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세대와 실버세대 사이에 놓인 기성세대의 가치관이 변하고 있다. 가족 이전에 자신의 삶을 중시하고, 새로운 도전을 통해 제2의 인생을 준비하는 사람들. 김용회·정연옥 부부는 ‘와인세대’의 전형적인 삶을 보여준다. 이민 생활 30년 만에 고국 땅 밟은 이색 커플의 꿈을 향한 늦깎이 도전.

김용회(55)·정연옥(52) 부부는 칠레 이민자 커플이다. 부부는 각기 다른 꿈을 안고 1년 전 고국 땅을 밟았다. 적어도 한국에 있을 동안만큼은 먹고살 걱정에서 완전히 벗어나보자고 작정했다.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을 계획하고 떠나온 여행. 남편은 침술인으로, 아내는 화가로 두 사람은 결국 꿈을 이뤘다. 속 모르는 사람들은 ‘팔자 좋은 사람들’이라며 손가락질할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들 부부의 과거 여정을 듣고 나면 상황은 또 달라진다. 어쩌면 사람들은 이들 부부의 생활을 접하며 자신들의 미래 청사진을 그려볼지도 모를 일이다.
나고 자란 울타리 밖에서의 30년 세월. 부부는 바쁘게 앞만 보며 달려왔다. 세상에서 가장 긴 나라. 한때 사회주의 국가였던 나라. 이민을 떠나기 전 부부가 칠레에 대해 알았던 것이라곤 두 가지가 전부다. 낯선 타향에서의 생활은 생각처럼 녹록치 않았다. 외로움을 느낄 새도 없이 두 사람은 ‘먹고살’ 걱정만을 하며 달려야 했다. 때문에 이들 부부에겐 청춘이란 이름의 찬란한 기억 하나 없다.
“한국에 와서 드라마를 보는데 ‘먹고살기 힘든데 이민이나 갈까’ 그런 대사가 나오더라구요. 저 그 말 듣고 정말 아연실색했잖아요. 이민 생활이 얼마나 힘들다구요. 몰라서들 하는 소리죠. 고생 정말 말도 못하게 많았습니다. 특히 우리 집사람은 밤낮없이 일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남편에 시동생 셋, 아이들까지 보살펴야 했어요. 힘든 세월 잘 버텨준 아내에게 정말 고맙고, 또 미안해요. 평생 은혜 갚은 맘으로 받들며 살려구요.(웃음)”
먹고살 일이 막막했다. 처음에는 가내수공업 형태로 하청을 받아 스웨터를 제작해 간신히 입에 풀칠을 했고, 77년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이 체결된 이후에는 한국에서 값싼 옷들을 들여와 조그맣게 도매상을 하며 자식들을 먹여살렸다. 자본이 조금 더 모아진 후에는 현지인을 고용해 봉제공장을 또 10년. 정확히 강산이 두 번 바뀔 동안 밤낮없이 일만 하며 살았더니 인생을 돌아볼 수 있는 자그마한 여유가 생기더라며 부부는 쓴웃음을 지었다.
“처음 이민 갈 때 파티복 한 벌을 해 가지고 갔어요. 당시만 해도 외국 나가면 하루 하루가 즐거운 이벤트의 연속일 줄 알았거든요. 몰라도 너무 몰랐던 거죠. 하루살이 인생에 파티가 가당키나 한가요? 결국 파티복을 팔아 생활에 보탰죠. 의류 도매상을 할 때는 큰아이를 낳고 사흘 만에 가게에 나와 일을 했어요. 그때 생각만 하면 눈물부터 납니다.”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어느덧 50줄에 들어서 있더라는 부부. 10년 전 이들 부부는 칠레에 자신들만의 실버 타운을 건설했다. 일단 터는 닦아놓은 상태. 부부는 5년 전 태평양을 끼고 있는 자그마한 어촌 알가로보(Algarrobo)에 2층짜리 방갈로 10채를 지었다. 노후에 편히 쉴 곳을 미리 장만해놓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난 1년간 아내는 그림을 그렸고, 전 침술을 익혔습니다. 노후를 위해 일찌감치 마련해둔 곳이 다 좋은데 인근에 번번한 병원 하나 없어 늘 마음에 걸렸거든요. 굳이 아내와 내 삶을 위해서가 아니라 해도 배워두면 좋을 것 같았어요. 어업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소박한 이웃들을 위해 여생 봉사하며 사는 것도 보람 있지 않겠어요?”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 했다. 6개월간 침뜸교육원 ‘뜸사랑’에서 침술을 익힌 김용회씨는 한국에서의 남은 6개월을 불우한 이웃들을 위해 의료 봉사를 다니는 데 썼다. 자궁근종과 알레르기성 비염을 앓고 있던 아내의 병도 남편의 공으로 완치된 상태. 김용회씨의 철학은 “배워서 남 주자”다. 그는 “꿀벌이 다른 곤충보다 존중되는 것은 부지런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 일하기 때문 아니겠냐”며 껄껄 웃는다.
‘나’를 잃고 산 지난 세월을 보상받기 위해 1년 전 고국 땅을 밟은 부부. 시간을 두고 숙성하는 와인처럼 인고의 시기를 견뎌내고 새롭게 태어난 이들 부부의 얼굴에는 생기가 넘쳤다. 그도 그럴 것이 바쁜 일상 중에도 ‘언젠가 꼭 화가의 꿈을 이루리라’는 마음만큼은 잃지 않고 살았던 아내다. 화판, 이젤, 4B연필, 물감, 팔레트… 꿈결에나 그려보던 것들을 현실로 만나는 그 희열은 말로 형언하기 힘든 감동이었으리라.

부부는 요즘 행복한 노년을 머릿속에 그리며, 짧았지만 특별했던 고국에서의 지난 1년을 정리하려 한다. 이제 얼마 후면 아내 정연옥씨의 첫 전시회. 10월 25일부터 11월 2일까지 정동경향갤러리에서 열릴 전시회를 끝으로 부부는 다시 산티아고로 돌아간다. 이제 다시 가면 현재 하고 있는 무역 일 접고 자연을 벗삼아, 그림과 더불어, 그렇게 둘만의 행복한 노후를 알차게 채워갈 예정.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고 행복의 조건은 따로 있지 않다. 하늘의 뜻을 알게 된다는 지천명의 나이에 이룬 꿈. 김용회·정연옥 부부는 누구나 마음을 바꾸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불변의 진리를 일깨워준다.
글 / 최은영 기자 사진 / 지호영