의 기업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여기에 가장 큰 밑천은 ‘건강’이라고 얘기한다. 제약회사의 창업주로서 예측 가능한 대답이다. 하지만 허튼 말은 아닌 듯, 실제로 최 회장은 강골이다. 172cm, 70kg의 단단한 체격을 가진 그는 운동을 두루 좋아한다. 주중 1~2회 헬스클럽에 나가 1시간 정도 운동을 한다. 골프는 구력이 30년이나 된다. 덕분에 등산을 하면 젊은 사람들도 감당하기 어렵다.
직원들에게도 운동을 권장한다. 직원들의 건강이 기업의 건강이라는 그의 지론 때문이다. 건강 비결은 기업가답게 “일에 미쳐 살다 보니 아플 시간도 늙을 시간도 없는 것 같다”는 것. 그의 집무실에 걸린 액자 역시 그의 말에 힘을 보탠다. ‘재보만고건실무용(財寶滿庫健失無用, 재물이 창고에 가득해도 건강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처럼 건강에 자신감을 갖고 있는 까닭에 당분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다. 그래서 그는 “적어도 70대 중반까지는 경영 현장을 지킬 계획”이라고 한다.
신용
믿음은 하늘보다 사람을 먼저 감동시킨다
10년 전 광동제약 우황청심원의 TV 광고 카피로 유명한 ‘지금도 우황을 직접 고르는 최씨 고집’이 나이 몇을 더했다고 달라질 리 없다. 칠순을 앞두고 있지만 40년간 해온 것처럼 요즘도 매주 화요일이면 어김없이 경기도 송탄에 있는 공장에 내려가 우황을 육안으로 직접 검사한다.
이런 고집은 다시 말해 신용이다. 그렇게 해왔고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한 만큼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최씨 고집은 신용이다. 우수한 약재가 없으면 공장을 멈추겠다는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광동제약이 만든 제품 하나하나에는 최 회장의 품질 제일주의가 그대로 녹아 있다. “먹거리에는 아무리 비싸도 좋은 원료만을 써야 한다”는 그의 경영 철학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듯 신용으로 기업을 살렸던 그의 제약 인생은 신용 덕에 살아나기도 했다.
지난 1999년 IMF 시절, 사금융을 이용했다가 거액을 사기당했다. 실수는 그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회사를 경각으로 내몰았다. 1차 부도를 맞았다. 그러나 이 같은 소식에 주거래 은행을 비롯해 병원, 약국, 거래처가 오히려 적극적으로 ‘광동제약 살리기’에 나섰고, 전 직원들은 상여금을 반납하면서까지 최 회장을 도와 결국 현재의 우량기업으로 돌려세운 것이다. 그 역시 회사가 정상화된 후 직원들에게 주식 10만 주를 무상 분배하는 것으로 보답했다.

창업 후 10여 년 뒤 쌍화탕과 우황청심원 등을 개발, 한방약의 대중화에 앞장선 그가 최근에는 마시는 비타민 음료 ‘비타500’을 개발해 한방 제약계의 선구자가 되었다. 특히 ‘비타500’으로 인해 매년 매출이 100%씩 신장하며 1천억원 매출을 넘나들고 있다. 역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모양이다.
그저 경험만 파먹으면 더이상 발전을 기대하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 경험은 새로운 도전을 위한 밑거름이요, 나침반이다. 그 역시 수없이 도전했고 노력한 만큼 성과도 거뒀다. 광동제약은 매년 매출의 5% 이상을 연구·개발비로 쓴다. 올 들어서만 연구·개발에 2백억원 이상을 투자했다고. 최근 국제야생동물보호협약(CITES)으로 인해 사향 등 주요 한방 약재의 조달이 쉽지 않아 한방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해외에서 전량 수입하던 의약품을 80년대부터 국산화하기 시작했다. 편자환도 그런 케이스. 간 기능 개선제인 편자환을 개발해서 1983년에 첫 발매를 시작했다. 그뒤 매년 60억원대의 매출을 올렸다. 당시 환율로 따지면 2천만 달러 수준이다. 엄청난 외화 낭비를 막은 셈이다.
그가 요즘 관심을 갖는 것은 한방의 세계화다. 이를 위해 중국과 러시아, 동남아 등 해외 시장 진출에 적극 나설 계획이다. 의약품 등 제품의 기초 연구는 한국에서 하되 앞으로는 해외 매출을 늘리겠다는 것이다.
“한방 의학은 따지고 보면 중국이 한 발 앞서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 개발 기술이나 노하우는 우리가 훨씬 우위에 있습니다.”
#최수부 회장이 이야기한다
“출발할 때부터 품질만큼은 최고로 유지하자는 경영 원칙을 세웠고, 또 이를 실천하는 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의 말 속에 그의 성공은 최선의 결과라는 암시가 들어 있다. 역으로 시련은 결국 성공의 기회였고 끝내 그것을 이루어냈다는 것. 뚝심 철학은 과연 무엇일까! 최수부 회장의 목소리로 듣는 성공 스토리와 키포인트.
끈기
시련은 산삼보다 귀한 보약이다
첫째, 한 우물만 파야 한다. 요즘은 대기업뿐 아니라 중소기업, 심지어 조그만 점포에 이르기까지 너무 쉽게 업종 전환을 생각한다. 물론 항상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그 분야에 도전하는 일이 나쁠 것은 없다. 하지만 자신이 처음 시작한 일에 최선을 다해보기도 전에, 경영이 어렵거나 장사가 안 되면 그 즉시 업종을 달리하고 간판을 바꾸어 다는 모습을 너무 자주 보았다. 그 어떤 욕심도 부리지 않고 40년 동안 한방 외길만 걸어온 것은 내가 통이 작거나 도전을 두려워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스스로 택한 업종이 너무나 소중해서 감히 한눈을 팔 수 없었고, 내가 몸담은 울타리 안에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둘째, 집념과 끈기만 있으면 못할 것이 없다는 것. 제약회사 외판원이었던 시절, 영업을 하러 갔다가 문전박대를 당하고 나온 일이 그야말로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맥없이 포기하지 않았다. 다음날이나 그 다음날 반드시 다시 들렀다. 처음에는 목청을 높여 내쫓던 사람들도 열 번, 스무 번 찾으면 약을 팔려고 온 게 아니라 정말 인사차 들렀다고 믿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끈질기게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자꾸 들르는 행동 그 자체가 아니다. 갈 때마다 진심이 담긴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묻는 것. 비록 약을 사주지는 않아도 결코 섭섭해하거나 원망하지 않는 것. 언젠가는 그 사람도 내 고객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는 것. 이런 집념과 끈기가 나를 저력 있는 경영자로 키워냈다.
셋째, 물건을 파는 순간, 고객과의 관계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물건을 파는 순간 영업사원의 역할은 끝났다고 생각한다. 특히 아무 연고도 없는 낯모르는 사람들에게 물건을 파는 외판원의 경우,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영업사원의 역할은 ‘물건을 파는 순간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때부터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비싼 약을 산 고객이 제대로 효과를 보려면 사후 고객 관리가 더 중요한 법이다. 약은 정성이 반인데,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제때 정량을 지켜서 먹지 않으면 효능을 제대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소신을 갖고 약을 산 고객들을 꾸준히 찾아갔다. 약을 팔기 전에 인사차 열 번을 찾아간 고객이 있다면, 약을 팔고 난 후에는 그보다 더 자주, 스무 번 서른 번씩 찾아갔다. 그러다 보니 약의 효능이 제대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처럼 정성을 다한 결과가 바로 인간 최수부에 대한 신뢰로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한 번 맺은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진심으로 고객을 소중하게 섬기자 고객들도 계속해서 나에게 신뢰를 보내주었다.
성실
내가 모은 건 돈이 아니라 희망이었다
넷째, 하늘이 두 쪽 나도 지켜야 할 기업인의 자존심과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회사를 운영하다 보면 가장 힘든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정부, 행정 당국과의 마찰이다. 나 역시 정부 당국자와 대립한 일이 있었다. 광동제약이 만들어 팔던 ‘편자환’에 중국 인삼인 전칠을 넣었는데, 외화를 낭비한다며 정부 관료가 수입 금지 조치를 종용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하지만 고려 인삼과 중국 인삼은 같은 인삼과에 속하지만 효능면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 특유의 효능 때문에 편자환을 만들 때는 반드시 중국 인삼인 전칠을 넣어야 제대로 약효를 낼 수 있는 것이다. 억울한 마음에 몇 번이고 관계 기관에 항의를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어서, 급한 마음에 담당자를 찾아가 몇 시간을 기다렸다. 마침내 담당자를 만났지만, 설명할 틈도 주지 않고 욕설을 퍼붓는 통에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회사가 문을 닫고 길거리에 나앉는 한이 있어도 자존심 있는 기업인으로 남자는 생각에 정부기관장과 멱살잡이까지 하고 말았다.
그후 우여곡절 끝에 전칠의 수입이 허용되었고, 편자환도 정상적으로 생산할 수 있었다. 나 역시 다른 경영자들이 어려움을 겪었던 것처럼 과거 관계 당국의 이해하기 어려운 조치들 때문에 곤혹스러운 적이 많았다. 하지만 그런 부당한 조치에 무조건 복종하거나 머리를 조아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 때문에 스스로 기업의 존폐를 걱정할 만큼 위기를 자초하거나 여러 가지 어려움에 봉착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순간에도 기업인으로서 자존심은 지켜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기업인으로서 자존심을 지키는 것만큼 납세의 의무 또한 중요하게 여겼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직원들의 월급날과 세금 납부일은 지켜야 한다는 것이 기업인의 일차적인 의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다섯째, 같이 먹고 같이 산다는 것이다. 나는 직원들에게 엄하기로 소문난 경영자다. 하지만 내가 언성을 높이는 것은 직원들이 맡은 바 일을 소홀히 하거나 그 때문에 소비자에게 피해를 줄 만한 일을 했을 때다. 그래도 직원들이 나를 믿고 따라주는 것은 꾸지람에 악의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다른 이유라면 평소 직원들을 챙기고 배려하는 일에 나름대로 신경을 쓴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직원들과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면서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직접 챙겼고, 급한 경우엔 기꺼이 돈을 융통해주기도 했다. 외국 출장처럼 불가피한 일이 생긴 경우를 제외하고는 가급적 직원들의 경조사에 100% 참석하고자 노력했고, 아무리 회사 사정이 어려울 때라도 직원 식당의 쌀과 음식 재료만은 항상 최상품을 쓰도록 했다.
회사의 기반이 잡힌 다음부터는 직원들의 복리후생에 힘썼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중졸 직원들을 위해 인근 고등학교와 연계하여 야간 특별 학급을 운영했고, 아파트를 분양받아 영업사원들을 위한 숙소로 썼다. 또 해외 여행이 일반화되기 전인 1980년대에 영업사원들을 하와이로 연수를 보내기도 했다.
이런 노력은 IMF로 경제가 어려워지고 회사가 부도 위기에 처하는 긴박한 순간에 큰 보답으로 돌아왔다. 어려운 회사를 살리기 위해 직원들은 너도나도 발 벗고 나섰고, 노동조합이 주도하여 전 사원의 상여금을 전액 자진 반납하는 등 직원들의 고마운 노력 덕분에 광동제약은 부도 위기를 극복하고 ‘비타500’이라는 대역전타를 날릴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보유하고 있던 대표이사 주식 10만 주를 직원들에게 무상으로 양도했다. 회사가 살아야 직원이 살고, 직원이 살아야 회사가 산다는 것을 40년 동안 몸으로 배웠기 때문이다.
글 / 강석봉 기자 사진 제공 / 광동제약·랜덤하우스중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