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을 통해 불심을 깨치고, 그림을 통해 불심을 키우는 지리산 지통사의 노사나 상묵스님. 얼마 전 화재로 수년간 그린 수천 점이 모두 불탔다. 끼니를 때울 먹거리가 풍족치 않으니 화구를 살 돈이야 엄두도 못 낼 일. 절빤지 모아 황톳물 먹인 스님만의 캔버스에 비움의 미학을 채워나간다. 그의 그림은 오는 11월 3일 경향갤러리에 전시된다.

근대사의 질곡을 대하드라마로 펼쳐 보인 소설 ‘토지’의 평사리가 호위하고, 보통 사람들의 삶을 어루만지며 억척스럽게도 살아온 짚신의 고장 신기마을이 떠받치는 곳. 경남 하동군 화개면 탑리의 지통사. 지리산 형제봉 중턱, 백운산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는 작은 암자다. 쌍계사의 말사인 그 절에서 불심에 트인 노사나 상묵스님이 세상을 그리고 있다고 했다.
스님이 이곳에 터를 잡은 지도 어느덧 10년. 산새 소리와 지리산의 청정한 바람 소리를 벗 삼아 혼자 산사를 지키고 있다. 상묵스님은 꽤 이름이 알려진 화가다. 미술을 공부하던 스님은 지난 72년, 지리산 쌍계사에서 출가를 한 후 해인사와 통도사, 범어사, 대흥사, 실상사 등을 다니며 공부에 열중했다. 지리산 깊은 곳의 고즈넉한 산사와 외로이 그림을 그리는 스님. 로맨틱한 인터뷰가 가능할 듯하다. 기대 충만!
하지만 하염없이 차를 달려 찾은 그곳에서 층으로 쌓아진 듯한 절터의 해묵은 빛깔을 넘어 세 순배를 오르니 허물어질 듯 위태한 시골집 하나와 맞닥뜨린다. 스님이 기거하는 곳이란다. 절이라 했거늘, 컨테이너 박스에 모셔진 법당의 낯섦이 의아했고 우사처럼 트이고 파편처럼 부서진 작업장 풍경(?) 또한 생경했다. 절터는 있되 기대하던 불사는 없고, 스님이 있음인지 농군이 있음인지 작은 소채밭을 분주히 오가는 법의 입은 촌로의 풍경만이 주변과 조화로이 녹아들 뿐.
해가 바뀌기 전 분명히 지통사 선화당 뜰 앞에는 꽃들이 피어났고 선화당 가득히 불심인지 선심인지 지나는 이의 눈을 사로잡은 작품 수천 점이 있었다는데, 오늘 찾은 지통사는 아무 것도 남은 게 없이 비어 있었다. 공(空)! 빈 산사에서 불심의 극치를 우연찮게 경험했다. 번뇌 끝의 득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게지?’
프랑스에서 수년간 그려온 작품 전시회가 열리기 며칠 전, 우연치 않은 화재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니. 스님 옷가지마저 활활 태우고 그저 온전히 스님 몸 하나 남겨놓았다는 전언에 가슴 한켠이 아려온다.
“다 잃었지. 그간 그려온 그림도 다 없어졌어. 사실, 그 그림들 팔아서 불사를 지으려 했는데, 어쩔 수 없지. 지금 돌아보면 배운 것도 많아. 그림이야 다시 그리면 되고….”
솎아온 열무 새순을 한 타래 들고 말하는 모양이 생각과 달리 평온하다. 작품 수가 기천을 헤아릴 만큼 그림을 그려온 지도 꽤나 오랜 시간이다. 속세를 잊고 살아가던 스님이 다시 붓을 든 것은 어느 여름날 비가 온 후 천년 고찰의 기와에 묻어 있는 이끼가 파릇파릇하게 돋아나는 것을 보면서부터라고.
“출가한 후 한동안 그림을 잊고 지냈지. 그런데 숙소로 돌아오다가 비가 갠 후 법당 지붕 기와 위에 덮여 있는 푸른 이끼를 보면서 그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어. 그래서 다시 붓을 잡은거야.”
그러나 수행 생활을 하면서 속세에서처럼 하고 싶은 대로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틈틈이 짬을 내어 그리는 스님의 작품은 5년여 고찰의 기와 그림이 주류를 이뤘다. 선원에 공부를 하러 다니다가도 해제철이 되면 그의 손에는 어느 순간 붓이 쥐어져 있었다. 그에게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수행의 한 방편이 되었다.
마음속의 부처를 그리듯 그의 화폭에서는 부처가, 미륵보살이, 그리고 수행을 떠나는 스님들의 모습이 피어났다.
“한번은 그때 그린 기와 그림을 팔라며 사람이 찾아왔었지. 2억원을 준다더군. 한 번도 그림을 판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아서 거절했어. 그 그림도 이번 화재로 소실됐지…”
이제 스님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손으로 두드려 만든 화판 에 황토를 덧씌워 자연을 닮은 그림을 그린다. 지난 97년 5월,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스님은 수도 생활중 틈틈이 그린 그림을 모아 첫 개인전을 열었다. 전시회의 주제는 ‘동심’이었다. 그후로 10여 차례 전시회를 열었다. 그러나 마음으로든 상황으로든 또다시 출가승의 비워진 마음이 되어 그린 황토판 그림을 모아 오는 11월 3일부터 정동경향갤러리에서 전시회를 가질 예정이다.
은둔 속의 수행, 스님의 장광설은 그림에 있다
어찌 보면 오늘의 지통사는 바랑 하나 짊어지고 찾았던 처음의 지통사를 닮았다. 예전에 사찰이 있었다는 이곳에 터전을 잡은 스님은 토굴을 마련하고 철저하게 수도승의 삶을 살았다. 쌀과 소금만을 사오고 스스로 농사를 지어 끼니를 해결했다. 그렇기에 산을 내려가는 일도 거의 없었다.

봄철에 내려가면 마을의 농부들이 모자리를 설치하고 있었고, 다음에 내려가면 논에 벼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또다시 산사를 내려올 즈음이면 그 들판에서는 추수가 한창이었다. 이런 생활이 5년 정도 이어졌다. 자연 속에서 자연 그대로 자연의 일부가 되어 생활했다.
한때는 오랜 수도 생활로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된 적도 있다. 대소변을 받아내야 할 정도로 1년여를 아는 스님의 간호로 연명했다고. 하지만 그때의 투병이 곤혹만은 아니라고 얘기한다. ‘눈으로 보는 것 없으니 / 분별이 없고 / 귀로 듣는 것 없으니 / 시비가 끊어졌네 / 분별과 시비를 모두 놓아버리니 / 마음은 오직 부처님께 / 스스로 귀의하네’라는 선시를 떠올리며 “출가 생활에 있어 가장 행복한 때였지. 진짜 출가승답게 살 때가 그때였으니까”라며 지그시 눈을 감는다.
세상과 철저히 격리된 대자연 속에서 수도생활을 하면서 그려낸 스님의 그림은 독창적이다. 초기의 극사실적인 표현 기법은 혼자 수도 생활을 하면서 불교적인 색채가 물씬 풍기는 절제되고 힘찬 선으로, 그리고 단순화된 풍경으로 변화되다가 다시 수도승의 구도 생활을 그리는 동양적인 부드러움으로 나타난다. 그러다 보니 스님의 그림은 유화로, 혹은 동양화로, 혹은 묵화로 표현된다. 또 때로는 섬진강의 모래와 자갈을 그대로 사용하여 캔버스에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스님은 그림의 소재를 따로 찾지 않는다고 한다. 자신의 일상생활이 소재가 된다.
그러기에 스님의 그림 작업은 일기를 쓰듯 내면의 이야기들을 그려나가는 과정이 된다. 요즘도 봄부터 가을까지 스님의 생활은 농부의 그것과 비슷하다. 예불을 마치면 밭에 나가 파종을 하고, 김을 매고, 수확을 한다. 그리고 장마철이 되고, 눈이 쌓이면 농사를 짓듯 그림을 그린다. 스님에게 있어 농사를 짓는 일이나 그림을 그리는 일이나 모두 수행의 한 과정이요, 구도의 한 방편일 뿐일 것이다.
“법당 하나 짓는 것이 소원”이라는 스님은 “전시회를 통해 기금이 마련되면 법당을 지을 계획”이라고 말한다. 스님다운 스님의 소원, 활활 타오르던 불사의 화재마냥 여전히 활활 타오르는 불심과 화심의 순수한 마음일 터.
글 / 강석봉 기자 사진 / 전영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